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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3) (26/47)


26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3)
2023.03.31.


천둥까지 쳐 요란한 소리가 빈 복도를 가득 채웠다.

창문 밖은 시야가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대충 감았다. 얼굴과 몸을 정돈하는 데에는 기껏해야 십 분 정도였다.

사실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문 너머 조용한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때다.’

하녀들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곧장 서재 앞까지 뛰어 내 키보다 훨씬 큰 금색 갑옷 앞에 섰다. 손에는 칼날이 날카로운 롱소드가 쥐어져 있었다.


“분명 진짜 칼날이라고 했으니까…….”

칼날을 무서워한 아버지로 인해 저택에 쓸만한 검은 이것뿐이다. 그래도 불안해 나는 모래주머니나 바늘, 다트 핀 등. 상대방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는 다 끌어왔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 무기들을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상대방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진 않겠지.

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내 몸은 내가 지켜.’

나는 나의 감각을 믿었다. 저택 정문 앞에서 느꼈던 그 시선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었고, 아마 그 사람은 고용인이 말한 수상한 여인과 관련이 있을 거다.


“아가씨? 뭐 하시는 거예요?”

열린 문틈으로 비티가 들어왔다. 빨래를 마친 바구니를 들고 온 비티에게서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은 나니까. 내가 저택을 지켜야지.”

“어머, 용감하시네요.”

“정말이야. 비티,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아까 그 수상한 여자가 아직도 저택 곁을 머물고 있다고. 분명 몰래 들어오려고 때를 노리고 있을 거야.”

“그럼요. 근데 정말 누굴까요? 그 수상한 여자는.”

“너도 듣지 못했어?”

내가 묻자 비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져온 바구니에서 옷을 하나씩 꺼내 옷걸이에 걸었다.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버지는 토지사업을 하고 계셨다.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몇몇 건은 뒷손을 잡아 일을 치른 것으로 안다. 암흑가의 사람들은 언제 독을 가지고 올지 모르니 항상 경계해야 했다.

또 아버지의 말을 믿고 토지에 투자했다가 돈을 왕창 잃은 사람이라면……충분히 독기를 품고 이 저택에 찾아올 만하다.


“그래도 아가씨.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혹여 위급한 일이 있더라고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를 필사적으로 지킬 테니까요.”

“고마워.”

“……아 그러고보니 도련님 편지 보셨나요?”

도련님이라면, 기숙학교로 현재 기숙사에서 생활 중인 장남 로드니를 말하는 거였다. 봄 즈음에 합격통지를 받고 학교로 간지라 얼굴을 못 본 지는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오빠한테 편지가 왔어?”

“네. 겨울방학이잖아요. 원래 기숙사에 계속 머물 예정이었지만, 룸메이트도 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잠깐 저택에 오시나 봐요.”

“……그래 봐야 한 주 정도겠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 마세요. 로드니 도련님께서 기숙사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애초에 걱정도 안 했다. 특유의 능글거리는 성격과 상황을 잘 파악하는 로드니 마르센이다.

저 어딘가 짐승무리에 던져놓아도 그는 그들을 모두 제 친구로 만들고선 사이좋게 어깨동무나 하고 놀 사람.

로드니가 온다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 하나 더 늘었다.

가끔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거 같아 심술궂을 때도 있지만 로드니가 오면 저택이 화목해졌다.


“……!”

“아가씨?”

마음을 부풀리고 있는데 또 시선이 느껴졌다.

창밖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좇기 위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많은 비가 내리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도 붉은색 머리 색은 뚜렷했다.


“비티, 당장 저택을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문과 구멍은 막도록 해! 어서, 빨리!”

“네!”

비티가 서둘러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형체를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자 같았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었고, 맨발이다.


‘아까 저택을 찾아온 그 여자겠지!’

조금만 가까이 오면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바람과 달리 여인은 몸을 틀더니 한순간에 저 멀리 사라졌다. 일그러진 형체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나무만이 내 시야에서 움직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뭐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이 저택을 지켜보고 있던 그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여자가 사라지자마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풀린 다리에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여인의 형체를 떠올렸다.

짐작하건대 그녀는 날 보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지그시.


“아가씨, 괜찮으세요?!”

비티가 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 다가왔다.


“……비티? 문은?”

“모든 문과 창문은 잠갔어요. 사내들은 현관 앞을 지키고 있고요. 저와 다른 사람들은 같이 복도를 살필 거예요.”

“그래…….”

“안색이 창백해요. 안 되겠어요. 아가씨께선 좀 주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비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니, 난 괜찮아. 나도 같이 복도를 살필게.”

“아뇨, 제 말대로 하세요.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은 아가씨예요.”

“뭐?”

“아가씨께서 이런 성치 않은 몸으로 돌아다니면 저희가 곤란하다고요. 침대에 누워만 계세요. 혹시 모르니까 주방장을 시켜서 아가씨 방문 앞을 지키도록 할게요.”

비티가 단호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고집을 부렸겠지만 힘이 풀린 다리로 복도를 돌아다닐 수 없다.

비티는 내 몸을 부축해 침대로 옮긴 다음 목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주었다. 그 후 방 창문을 모두 잠근 뒤 주변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건 아가씨가 가지고 계세요.”

방을 모두 점검한 뒤, 그녀는 내 옆에 롱소드를 놔두었다.


“비티. 정말 내가…….”

“아가씨. 이런 건 원래 저희가 하는 일이에요. 아가씨는 몸 상태를 회복하고 계세요.”

“……조심해.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방문은 열고 있을게요.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꼭 소리를 질러야 해요.”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갔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한 손에는 롱소드를 꼭 쥔 채. 이것이 내 목숨줄인 양 놓지 않았다.


‘난……난 죽지 않아.’

당하고만 있다가 목숨을 잃은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소망 한 번 못 이루고 비참하게 죽는 짓을 반복할 순 없다.


‘제기랄. 자꾸 떠올라.’

눈을 감으면 그 여자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구길래 단 한 번 모습을 비춘 것 하나로 날 이리 괴롭히는 것일까.


 

* * *

「펜턴 가의 영웅」을 처음 본 날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겨울이었다.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산 건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문제집 한 권 사는 것도 무서워 덜덜 떨렸던 손이 왜 그 책을 향해 올곧게 뻗어 갔을까.

표지가 마음에 든 것도 아니었다. 중고 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깨끗하고 밋밋한 표지다.

그나마 마음에 든 것이라곤 가격이다. 그렇다고 해 들어 본 적도 없는 책을, 작가 이름도 모르는 책을 산 건 나답지 않은 일이다.

꾸깃꾸깃한 지폐를 꺼내 책값을 지불 했다. 봉투가 필요하냐는 직원의 말에 괜찮다고 답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책처럼 가슴속에 집어넣어 집으로 향했다.


“저기, 저기 있네!”

낡은 주택가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이터가 있었던 공터 앞에는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뱉는 사내 무리가 서 있었다. 이제 막 회사에서 돌아온 건지 아버지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보하야! 우리 딸!”

아버지는 불편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기억도 안 나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처음 보았지만 항상 아버지와 둘이 있으면 어색하고 눈치가 보였다. 모른 척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느리게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보하야, 이번에 아빠랑 같이 손잡은 친구들이다. 인사해.”

“안, 안녕하세요.”

“안녕. 많이 들었다. 공부 잘한다며? 꿈이 의사라고 했나. 나중에 돈 많이 벌겠네.”

“그래. 얘가 내 자식이 아니라서 그런지 공부 하나는 잘해. 똑똑하다니까? 익히는 것도 빨라. 초등학교 방과 후 때, 한 번 바둑교실에 들어갔는데 그 선생이 전화 와서 연구생 준비해보지 않겠냐고 했어. 근데 우리 애 꿈이 의사라서 거절했잖냐.”

숨을 죽였다. 단연코 꿈이 의사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던 시절, 요리사나 사서 같은 평범한 직업을 꿈꿨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 장래희망이 없어졌다.


“연구생? 에이, 그거 돈 안 돼.”

“내 말이. 애 인생 망치려는 그 XXX 선생.”

만약 초등학교 때 연구생을 준비했으면 달라졌을까.


“보하, 너도 이제 알겠지? 바둑 그건 돈이 안 돼. 나중에 프로시험 떨어져서 그대로 사회 나가면 뭐 해? 손가락만 빨지.”

“……네.”

대답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탓에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방과 후 무료 수업으로 바둑교실에 세 번 정도 나갔다.


‘보하야, 되게 잘한다!’

솔직히 바둑교실은 꽤 재미있었다.

돌을 둘 때마다 칭찬하는 선생님을 좋아해서 일지도 모른다.

수업을 몇 번 나간 후 선생님은 부모님께 전화했다. 나는 선생님과 통화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천재 소리 듣는 딸에 의기양양하면서도 바둑기사가 아닌 지난주 주말에 티브이에 나왔던 성형외과 의사를 입에 담았다.

고가 프리미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었다.

실력과 평판도 좋은 그 의사는 부모님께 차와 집을 선물했다고 인터뷰했다. 아버지는 그 인터뷰에 감명받았는지 내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의사를 나불댔다.

부끄러웠다. 항상 날 칭찬해주었던 선생님의 얼굴을 도저히 보지 못할 거 같았다. 그 뒤로 방과 후는 가지 않았다.


“그래. 넌 어서 집에 들어가 봐. 아빠는 친구들이랑 중요한 얘기 해야 하니까.”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저 멀리서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헤집었다. 머리가 지끈 아팠다.

이를 다독이듯 뺨에 뭔가 떨어졌다. 정신이 번뜩 들 만큼 차가웠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듬성듬성 내렸다.

첫눈이었다. 동시에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뺨과 콧등은 빨갛게 물들었는지 따가웠지만 책을 쥔 손은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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