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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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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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3)
2023.04.18.
소리를 내려 했지만 여자가 틈을 주지 않았다. 여자는 내 입을 막고 문으로 향했다.
‘무슨 힘이……!’
마른 몸처럼 연약할 줄 알았던 여자는 힘이 세고 행동이 거칠었다. 내가 발길질하면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이용해 내 등이나 허벅지를 강하게 가격했다.
입까지 오른 비명이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입술 앞에서 흩어졌다.
그사이 여자의 등이 저택 밖으로 나가는 문에 닿았다. 저택 밖에는 여자와 일을 꾸민 배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위험했다.
남은 힘으로 옷 주머니에 있는 물건 하나를 꺼냈다. 급한 대로 물건 안에 있는 것들을 여자 얼굴 쪽으로 확 던졌다.
“뭐, 뭐야!”
“……콜록!”
혹시 몰라 항상 품에 지녔던 모래주머니였다. 여자 품에서 벗어난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래를 한 번 더 뿌렸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
이상함을 눈치챈 이세벨이 방 밖으로 나왔다.
그 곁으로 뛰어간 나는 눈을 비비고 있는 여자를 경계했다. 이세벨도 대충 상황을 알아챘는지 더 묻지 않고 날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하녀들은?”
“모, 모르겠어요. 여자에게 당한 건지 보이지 않아요.”
“일 층에는 없는 거 같으니 올라 가보렴.”
이세벨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욕망에 눈이 멀어 나를 해하려 했으니 지금 저 여인이 무엇을 두려워할까.
여자가 덤벼든다면 이세벨은 힘 한 번 못 쓰고 넘어질 거다.
“도대체 무슨 일……. 이세벨?”
“리제, 백작님도 이곳에 계시잖니.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올라가, 어서!”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낸 동시에 이세벨은 내 등을 떠밀었다. 망설이던 나는 내 유일한 공격 수단인 모래주머니를 이세벨의 손에 얹어줬다.
“이, 이걸 쓰세요.”
황급히 계단 위로 올라가자 정신을 차린 여자의 고함이 들렸다. 흥분한 여자의 말이 뭉쳐서 들렸지만 내게 중요한 건 저 목소리가 아니었다. 듣지 않아도 된다.
전시된 갑옷이 쥔 롱소드를 뺀 후 쌍둥이 방에 도착한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안에서 잠근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스웰! 실케! 안에 있어? 대답 좀 해 봐! 실케, 스웰!”
“…….”
아무리 늦잠을 자더라도 보통 이 시간이 되면 쌍둥이들은 일어났다. 쌍둥이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설마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니겠지? 어디 심하게 다쳤거나.’
잠긴 문을 열려면 어머니 방에 있는 열쇠가 필요했지만, 상황이 급박한 그곳까지 갈 시간이 없다. 심지어 이세벨 방은 일 층에 있지 않나. 다시 주머니를 뒤진 나는 바늘이 들어 있는 케이스를 꺼냈다.
모래주머니와 마찬가지로 여자가 나에게 올 것을 대비해 항상 챙겨두었던 호신용 물건이다.
여러 개 바늘 중 가장 두껍고 긴 바늘을 이용해 열쇠 구멍을 뚫었다.
“실케, 스웰!”
“……읍!”
방문을 열자 쌍둥이들을 비롯해 보이지 않았던 하녀들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천으로 입이 묶인 것도 모자라 발과 팔도 꽁꽁 포박되어 있었다.
여자 혼자 했다고는 믿기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간 나는 입을 막고 있던 천을 치운 뒤, 손과 발을 포박한 끈을 잘랐다.
“리제!”
“리제……!”
실케와 스웰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겁에 질린 것을 제외하고는 몸에 이상이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나는 달래는 대신 방안에 묶여있는 다섯 명이 하녀들을 마저 풀어주었다.
“그, 그 여자의 짓이에요! 도련님과 아가씨를 위협해서 저희를 묶었어요!”
“알고 있어.”
입이 자유로워진 비티가 내 팔을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주, 주인님과 마님께선 괜찮으세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자와 같이 현관에 있어. 그러니까 두 명은 뒷문을 통해 몰래 저택 밖으로 나가서 경비병에게 이 사실을 알려. 또 펠리시아와 버나드가 학교에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고.”
하녀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알, 알겠어요.”
“조심해야 해. 외부에도 여자와 손을 잡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차분히 말하자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역할을 정했다. 방금까지 묶여있었음에도 저택을 지키기 위해 허리를 일으키는 하녀들이 든든했다.
“비티, 넌 언니와 오빠를 지켜줘.”
칼을 내밀자 비티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가씨께선 어디 가시려고요.”
“나와 나머지는 어머니한테 갈 거야. 그러니까 문은 꼭 잠그고 있어. 누가 노크를 해줘도 절대 열어주지 마. 알겠지?”
“아, 아가씨께선 왜 이렇게 차분하세요?”
비티는 덜덜 떠는 손으로 칼을 꽉 쥐며 물었다. 나무라거나 비꼬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음성에 나는 정말로 내가 차분한가 싶었다.
무서웠다. 무서웠는데, 그래도 예전보다 덜 무서웠다. 그때는 혼자였고, 지금은 내 편이 있었다.
이제 일어나려 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쌍둥이들이 나의 옷자락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빨리 올게.”
“하, 하지만 넌 우리보다 나이도 어리고…….”
“그건 걱정 마. 따지고 보면 내가 스무 살은 더 많을 테니까.”
실케와 스웰의 손등에 손을 올려놓고 작게 웃었다. 시간이 없었다. 쌍둥이들이 더 붙잡기 전에 역할을 맡은 하녀들과 방 밖을 나섰다.
“다, 다가오지 마!”
밑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가자 아직 여자와 대치하고 있는 이세벨과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어디서 주워 온 건지 모를 지팡이가 여자 손에 있는 걸 제외하면 아까와 별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이, 아이를 내놔!”
여자의 시선이 계단 밑으로 내려온 나에게 향했다. 나를 발견한 이세벨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도대체 왜 내려온 거니?”
“하녀들은 무사해요. 쌍둥이들도요.”
“그러면 너도 어서 올라가!”
계단 두 칸 정도를 오르긴 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제는 날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무섭지 않다.
“아이는 못 줘.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갑자기 맡겨놓은 물건처럼 달라고 그러지? 리제는 이미 마르센 가의 아이야. 리제를 보고 싶었다면 그녀의 머리털이 나기 전에 왔어야지.”
“내가 낳았어……! 나랑 백작이……!”
여자와 이세벨의 신경전이 오고 갔다. 이러다 끝도 없을 거다.
한숨을 작게 내쉰 이세벨이 앞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한껏 예민해진 여자가 지팡이를 허공에 흔들며 위협했다.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여자의 말에도 이세벨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
때를 노린 이세벨이 여자에게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내가 준 모래주머니를 여자의 얼굴을 향해 정확히 뿌렸다. 한 번 더 같은 수법에 당한 여자가 눈을 질근 감으며 지팡이를 무아지경으로 흔들었다.
이세벨은 여자의 손목을 내쳐 지팡이를 떨구었다. 그 후 가슴을 밀어 넘어트린 뒤 여자의 몸뚱어리 위에 자신의 무게를 실었다.
“뭐해요! 백작님, 어서 돕지 않고!”
“……아, 알겠어!”
이세벨의 말에 아버지를 비롯한 하녀들도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여자의 발을 붙잡았고, 하녀들은 배후가 들어올 수 있기에 현관문을 꽉 잠갔다.
여자가 완전히 제압되었다. 그것도 이세벨의 손에.
몸을 날린 이세벨은 처음 보았다. 흥분하더라도 목소리 높이는 게 고작이었던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달려든 거였다. 이세벨은 여자 주변에 있는 위협적인 물건을 모조리 발로 차버리며 끝까지 경계를 놓치지 않았다.
“놔! 놔달라고! 아이를, 아이를 내놔!”
여자는 목청이 터질 정도로 계속 소리쳤다. 나중에는 힘 잃은 목소리가 갈라지기까지 했다. 한참을 반항하다 지친 여자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고개를 바닥에 묻고선 울었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주먹으로 땅바닥을 툭툭 치며 오열했다.
“안 되겠다! 너무 시끄러우니 천을 가져오렴.”
“네, 마님!”
이세벨의 명령에 하녀가 바로 움직였다.
“당신은, 당신은! 저 아이가 밉지 않아? 네 핏줄도 아니잖아! 네 자식도 아니잖아! 너와 같은 머리 색도 아니고, 눈동자 색도 달라!”
“…….”
“분명 저 아이를 못살게 굴겠지! 다른 형제들과 차별 할 테고. 저 아이는 너로 인해 평생 불행하게 살 거야! 너 같은 마녀는 피도 눈물도 없으니까!”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 마녀! 마녀 같은 여자!”
“…….”
“악마! 악마 같은 년!”
여자는 이세벨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럼에도 이세벨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자 여자는 공격할 상대를 바꾸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 번 더 나에게 고정됐다. 눈은 불그스름했고, 마른 눈물과 함께 머리카락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여자의 얼굴이 추해서 그런가 정말로 마녀 같았다.
“아, 아가야…….”
여자가 날 부른다.
“아가야……. 내가 엄마야. 널 낳았단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응?”
“…….”
그 목소리가 아주 처절했다.
“……전 아가가 아니에요.”
“뭐?”
건조한 음성이 내 입을 통해 나왔다.
“저 열 살이에요. 글도 쓸 줄 알고 체스도 둘 줄 알아요. 아가 아니에요.”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네가 아가로…….”
“당, 당신은 제 이름이 뭔 줄 아시나요?”
당황한 여자의 말을 잘라먹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시선을 꽉 붙잡으며 끈질기게 그 답을 요구했다.
여자가 내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거쯤이야 잘 알았다. 여자는 내 이름을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자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건 정상이었다.
“성도 모르시는 거예요?”
“……알아, 알아! 마르센, 마르센이잖니.”
여자는 자신이 대답해놓고 움찔했다.
“맞아요, 전 마르센이에요. 마르센 가의 딸.”
“아가! 이름은 중요하지 않단다. 앞으로 내가 더 예쁜 이름을 지어주면 되잖니? 응?”
“무엇으로요?”
“……그건 차차 생각해서.”
여자가 말을 머뭇거렸다.
“이름은 내 정체성과 존재를 증명해주는 거래요. ……하지만 나도 당신도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데 어떻게 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이 되겠어요.”
“무, 무슨 말이니?”
“……당신을 따라가는 일은 없을 거란 얘기예요.”
“…….”
“절대로.”
주먹을 쥐던 여자의 손이 점차 펴졌다. 여자는 악을 쓰는 대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 잠깐의 망설임으로 인해 여자는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천을 가져온 하녀가 그녀의 입을 꽉 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는구나.”
이세벨이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문 너머에서 다급하게 오는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비병을 데리고 오기로 한 하녀가 때마침 온 거다.
그건 며칠 내내 저택을 뒤덮였던 소동이 일단락될 거라는 신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