24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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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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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1)
2023.03.24.
‘백작님의 아이예요. 그러니 백작님이 키워야 할 거예요.’
어렴풋이 들리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익숙하다. 더 들으면 저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낙엽 밟히는 소리가 여인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과 진동이 맞부딪쳤다. 곧 어둠이 까맣게 깔리고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서 허리를 일으킨 후였다.
밖에는 새소리가 첨예하게 들려왔다. 하녀들은 벌써 일어나 빨래를 널고 있었으며, 집사들은 마구간과 마차를 점검했다.
주방에서는 빵을 굽는지 고소한 냄새도 미세하게 풍겼다.
창밖에는 여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방 밖으로 나서자 웬일로 일찍 일어난 쌍둥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아침부터 활기차게 저택 곳곳을 누비며 뛰어놀고 있었다.
“어? 리제! 잘 됐다. 너도 숨바꼭질할래? 술래 시켜줄게!”
“됐어. 이제 막 잠에서 깼단 말이야.”
그 중 스웰이 먼저 날 발견하고 말했다. 내가 같이 놀기를 거부하자 스웰은 별 대꾸하지 않고 숨을 장소를 골랐다.
그대로 식당에 가자 먼저 앉아 식사하는 버나드와 펠리시아가 보였다. 그들은 벌써 학교 갈 준비를 끝낸 듯했다.
“안녕, 리제.”
“안녕.”
펠리시아는 날 쳐다도 보지 않고 대충 인사를 건넸다. 버나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 반대편에 앉아 물을 마시며 뻐근한 어깨와 허리를 풀었다.
“학교 가는 거야?”
“뭐라는 거니? 오늘 학교 안 가. ‘귀족의 날’이잖아.”
펠리시아가 말했다. 아, 벌써 귀족의 날인가.
일 년 중 삼 일 동안 귀족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쉴 수 있는 날이다. 정작 땀을 빼며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인데 참 아이러니한 제도였다.
“근데 왜 벌써 일어나 있어?”
“뭐야, 왜 모르는 척이야? 오늘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했잖아.”
“펠리시아, 쟨 안 가. 어머니께서 안 데려간다고 했어.”
버나드의 말에 펠리시아는 나의 눈치를 보다 입을 다물었다. 나 또한 분위기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말을 내뱉지 않았다. 예상했지만 직접 들으니 좀 충격이었다.
‘자꾸 마음 약해지면 안 되는데.’
수도에서 약간 떨어진 북쪽에는 엄하고 까탈스러운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사실은 손자 손녀 사랑이 대단하신 분이다.
아이들 생일 때면 매일 선물을 한 보따리 보내주시곤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할아버지와 내 사이가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로드니의 말에 의하면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할아버지는 막내인 날 꽤 좋아했다고 했다.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태어난 아이라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나를 챙겨주었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사생아임을 들켰을 때였다.
커가면서 머리 색이 뚜렷해지자 할아버지의 의심이 시작되었다. 눈동자 색은 그렇다 쳐도 머리까지 이세벨과 아버지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이니 수상하게 여겼고, 곧 내가 사생아임을 알아차렸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나를 마냥 좋아하지도 못하는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할아버지도, 나도 서로 불편했다.
여덟 살부터는 그사이가 더 어색해져 모두 할아버지랑 손잡고 놀 때 나 혼자 겉돌았다. 할아버지도 혼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에게 딱히 먼저 말을 걸어주거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홉 살, 몸살로 인해 내가 앓아누워 친정에 가지 못했을 때 할아버지 댁에 다녀온 형제들은 전보다 더 큰 선물 보따리를 들고 저택에 왔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할아버지와 노는 게 재밌었다고 다들 입 모아 말했다.
그래서 올해 초, 이세벨을 통해 나는 이날 할아버지 저택에 안 간다고 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리제, 너도 갈 거지?”
버나드가 슬쩍 말하자 옆에 있던 펠리시아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버나드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숨을 들이마셨다.
“난 안 가.”
“……리제, 가고 싶으면 가도 돼. 거기서 나랑 놀아도 되고.”
펠리시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나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됐어. 오빠나 언니들이나 잘 다녀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물을 마셨으니 식탁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날 부르는 펠리시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가슴이 살짝 먹먹한 게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침부터 기분이 울적해 불쾌했다.
알고 있다. 작년, 몸살에 걸린 내가 저택에 찾아오지 않자 할아버지가 편안했음을. 이해하고 있다. 이해한다. ……이해하려 했다.
“리제! 리제!”
이불 안에 숨어 있는데, 문이 활짝 열렸다. 스웰이었다.
“네가 술래해! 자꾸 내가 걸리잖아. 응? 응?”
저게 내 속도 모르고……!
내가 가만히 있자 스웰은 기어코 나의 이불을 확 걷더니 내 어깨를 흔들었다. 좀 화가 나 그의 얼굴에 베개를 던졌다.
“푸하! 뭐 하는 짓이야?”
“나가!”
“……뭐?”
“나가라고! 나가!”
스웰이 언성을 높였지만, 지금 내 기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키자 흠칫하던 스웰이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알, 알았어. 나, 나가면 되잖아!”
문이 쾅 닫혔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눈을 질근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잠에 빠지길 빌었다.
* * *
다시 일어났을 때 아침과 달리 강렬한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살짝 흐릿했던 날씨는 어디 가고 해가 완전히 떠 모든 색이 선명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열 한시.
배가 슬슬 고파 나가자 한적하고 조용한 복도가 날 반겼다. 스웰과 실케가 시끄럽게 뛰어놀던 때와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아까 숨바꼭질하자고 했을 때 할 걸 그랬나…….’
마지막으로 스웰에게 화풀이했던 것이 생각났다. 기겁하며 문을 닫는 스웰의 얼굴을 상기시킨 나는 약간 반성했다.
“어머, 아가씨. 이제 일어나셨어요?”
빨래를 다 마치고 액자를 닦던 비티가 내 모습을 발견하고 물었다.
“다들 나간 거야?”
“여덟 시 즈음에요. 밤늦게 올 거 같다고 마님께서 아가씨 식사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잘 부탁은 무슨. 내가 허튼짓 안 하나 감시하라고 했겠지.
차라리 잘 됐다. 저택에 홀로 있는 상황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이제 익숙하다. 그리고 혼자면 평소 하지 못했던 짓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가령 책을 읽거나 체스를 두거나…….
연습을 강조했던 로저의 말대로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머릿속에 일정을 생각해둔 뒤 대충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비키가 차려준 식사를 한 뒤,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다.
저택에 남아 있는 하녀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동시에 내 독서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리제! 그런 자세로 누워있는 건 안 돼!’
만약 이세벨이 있었다면 지금 내 행동, 내 자세를 지적하고 남을 거였다.
스웰과 실케는 소파 뒤에서 칼 싸움을 하며 놀고 있을 테고, 학교에 막 돌아온 버나드와 펠리시아는 오늘 누가 자신을 귀찮게 했다며 투덜거리겠지.
“음.”
오늘따라 책이 재미없었다.
한 달 전에 읽었던 책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책을 내려놓고 체스 보드를 들고나온 나는 기물들을 그곳에 올려두었다. 기물들이 제 위치를 두었지만 문제는 같이 둘 상대가 없다.
하녀 중 체스를 둘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는데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다.
“……재미없어.”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책 읽는 것도 실패. 체스 두는 것도 실패했으니 나머지 하나는 바이올린 연습이었다.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자.
‘그래! 차라리 로저를 보러 로스코프 마을로 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결정한 나는 몸을 빠르게 일으켜 겉옷을 챙기려 했다. 힘찬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오르는데 어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로저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내일 할머니가 계신 저택에 가기로 했어. 친척들도 다 오겠지.’
그는 할아버지 저택에 간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유릭도 할아버지 저택에 간다며 울상을 지었다.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이 멈췄다. 갈 곳을 잃었다.
“아가씨?”
내가 계단에서 멍하니 서 있자 마침 그곳을 지나가려는 비티가 물었다. 그녀는 좋지 않은 내 안색이 걱정스러운지 바구니를 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내 이마에 조심스레 닿았다.
“어디 아프세요? 하지만 열은 없는 거 같은데…….”
“비티. 어떻게 하면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갈까? 눈을 떴는데 한 달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그럼 바닷가에 갈 수 있잖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비티는 고개를 갸우뚱하다 손뼉을 살짝 쳤다.
“아가씨. 같이 꽃 구경 가실래요? 오늘 날씨가 좋잖아요. 춥지도 않고.”
“꽃 구경?”
“네. 겉옷을 챙겨올게요!”
비티가 따분해하는 날 위해 제안했다. 그녀는 바구니를 다른 하녀에게 맡긴 후, 내 겉옷을 챙겨 내려왔다.
그 사이 외출용 겨울 구두로 바꿔 신은 나는 마지못해 나가는 척하면서도 신발 끈을 서둘러 묶었다.
꽉 조인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추웠던 바람이 서늘해지면서 가시만 있던 나무에도 나뭇잎이 하나씩 돋아났다.
“아가씨, 같이 가요!”
비티는 내 뒤를 쫓아왔다. 꽃밭으로 가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작은 숲을 넘어야 했다.
“아가씨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으세요?”
“응?”
내 옆으로 온 비티가 뜬금없이 물었다.
“아니, 아까 빨리 한 달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얼른 어른이 되어서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거 아니세요?”
“딱히.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왜요? 아가씨라면 분명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면 책임감이 따르니까. 운이 나쁘면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을 것들도 책임져야 하잖아. 난 그게 힘들어.”
“……가끔 보면 아가씨는 성인 같아요. 마치 인생을 다 살아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
예리하다.
“그래?”
“네. 마치 혼자 가장의 역할을 한 사람처럼요. 연극 중에 그런 인물 있잖아요. 가정이 좋지 않아 어린 나이부터 고생한 주인공이요. 온갖 일을 하다가 어린 시절부터 철이 든 인물이죠.”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 되는데?”
“……보통 두 가지로 갈려요.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거나 아님 불쌍하게 죽죠. 아가씨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아, 아가씨는 왜……마님도 계시고, 주인님도 계시고, 형제들도 많잖아요! 또 마르센 가문은 얼마나 명문가인데요!”
“비티. 하녀는 그만두고 지금 당장 점술사로 일해보는 건 어때?”
“네? 아, 아가씨?”
비티의 물음에 모른 척 웃었다. 그녀는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는지 안절부절 내 뒤를 따라왔다.
“아, 아가씨!”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불쌍하게 맞이한 죽음이란 소리에 현실과 연극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깨달았을 뿐이다.
‘왕자님은 존재하지 않아.’
그 사이 숲을 지나쳐 꽃밭에 도착했다. 겨울꽃만 가득했던 꽃밭에도 서서히 다른 색깔이 입혀졌고, 딱딱한 바닥엔 풀이 자라났다.
“…….”
“리제?”
부드러운 음성이 내 귓가에 꽂혔다.
고개를 올린 나는 살짝 미소 짓는 유릭을 발견했다. 추운 겨울과 바람으로 흔들거리는 흰 머리카락이 잘 어울렸다. 꽃의 색깔 때문인지 유릭의 얼굴이 더 밝게 보였다.
근데 그가 왜 여기 있을까?
“유릭?”
“또 만났네.”
이어 그는 활짝 웃는다.
생각해보면 왕자님은 존재하지 않아도 영웅은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 생에 나의 영웅은 아껴 읽었던 소설「펜턴 가의 영웅」유릭 펜턴이었고, 나의 두 번째 생에는 그 유릭 펜턴이 실존해 내 앞에 있다.
“보고 싶었어, 리제.”
마치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