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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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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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5장. 마르센 가의 사생아 (5)
2023.04.07.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이 지났어요.”
비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불 속에 있는 나의 몸을 계속 흔들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어.”
“안 돼요. 아침 드셔야 하잖아요.”
“안 먹을래.”
“아이참. 다들 기다리고 계셔요. 마님께서 빨리 나오라고 하셔요.”
이세벨이라는 말에 눈이 번뜩 뜨였다. 그 틈을 타 비티는 내가 꽉 쥐고 있던 이불을 들쳐 구석에 던져버렸다.
잠옷 바람과 함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뒤늦게 얼굴을 베개에 숨겨보았지만 비티에게 들켰다.
“……안 주무셨어요?”
“곧 나갈게. 그러니까 잠시 나가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비티는 더 깨우지 않고 구석에 두었던 이불을 주워 올렸다.
비티의 말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어 입술이 다 찢어졌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세벨에게 묻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여인과 마주치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발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거울을 보았다.
‘염색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염색은 불가하니, 가발이라도 쓰고 다닐까.
유릭과 유네 같은 은발도 괜찮고, 로저 같은 검은색 머리도 좋았다. 아님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금발은 어떨까? 무엇이 되었든 빨간색만 아니면 된다.
뭉그적거리며 계단을 내려온 나는 바로 식당으로 가지 않고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다행히 여인은 없었고, 평소대로 쌍둥이와 펠리시아와 버나드가 앉아 있었다. 가운데 자리는 휴일로 인해 출근하지 않은 아버지가 신문 기사를 살폈다.
“여기서 뭐 해? 리제?”
“혼자 숨바꼭질해?”
늦잠을 잔 건지 스웰과 실케도 이제야 계단 밑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현관에서 머뭇거리는 날 수상하게 쳐다보며 그대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쌍둥이에게 들킨 마당에 현관에서 발만 동동거리는 건 헛짓거리였다.
식당에 들어가자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지 않았다. 이세벨도 나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물을 들이켰다. 이상할 거 없는 아침식사였다. 요리가 나오고 모두 말없이 포크를 들었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고 다들 조용히 접시를 비워갔다.
다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으로 넘어가는 건지 목으로 넘어가는 건지 음식의 향이 전혀 없었다. 나와 달리 형제들은 오늘 구운 빵이 맛있는지 잼을 듬뿍 발라가며 입에 넣었다.
‘그 여자는 어디 갔지?’
이세벨이 아침 새벽 그녀를 돌려보낸 걸까?
한밤중 여자가 나의 방으로 찾아올까 무서워 한껏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밤새 여자의 발소리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젯밤에 좀 소란스럽던데.”
아버지가 입을 열자마자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네, 백작님을 뵙고 싶어 하셔서요.”
이세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를? 누구길래 새벽에 날 찾아온 거지?”
“백작님도 얼굴을 보면 아실 거예요. 중요한 손님이니까요. 새벽 중에 찾아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기도 이상해서 손님방에 재웠어요.”
역시! 손에 쥔 포크가 멈췄다. 음식을 꽂지 못한 채 포크의 끝이 떨렸다.
손님이 저택에 있다는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누군가 계단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낯선 발소리에 식탁에 있는 가족들 모두 식당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숨이 턱 막혔다. 여인이 나타났다.
어제 더러웠던 차림새와 달리 깨끗한 핑크색 드레스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엉망진창이었던 얼굴과 머리는 정돈이 되어 미모를 더 돋보이게 했다. 한눈에 봐도 이세벨을 뛰어넘는 미인이었지만, 반갑지가 않다.
미인은 둘째치고, 나와 닮았다. 머리색도……. 심지어 생김새도.
“……넌.”
아버지는 여인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룻밤 가지고 논 유흥가 여인일지라도 저 빼어난 미모는 잊지 못한 모양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는지 창백하다 못해 사색이 되어 있다.
고개를 돌려 이번엔 여인을 봤다. 당연히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을 줄 알았던 여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아버지가 여인을 보며 언성을 높이자 형제들 모두 포크 질을 멈추었다. 한순간에 사나워진 분위기에 겁 많은 버나드의 몸이 덜덜 떨리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오로지 이세벨만이 편안한 표정으로 고기를 썰고 있다
“당신, 당신이 저 여인을 데려온 거요?”
“설마요. 방금 말했듯이 저 여인이 직접 저택에 찾아왔어요.”
“그래서 그냥 들여 보내주었다? 옷과 신발까지 내주며?”
“돌려보낼 순 없잖아요? 사정이 꽤 딱했어요.”
이세벨과 아버지의 말이 오고 가는 중에도 여인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개가 굳어 시선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끔찍하게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인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나의 손을 잡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싫어. 싫다고.’
꽉 쥐고 있던 포크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포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몸에 힘이 풀렸다. 바로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그 사이 하녀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형제들을 끌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비티 또한 내 손을 잡았지만 몸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왜! 왜 그랬소? 저 여인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알면서!”
“저 여자가 낳은 백작님의 아이가 이 저택에 머물고 있지요.”
어깨가 떨렸다.
“이세벨……! 다 해결된 일이잖소? 풀린 거 아니었소?”
“고작 십 년 전 일이에요. 앙금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저 여인의 사정이 딱했어요.”
“딱하긴! 저 여인은 우리 마르센 가를 짓누르기 위해 수작을 부렸던 여인이야!”
“……마녀사냥을 당한 모양이에요.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그 탓에 사람들이 저 여자의 집에 불을 질렀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자는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고 말더듬이가 됐대요.”
이세벨은 잘못 알고 있었다.
저 여인은 안 비참했다. 사정이 딱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불쌍한 인생을 살았다 하여도 날 마르센 저택에 버리고 간 거, 하나는 변함이 없다. 불행한 삶에 위안을 받아야 사람은 저 여인이 아니라 나였다.
근데 이세벨은 지금 나를 아니꼬워해 저 여인에게 넘겨버리려고 한다. 불행한 인생에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고 더 큰 불행 속으로 떠밀어버린다.
못된 사람. 못된 사람!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요?”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아직 기억을 찾지 못했는데 우연히 지인을 만나 백작님에 대해 들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기억을 찾기 위해 왔다네요.”
“……뭐?”
“어때요? 이참에 십 년 전처럼 그녀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건.”
“이세벨!”
얼굴이 붉어진 아버지는 씩씩거리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세벨은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제.”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는 날 불렀다.
“…….”
“너도 인사를 하지 그러니? 모처럼 친엄마를 만났는데.”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걸까?
“……제가 왜요?”
다 뜯긴 입술을 또 깨물었다. 비릿한 향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울분이 차올랐다. 아무리 이세벨이 내 친엄마가 아닐지라도 그녀와 내 사이에 어떤 감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애증. 그것이 아니라면 동정심.
이세벨은 냉정한 여자였다. 형제들에게 주었던 애정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매번 감시했다. 즉, 그녀가 나에게 엄마 노릇을 해주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날 가족으로 대해준 사람이었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서도 내가 느끼는 기분은 무서울 만큼 빠르게 알아챈다.
그래서 언제는 못돼먹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또 언제는 그래도 친절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내 주제에 그녀를 동정한 적도 있었다.
그녀만이 날 이해해주고 있지 않을까, 바랐다.
“……싫어요. 싫어요.”
말을 길게 하고 싶어도 목구멍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움직이는 다리로 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의자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여인이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라 뿌리치기도 전에 여인이 나를 제 품 안에 넣어 꽉 안았다.
“……놔, 놔주세요!”
다급하게 말했다. 숨이 막히고 괴로웠다. 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나와 같자 정신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여인에게 벗어나기 위해 가슴을 힘껏 밀었지만 그녀의 힘이 훨씬 강했다.
“뭐 하는 짓이야? 어서 아이를 놔줘!”
내가 울며 괴로워하자 보다 못한 이세벨이 말렸다. 여인은 한참을 끅끅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이, 이 아이…….”
“…….”
“내, 내, 아이…….”
기억을 잃었다면서 내가 자신의 아이임을 잘 알았다.
“놔주세요! 놓으라고! 놔!”
그녀의 품에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마, 마음이 바, 바뀌…….”
“뭐?”
“아, 아이. 이 아이, 돌, 돌려.”
지금 이 여인이 무슨 말 하는 거지? 정적이 휩싸였다.
“돌, 돌려주세요.”
여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말했다.
저게 무슨 말인가? 날 짐짝처럼 이 마르센 저택에 버릴 땐 언제고 갑자기 날 돌려 달라니? 있는 힘껏 그녀의 가슴팍을 확 밀었다.
“싫어요! 난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나에게 손을 내미는 여자의 팔을 내쳤다.
“기억을 잃었다면서요! 나는 당신의 딸이 아니에요!”
“…….”
“제발……가요, 가버려요!”
여자가 날 붙잡기 전에 식당 밖으로 빠져나가자 현관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형제들과 눈이 마주쳤다. 방으로 간 줄 알았는데.
“……리, 리제.”
그들은 식당 쪽 상황이 궁금했는지 앞을 기웃거리다가 내 등장에 화들짝 놀란듯 싶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모욕적이고 창피한 순간은 없었다. 내가 사생아임을 알고 있는 형제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리 대놓고 눈도장을 찍은 건 처음이다.
“리제!”
형제들의 부름에도 뜨거워진 얼굴을 숨기고 계단으로 뛰어갔다. 내가 도망칠 곳은 2층 끝에 있는 나의 방뿐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프다. 아프다.
저 여인이 직접 날 데려간다고 했으니 그 이후 내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이제부터 나는 마르센 가의 막내딸이 아니다.
“제기랄! 제기랄!”
이 순간에도 이세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믿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