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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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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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1)
2023.04.11.
한참을 울었다. 메마른 목은 텁텁했고, 눈은 충혈됐는지 감을 때마다 따가웠다. 어제 늦저녁부터 마음 앓이를 해서인지 조금 감정을 풀자마자 머리가 알알하게 아팠다.
마음이 아파 울었는데, 몸까지 아파 버리니 더 서러웠다.
그 와중에 복도는 조용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식사도 끝났을 거다. 불같이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그 여인을 저택 밖으로 내쳤을까. 내쳤으면 했다.
그럼 아버지에게 앙금이 남아 있던 이세벨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 후련할까? 후련하겠지…….
궁금해 귀를 기울이면서도 밖으로 나가면 여인이 내 손목을 잡고 달아날까 두려웠다.
이성과 본능이 갈등하고 있을 때 누군가 계단 위로 올라왔다. 발소리가 내 방으로 다가왔다. 본능은 어디 가고 다시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이불자락을 꽉 잡았다.
“나다, 리제.”
여인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이세벨이다. 여인보다야 나았지만 이세벨은 날 여인의 품에 보내려고 꾀를 썼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미웠고, 미워서 꼴 보기도 싫었다.
“……들어오지 마세요.”
“그래놓고 문은 안 잠갔구나.”
이세벨은 기어코 문을 열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원망스러워 불평해도 이세벨은 이미 방 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얘기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얼마 못 가고 내 고개가 자연스레 이세벨의 얼굴로 향했다. 이세벨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도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저 얼굴이 싫었다. 너무 싫어서 아픔에 익숙해진 눈이 다시 따가워졌나.
방문을 닫고 뒤늦게 내 얼굴을 보는 이세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세벨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거울을 보지 못했으나, 상태가 말이 아닐 거다. 부은 얼굴엔 온전한 곳 하나 없을 테고, 입술은 다 뜯겨 딱지가 붙어 있겠지.
근데 그런 이유로 이세벨이 이리 놀라는 사람이었나. 슬며시 얼굴을 만져보니 흐르고 있던 눈물이 손가락에 묻었다.
“아.”
그친 지 얼마 안 되어 또 질질 짜고 있는 거였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그것도 이세벨 앞에서.
눈물을 닦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흘러나왔다.
“……왜 우는 거니?”
저걸 질문이라고 던진다. 설마 기쁘고 행복해서 울까요? 비참하고 서러워서 우는 거지. 그렇게 비꼬아서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이 나왔으나 내가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까는 입술을 꽉 깨물며 조용히 끅끅 울었는데, 지금은 목 놓았다.
이런 적이 없었다. 울면서도 당황했다. 발가벗은 기분에 창피하면서도 이세벨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아려왔다. 왜 이럴까, 울면서도 스스로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다.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울었다.
“왜 우는 거야?”
이세벨이 한 번 더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자 억울해 더 생각이 번잡해졌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고 울기만 하자 참지 못한 이세벨이 등을 돌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돌리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 가지 마세요……!”
“…….”
이세벨의 행동이 그대로 멈췄다. 꼴도 보기 싫은 얼굴, 알아서 비켜준다는데 왜 나는 그 행동을 저지했을까,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날……날 버리지 마세요. 가고 싶지 않아요…….”
“…….”
“계속 여기 있고 싶어요……! 어머니 옆에요. 누군지 모를 저 여인이 아니라 어머니 옆에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그토록 꺼내기 힘들었던 문장이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술술 입 밖으로 빠졌다.
말은 똑바로 하면서 시선은 차마 이세벨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수그렸다. 밑으로 떨어진 눈물이 손등을 적셨다.
“제발요, 제발요……. 뭐든 다 할게요. 어머니 말대로 이제는 책도 안 읽고, 말썽도 부리지 않을게요!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가지 않겠어요! 그러니 제발요…….”
애원하고 애원했다. 얼마나 애타게 말했는지 목소리가 힘을 잃었다.
“전…….”
“…….”
“계속 리제 마르센으로 살고 싶어요.”
마지막 말은 또렷하게 나왔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였다. 더 하고 싶어도 긴장이 풀린 탓에 몸에 힘이 남아돌지 않았다.
그러자 미동조차 없었던 이세벨의 몸이 움직였다.
문고리를 마저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퍼뜩 들었지만 이미 등 돌린 이세벨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녀는 매정하게도 내 시선을 눈치채면서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
“……좀 풀리면 다시 얘기 하자꾸나.”
그 말이 끝이었다. 이세벨이 나간 자리엔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았다.
끝까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 * *
시간이 지나고 다시 방문이 열렸다.
“리제…….”
이세벨인 줄 알고 놀라 쳐다봤지만 방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쌍둥이 남매 중 스웰이었다. 하지만 방문 앞에 있는 건 스웰 만이 아닌지 문틈 사이로 머리가 몇 개 더 보였다.
형제들은 문틈을 사이로 두고 머뭇거렸다. 그 꼴을 보아하니 날 놀리려고 찾아온 거 같지는 않고 동정이나 하러 왔겠지 싶었다.
내가 말이 없자 스웰 뒤에 있던 머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야, 뭐 하는 거야? 어서 들어가지 않고.”
“……재촉하지 마, 실케. 리제 눈이 빨간데 어떻게 들어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넌 적안을 가진 사람에게는 늘 이리 소심하게 굴 거니?”
“아, 그럼 누나나 형이 먼저 들어가! 형이 바로 내 뒤에 있으니까 형이 먼저 들어가면 되겠네.”
“뭐? 난 아무 소리도……!”
스웰은 정작 조용히 있었던 버나드를 앞에 내세웠다. 내 앞에 우뚝 서게 된 버나드는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저, 저 그게…….”
저 소심한 성격 어디 갈까. 어느새 인내심이 도달한 나는 그가 언제 이 문턱을 넘을까 기다렸다.
“아오, 답답해!”
“잠, 잠시만!”
답답한 나머지 참지 못한 펠리시아가 그의 등을 확 밀었다. 버나드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살짝 벌어져 있었던 문이 활짝 열리면서 버나드의 몸뚱어리가 방 앞에 넘어졌다.
“어머, 미안해.”
펠리시아는 앞으로 넘어진 버나드를 보며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말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촌극이라도 찍는 건가. 내가 쏘아보며 묻자 서로 눈치를 살피던 형제 중 펠리시아가 내가 있는 침대에 올라탔다. 그녀는 내 품 안에 있는 베개를 확 가로채 바닥에 던지고 물컵 하나를 줬다.
“뭐 하는 짓이야?”
“엉덩이가 침대에 붙은 거야? 이렇게 귀신처럼 웅크려 있으면 뭐가 해결되기라도 해? 우선 물이라도 마셔. 내 방 앞에 있더라.”
“뭐라고?”
“쌍둥이, 너희들은 방문 앞을 지켜. 그 이상한 여자가 갑자기 찾아와 리제를 데려갈 수 있으니까.”
펠리시아의 말에 매번 말썽을 피우던 쌍둥이들은 기사처럼 내 방문 앞에 섰다. 버나드는 넘어지면서 코를 부딪쳤는지 콧등을 만지작거리며 침대에 기어 올라왔다.
“우린 대책을 짜러 왔어, 리제.”
“대책이라니.”
“너 저 여자에게 가고 싶은 거야?”
펠리시아가 대뜸 나에게 물었다. 눈살을 찌푸린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아니.”
“그럴 줄 알았어. 저 여자가 온 뒤로부터 집안이 난리도 아니야. 아버지는 술만 마시고, 가끔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화풀이해. 어머니 얼굴도 어둡고. 두 분이 전혀 대화하려고 하지 않아.”
“…….”
“눈치껏 빠져 있던 우리도 상황이 안 좋으니까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 그래도 다 소용이 없었어.”
방에서 두 귀를 막는 사이 집안이 사나웠던 모양이다. 형제들의 낯빛이 다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까 봐 불안해하며 마음을 졸였다.
근데 왜 이 걱정을 이 일의 모든 원흉인 나에게 와 하소연하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했지. 바로 저 이상한 여자를 내쫓는 거야.”
“……여자만?”
“응? 또 누굴 더 내쫓아야 해? 누구?”
펠리시아와 버나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거짓 없는 순수한 눈빛에 괜히 허탈해졌다.
“됐어. 그리고 여자는 알아서 나가겠지.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면 말이야.”
“그 목적이 뭔데?”
“날 데려가는 거. 아무래도 난 저 여인의 친딸 같으니까.”
“안 돼, 리제.”
내가 자조하듯 말하자 펠리시아가 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가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어깨를 꽉 쥐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우리 중 가장 똑똑하면서도 이럴 땐 머리를 쓰지 못하는구나. 넌 저 여자가 의심되지도 않아?”
“내 친엄마라는 걸?”
“그것도 있고! 그리고 생각해봐.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니 말이 돼? 난 살면서 기억 잃은 사람을 희극에서나 밖에 못 봤어. 그리고 마녀사냥이라니……. 요즘 누가 그런 걸 믿어? 물론 고대에는 마녀나 드래곤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 멸종되었잖아.”
“…….”
“기억을 찾는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보러 왔다는 건 이상해. 아버지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저 여자와 아버지의 인연은 고작 하룻밤이었어. 어떤 애틋한 사이도 없었고, 추억도 없었지.”
펠리시아가 오목조목 말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저 여자의 등장에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상한 점이 많았다. 아무리 기억이 없어진다 한들, 날 버렸던 그녀가 갑자기 날 원한다는 것이 수상했다.
“펠리시아, 너 똑똑하다! 그럼 당장 이 얘기를 아버지께 말해보자.”
곁에 있던 버나드가 감탄하며 말하자 펠리시아가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눈치가 없기는.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모르시겠어? 아니까 저리 화를 내시는 거지. 이상한 건 어머니야. 어머니도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 계시잖아.”
여자가 날 노리는 이유는 금전적인 문제 때문일까.
이미 나를 통해 많은 돈을 얻어갔던 사람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으니, 돈이 떨어질 때도 됐다.
한 번 돈맛에 길들인 사람의 욕심은 전보다 더 커지는 법이다. 십 년 전 그 금액에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 이번에 나를 방패로 두고 돈이 아닌 마르센 가를 통째로 이용할 수도 있다.
즉, 내가 여인의 손에 넘어가면 위험했다. 근데도, 근데도 이세벨은 왜…….
“리제, 이제 정신 차렸지? 네가 똑똑하니까 뭔 대책이라도 생각해 봐.”
펠리시아의 말에 현재 상황을 곰곰이 생각했다.
“펠리시아, 리제도 많이 힘들 텐데 너무 재촉하지 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상황이 이렇잖아!”
버나드와 펠리시아가 투덕거렸다. 그사이 내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를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야. 하지만 어머니께선 모든 사실을 알고도 저 여자를 내쫓지 않지.”
“음. 혹시 아버지 때문일까?”
펠리시아가 대답했다.
“맞아.”
이세벨은 마르센 가와 자신의 핏줄을 사랑했지만, 반대로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녀는 여태 들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죄를 저 여인을 이용해서 받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그러지 못하시는 분이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버나드가 울먹이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마시지 않은 물컵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우선 상황을 지켜보자.”
“무슨 소리야?”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 지켜보자는 얘기야.”
내 말에 버나드와 펠리시아는 괜찮겠냐고 연신 물었다. 대답 대신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다시 한번 이세벨을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