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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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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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4)
2023.04.04.
“아가씨, 이제 일어나셨어요?”
내 방문 앞에 있던 주방장이 말했다. 비가 거세게 내렸던 밖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고개를 내리자 아까 쥔 롱소드가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꿈을 꾸는 순간에도 롱소드를 놓지 않았는지 손에 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전 이제 주방에 가볼게요.”
“아, 응. 고마워.”
주방장은 자리를 비켰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나는 꺼내두었던 무기들을 원위치로 돌려놨다.
복도에 나가자 저 멀리서 하녀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은 평소와 같이 고된 일을 불평했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목소리에 안심했다.
‘그 여인은 아예 갔겠지?’
다행히 저택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거 같았다. 문제는 새벽이나 내일 아침일 텐데…….
모두가 잠든 시간을 노려 저택에 또 찾아오지 않을까. 아무래도 롱소드는 계속 쥐고 있는 게 좋을 거 같다.
다시 롱소드를 가져가려고 할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우리 왔어, 리제!”
“리제! 자?”
현관에서부터 형제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일 점심이 되어서야 돌아올 줄 알았던 가족이 일찍 저택에 온 거였다.
“펠리시아!”
“뭐야, 안 자고 있잖아.”
펠리시아가 모자를 대충 벗어놓고선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쭉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늘어졌다. 정말로 마르센 형제들이었다.
쌍둥이 남매는 마차에서 잤는지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반면 펠리시아와 버나드는 멀쩡한 얼굴이었지만 몸은 지친 기색이다.
그 넷의 손에는 고급 포장지로 둘러싸인 상자와 큰 인형들이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손녀 손자들이 온다고 선물을 가득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니?”
형제들보다 늦게 현관에 들어온 이세벨이 날 발견하고 물었다. 시간을 보자 저녁 열 한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쌍둥이 남매들도 일찌감치 잠에 들 시간이다. 이제야 반가움보다 의아함이 더 앞섰다.
“……잠이 안 와서요. 근데 일찍 오셨네요?”
이 늦은 시간에 굳이 마차를 끌고 저택에 올 필요가 있었을까?
보통은 할아버지 저택에서 하룻밤 정도는 자고 왔다. 일 년에 손자 손녀들을 한 번 볼까 말까 한 할아버지도 이를 항상 바랐다.
“일이 생겨서 말이지. 허튼짓을 하고 있진 않았겠지, 리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버님께서 너한테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
이세벨은 뒤에 있는 시종을 시켜 나에게 선물을 건넸다. 다른 형제들 손에 쥐어진 것들이랑 똑같이 생긴 상자, 인형이었다.
애써 날 위해 내 선물까지 챙겨주신 할아버지다. 그 감사함에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기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웃어버렸다.
그러자 날 쳐다보는 이세벨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안한 나머지 미소를 감추려 할 때, 저택의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제기랄, 저녁이라 더럽게 추워! 왜 이 저녁에 저택에 돌아가자 고집을 부려선.”
밖에 있던 아버지마저도 저택에 들어왔다.
“아버지, 오셨…….”
“부인께서 나 대신 정리 좀 해주오. 난 취해서 이만 들어가 자야겠어.”
그는 나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장갑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비틀거린 꼴을 보아 술을 꽤 많이 마신 듯했다. 문이 쾅 닫히자마자 현관에는 짧은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고집을 부렸다고? 누가? 사실을 묻기 위해 이세벨에게 고개를 돌리는데, 하녀가 더 빨랐다.
“저기, 마님. 드릴 말씀이…….”
하녀는 아직 현관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흘끗 보다 조용히 이세벨에게 말을 건넸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들리지 않았지만, 하녀가 오늘 저택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세벨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접혔다.
“어떻게 할까요? 만약 위협하려고 온 거라면…….”
“됐다, 신경 쓰지 마. 딱히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간 것을 보아 그냥 우연히 온 거겠지. 나도 이제 그만 쉬어야겠으니 아이들 재우는 걸 부탁하마.”
“네, 마님.”
이세벨은 별 반응 하지 않고 남은 저택 상황을 정리했다. 형제들뿐만이 아니라 방금 막 침대에서 일어났던 나도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정신이 살아 있던 펠리시아와 버나드는 나에게 같이 상자를 열어보자고 말했다.
나도 여인에 대해 잊기로 했다. 형제들도 있고, 저택도 다시 따듯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아닌 아버지가 처리할 거다. 이제 이 저택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칼이 아닌 인형을 꽉 쥔 손을 보았다. 무서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
* * *
한참 동안 펠리시아 방에서 인형을 갖고 놀다 방으로 돌아갔다. 정각이 다 된 시간이었다.
‘응?’
복도를 걷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들여다보자 아까보다 더 비가 거세게 내리는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다 말았다 하네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주인님께서 비를 맞고 오실 뻔했어요.”
“비티, 아까 내가 잘 때 동안 무슨 일 없었지?”
“네. 복도를 다 둘러보았는데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어요. 아가씨 방 앞을 지켰던 주방장도 이상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고요.”
비티는 몇 번이나 날 안심시켜주곤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손에 의해 몸을 씻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새벽인데도 잠은 오지 않고 눈이 말똥말똥했다. 몇 분 동안 혼자 체스를 두다가 이것마저 손에 집히지 않아 거울 앞에 앉았다.
물에 젖은 빨간색 머리는 평상시보다 더 색이 진했다. 이 색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 보았더라…….
“비티. 빨간색 머리는 드문 편이지?”
“네? 음.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요즘은 종종 보이더라고요.”
“어디서? 장터에서 나와 같은 머리 색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봤다고 하면…….”
아까 그 여자의 머리도 붉었다. 비에 젖은 여자의 머리색은 거울 앞에 있는 내 머리 색과 똑같았다.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보지 못한 여자의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쳤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 시선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던 걸까?
나는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그리 경계하는 것일까?
“……아가씨?”
비티는 말을 잇지 않은 날 바라보았다. 내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자 비티는 나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
“이런, 몸이 차가워요! 아까 밖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봐요. 안 되겠어요. 제가 금방 따듯한 차랑 약을 가져올게요. 침대에 누워 계세요!”
내 몸을 살피던 비티가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진 비티로 인해 방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맴돌았다.
거울 앞에서 일어나 이불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천둥과 함께 번개가 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이 번뜩 환해지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촛불도 같이 꺼진 거였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에 바닥을 강타하는 거센 빗줄기의 소리가 잘 들렸다. 불을 켜야 했다. 초를 드는데 번개가 또 빛을 내보였다.
놀라 초를 떨어트렸다. 창가까진 구르는 초를 잡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마침내 초를 집고 허리를 일으키자 창밖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
여자였다. 그녀는 아까처럼 서 있지 않고 저택 쪽으로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빗물 사이에서 여자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와 똑같은 빨간색 머리에 황금빛이 물든 눈동자. 지저분하고 후줄근한 옷차림과 달리 빼어난 외모가 이질적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자는 마치 날 잘 알고 있다는 듯 살짝 웃었다. 여자의 몸이 저택의 정문을 넘어섰다.
여자의 시선이 떼어지자마자 바닥에 앉았다.
“들어오시면 안 돼요!”
“놔……! 놔……!”
“제발요! 제발 가세요!”
“백, 백작님께서 들, 들어가시는 걸 봤어! 안, 안에 백작님 계시잖아!”
하녀와 여자의 목소리가 창밖에서부터 들렸다. 하녀들은 여자의 출입을 말렸고, 여자는 기어코 들어가겠다며 떼를 썼다.
한동안 그 소음이 이어지자 어두웠던 복도의 불이 환해졌다. 하녀 한 명으로는 벅찬 건지 남은 하녀들도 여자를 말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곧 아래층에서 이세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여태 잠을 자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또렷했다.
“마님, 그 여자가 다시 왔나봐요.”
“뭐?”
“그게……들어오게 해달라고.”
“뭐라고 하던데? 왜 다시 찾아온 거지?”
“말을 못 하는 건 아닌데, 많이 더듬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어요. 또 계속 주인님을 만나야 한다는 소리밖에 안 해서…….”
하녀와 이세벨이 대화를 나눌 때 동안 내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제발, 이세벨이 그녀를 내쫓기를. 제발, 제발 내쫓아주세요!
제발요!
“이러다간 자는 아이들까지 깨고 말겠어. 내가 직접 나가볼게.”
“하지만 마님.”
“혹시 모르니 검을 챙겨. 허튼짓하면 그 팔을 잘라버리게.”
이세벨은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목소리가 단호했다. 검을 챙기자마자 현관 밖으로 나가는 이세벨의 소리가 들렸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저택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눈을 질근 감으면서도 다리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고개를 올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이세벨을 쳐다보았다.
여자와 이세벨이 마주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차분해진 여자의 목소리와 이세벨의 낮은 음성에 둘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래. 저 여자는 돈을 더 뜯어내려고 온 걸 거야. 이세벨은 그런 여자가 괘씸해서 돈을 주고 바로 꺼지라 하겠지.’
상황을 고려하면 문전박대를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마음을 다스리며 침대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세벨이 등을 돌렸다. 얘기가 잘 마친 걸까. 근데 이세벨 뒤에 있던 여자도 뒤따라 저택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두 눈을 의심했다.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했다.
저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복도로 뛰쳐나왔다. 계단 옆에 있는 벽 뒤로 숨어 고개를 내밀자, 비로 인해 젖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왜? 왜? 왜?
그때 따듯한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에 있었던 비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벨은 비티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비티. 이리 좀 오렴.”
“마님?”
“이 여인을 손님방으로 안내한 뒤 깨끗이 씻겨주렴. 새 옷도 입히고.”
“네? 하지만…….”
비티가 곤란해하며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비티와 나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기겁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인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래도 불안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세게 조여 온몸이 당겼다.
시간이 좀 지나가 약을 가져왔다는 비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척을 했다. 잠근 문을 열어주지 않자 비티도 물러갔다.
“……왜.”
지금 당장 이세벨의 팔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왜 그녀에게 따뜻한 침대까지 내어주는 거냐고.
혹시 그녀가 나의 친엄마인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