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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2) (25/47)


25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2)
2023.03.28.



“리제? 괜찮아?”

언젠간 나를 죽일 영웅.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유릭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는 동화책을 내려놓고 내 앞까지 걸어왔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춥지도 않은지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었던 유릭이 제 옷을 살폈다. 나에게 겉옷을 벗어주고 싶었는지 유릭은 벗지 못하는 자신의 옷차림새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겉옷을 안 챙겨왔네. 추운데 얼른 들어가, 리제.”

“……할아버지를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유릭이 고개를 올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할아버지 저택에 간다고 했잖아. 오늘은 휴일이니까…….”

“아, 회사에 마찰이 생겼나 봐. 그 일을 해결하고 바로 갈 거야.”

“그럼 저택에서 책을 읽어도 되잖아.”

그냥 넘어가면 될 걸 나도 모르게 캐물었다. 기분이 나빴을까, 유릭을 흘끔 쳐다보았다.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지만 그는 말을 주저했다.

유릭답지 않게 말을 망설이는 걸 보아하니 사정이 있나 싶었다.


“말하기 힘들면 안 말해도 돼.”

“아니, 그게……. 아까 어머니랑 장터에 갔거든. 그때 우연히 마르센 저택을 봤는데 불이 켜져 있길래 친척 집에 가지 않은 건가 싶었어.”

그게 이곳에서 책을 읽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유릭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여전히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내가 빤히 유릭을 쳐다봤다.


“그래서 여기서 책을 읽으면 너랑 만나지 않을까 해서. 여기서 우리 자주 만났잖아.”

“아…….”

내가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근데 너는? 왜 친척 집에 가지 않은 거야?”

민망함에 유릭은 빠르게 주제를 바꿨다. 그의 질문에 악의는 없었지만 나는 흠칫했다. 정곡에 찔린 기분이라 내가 멋쩍어 웃자 유릭은 내 기분을 눈치채고선 당황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뭐야, 방금 내가 한 말이랑 똑같잖아.”

“마음이 같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작게 웃자 유릭은 살짝 삐친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더 놀려주고 싶은 걸 나는 꾹 참았다.

그러고 보니 유릭은 내가 사생아임을 알고 있을까. 머리 색은 물론 눈 색도 다른 형제와 다르니 수상하게 생각했을 거다.

그렇다 해도 내가 내 입으로 사생이라는 사실을 꺼내는 건 다른 얘기다. 이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내 입으로까지 마르센 가를 부정하면 누가 날 가족으로 여겨줄까.


“다들 나만 빼고 할아버지 댁으로 가긴 했지.”

유릭은 의미를 알아채고 더 묻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유릭이 날 동정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는 귀족이었고, 후계자였다. 사생아라는 위치가 귀족 자식에게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유릭은 잘 알고 있을 거다.

사생아는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가족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다른 집안에서는 사생아를 귀족으로 쳐주지 않아 사회면에서도 불리한 위치였다. 그나마 사내아이였으면 좀 나아졌겠지만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나는 거의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런 위치였다. 없는 듯 있는 존재.


“리제,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춥지 않아? 이제 저택에 들어가자.”

유릭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회피하고자 발걸음을 돌렸는데 유릭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자연스레 고개가 유릭에게로 향했다. 그는 뜸을 들이다 바닥에 있는 동화책을 내밀었다.


“……이거 같이 읽을래?”

“싫은데.”

“어?”

거절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유릭이 멍해졌다. 그 표정이 우스꽝스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푸훗! 너, 표정 되게 웃겨, 지금.”

“이, 이 책 재밌어. 난 매일 세 번씩 꼭 읽어!”

“진짜?”

“아, 아니. 세 번까지는 아니고……두 번 정도?”

오늘따라 유릭이 나보다 어린아이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싱글벙글 웃자 유릭은 턱을 괴고선 날 쏘아보았다.


“그만 웃어, 리제.”

“웃음이 자꾸 나는 걸 어떡해?”

“젠장, 어른이 되면 이런 책은 금방 버릴 거야.”

“젠장이라니. 너도 그런 말을 쓰는 거야?”

“화가 났으니까.”

이제 그만 해야겠다. 더 놀렸다가 유릭이 내 얼굴을 안 보려고 하면 어쩌나.


“미안해, 유릭.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

“응? 응?”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해.”

유릭 앞에 얼굴을 내밀며 칭얼거리자 그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그거로는 부족했다. 나는 확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 유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말? 나 안 미워해?”

“근데 리제, 너무 가깝지 않아?”

“대답부터 해.”

점점 유릭과 내 사이가 좁혀지자 가라앉았던 그의 얼굴빛이 다시 붉어졌다.


“난 네가 좋아, 리제.”

심장이 쿵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냥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유릭은 견고한 눈동자로 내 시선을 꽉 붙잡았다. 얼굴은 여전히 빨겠지만 하는 행동은 저돌적이었다.


“리제.”

“유릭은 날 좋아하는구나…….”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

“정말로?”

“웃지 마, 리제.”

“아, 내가 웃었어?”

“리제.”

유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긴 하였으나 나에게 고백하는 이 작은 소년이 귀여워 미소가 나왔나 보다. 근데 별수 있나. 유릭은 아직 2차 성장기도 오지 않았고, 변성기도 덜 와 목소리가 천사 같았다.

키는 컸지만 얼굴은 아직 아이처럼 귀여웠고 하는 짓도 그랬다. 그 내 웃음이 유릭에게는 비웃음으로 느껴졌는지 표정이 좋지 않다.


“귀여워서 그래! 귀여운 건……좋잖아?”

뒤늦게 변명했지만 유릭의 표정은 여전했다.


“난 안 귀여워. 귀여운 건 리제, 너지.”

“그럼 우리 둘 다 귀여운 거로. 어때?”

“난 안 귀여워.”

“알았어. 그럼 나만 귀여운 거로! 그리고 유릭. 정말 고마워. 네가 날 좋아해 준다고 해서 엄청 기뻐. 그리고……욕심이지만 앞으로도 날 미워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제, 그건 욕심이 아니야.”

“인간관계는 아무도 몰라. 종이 한 장으로 틀어질 수도 있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 서로 자연스레 멀어지겠지.”

잊혀지는 게 차라리 나았다. 서로 좋은 추억만 가진 채 후에 회상하는 관계만 꽤 성공한 거 아닐까.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유릭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유릭. 아, 아파.”

“난……너 안 잊어.”

이번에는 귀엽지 않았다.

유릭은 내 손목을 자신의 입가로 끌더니 그대로 내 손등에 입맞춤했다. 그의 입술이 닿자 손끝부터 떨림이 오갔다. 눈꺼풀을 내린 그의 얼굴을 보던 나는 몸이 경직되었다.


“너와 멀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

“절대로.”

웃을 수도 없다.


“아.”

기뻤다. 기뻤는데도……가슴이 뭉클하다.


“그 말 꼭 지켜줘야 해…….”

“응?”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자 유릭이 되물었다. 말을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정말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 유릭.”

유릭은 아쉬운 듯 나의 손끝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럼 리제, 공휴일이 끝나면 또 저택에 놀러 와.”

“응.”

“몇 주 뒤에는 약속한 대로 바다 같이 가자.”

“그래.”

“그리고 휴가가 끝나는 월요일 날 심심하면 이곳에 나와. 여기서 책을 읽고 있을게.”

유릭과 나의 손이 완전히 떨어졌다. 하지만 유릭의 시선은 끝까지 나를 붙잡았다.


“안녕.”

“안녕.”

나는 잠시 자리를 비켰던 비티에게, 그는 펜턴 공작 가로 향했다.


 

* * *

유릭을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좋았던 하늘색이 조금 거무스름하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엔 비가 내리고 있는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숲을 빠져나와 마르센 저택 가로 걸어갔다. 저택으로 가는 길 내내 비티는 유릭과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 물었다.

유릭과 만난다고 하면 걱정부터 했던 저번과는 달랐다. 비티는 유릭과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는 아닐까 하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때마다 아니라고 말했지만 비티는 들을 생각조차 안 했다.


“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일까요?”

비티가 저택 정문을 보더니 말했다. 저택 안에 있던 고용인들이 밖에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묘해 나는 서둘러 정문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고용인들이 날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정문으로 다가간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고용인들에게 물었다. 하나같이 낯빛이 어두워 나도 가슴이 졸여졌다.


“왜 말이 없어? 무슨 일인데.”

하녀들은 왜인지 말을 쉽게 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수상해 저택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없다. 뭘까?


“가족들이 다 간 이상 이 저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나야. 그러니 지금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 내가 알 권리가 있어.”

어리긴 하여도 나는 마르센 가의 자식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찡그리자 마구간에서 일하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게 한 여인이 찾아왔어요.”

“여인?”

“네. 주인님께 볼 일이 있다고.”

마르센 가에 찾아올 여인이 있나?

손님이 저택을 방문하려면 방문하기 전 안부와 사유가 적힌 편지를 보내야 했다. 그게 관례고 예의다.

하지만 부모님은 지금 할아버지 저택에 가셨다. 누군가 마르센 가 저택에 방문할 예정이었다면 이세벨이 진작에 나에게 말을 해주었을 거다. 즉, 이곳에 온 여인은 방문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손님이었다. 또한 귀족도 아닌 거 같다.


“아는 사람이었어?”

“그게…….”

마르센 가 고용인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십 년 이상 일을 했다.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면 그들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제발 제대로 말을 해줘.”

“수상했어요.”

“구체적으로 뭐가?”

“주인님을 한 번만 뵙게 해달라고 계속 부탁했어요. 저희가 거절하자 결국엔 실랑이를 벌였고요.”

수상한 여인이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더 자세히 말해줘.”

“……그게, 아.”

비가 한 방울 내 뺨에 뚝 떨어졌다. 고개를 올리자 어느새 몰려든 회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여 태양을 가렸다.


“어머, 빨래 널어놓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저도 급하게 말을 두고 와서……!”

아직 비가 많이 쏟아지는 것도 아닌데. 고용인들도 서둘러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장난하나?”

도대체 누가 찾아왔길래 다들 나를 피하는 것일까.

정문에서 가만히 서 있는데 뒤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놀라 등을 돌렸지만 인기척과 다르게 앞에는 스산하니 아무도 없었다.


 


‘뭐지?’

누군가 날 보고 있었는데. 눈을 가늘게 떠 시선이 느껴진 곳을 뚫어지라 보았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이제는 장대같이 쏟아졌다. 시선이 느껴졌던 나무를 집요하게 보다 끝내 포기했다. 드레스가 더럽혀지기 전에 저택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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