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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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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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6장.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것 (4)
2023.04.21.
여자와 일을 꾸민 배후는 놀랍게도 젊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남자도 여자와 비슷한 일을 하는지 풍모가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가벼웠다.
여자와 남자는 같이 살고 있었고 했다. 그들은 뒷골목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마음껏 쓰다가 빈털터리가 되자 일을 꾸몄다고 털어놨다.
“마녀사냥도 기억상실증도 다 거짓말이랍니다. 사기죄도 적용되겠네요.”
경비병이 말했다.
여자와 남자는 제국에서 이름을 알린 마르센 백작 가를 건드렸다. 감옥행은 피할 수 없을 거다. 이를 안 여자가 아버지에게 옛정을 들먹이며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아버지는 오물을 본 듯한 불쾌한 표정을 짓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달리 이세벨은 끝까지 자리에 남았다.
여자를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사기죄를 포함해 남은 죄들도 무겁게 여겨 벌을 내려주세요. 후에 이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말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부인.”
“가세요. 이제 저 여자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네요.”
경비병은 기다렸다는 듯 여자와 남자를 끌고 정문 밖으로 나섰다.
정문 밖에는 죄수를 가두기 위한 나무 철장이 있었다. 겁을 먹은 여자가 어머니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 입술이 경비병으로 인해 막혔다.
“조용히 해!”
경비병은 죄수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끔찍해 나는 커튼을 치고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들은?”
이세벨은 자신의 곁에 있던 하녀에게 물었다.
“스웰 도련님과 실케 아가씨는 긴장이 풀렸는지 한참을 울다 잠들었어요. 펠리시아 아가씨와 버나드 도련님은 아직 학교에 계시고요. 혹시 몰라 다른 아이가 학교에 가 살폈는데 다행히 별일 없었던 거 같아요.”
“……둘에겐 이 일을 비밀로 하자구나. 알려보았자 좋을 거 없으니 말이다.”
“네.”
“그래. 애들이 일어나면 배가 많이 고플 테니 어서 식사를 준비하렴.”
이세벨은 평소처럼 저택을 관리했다. 하녀들에게 할 일을 다 배분하고 나서야 이세벨을 나에게 관심을 주었다.
“뭘 보니?”
“……할 말이 있어서요.”
머뭇거리다 말했다. 할 말이 있다는 내 말에 이세벨은 잠자코 기다렸다. 나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멈췄다.
할 말이 있어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것이 맞았다. 날 지켜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세벨에게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어제 울면서 그녀를 붙잡긴 하였으나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지 않았나.
“할 말이 없으면 이제 방에 들어가렴. 하녀들이 현관을 청소해야 하니까.”
“다 들었어요.”
“……뭘 말이니?”
이세벨이 행동을 멈췄다.
“아까 아버지와 한 대화요. 아버지한테 앙갚음했다고 하셨잖아요.”
“남의 얘기를 몰래 듣다니. 악취미가 하나 더 생겼구나.”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에요. 그것보다……저에게도 앙갚음했다고 하셨죠?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묻자 이세벨은 대답을 잠깐 망설였다. 역시 나와 이세벨 사이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던 거다. 나의 어떤 행동과 말이 이세벨의 원망을 샀을까.
“그간 네가 내 말을 잘 듣지 않았잖니.”
이세벨이 대충 말했다.
“어머니께선 고작 그 이유로 앙갚음하실 사람이 아니에요.”
“어떻게 장담하니?”
“전 장담해요. 끌려간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확신에 찬 내 말투에 이세벨은 골치 아프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이세벨에게는 지나간 일일지 몰라도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그 행동을 또 바보같이 반복하지 않을 거 아닌가.
내가 끈질기게 바라보자 이세벨은 찡그린 인상을 도로 폈다.
“……우주를 좋아하더구나.”
“네?”
갑자기 웬 우주?
이세벨은 되묻는 날 뒤로하고 방 안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을 닫기 전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어, 어머니?”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더 자세히 묻고 싶어도 이세벨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우주라니? 무슨 우주?
‘……수수께끼는 아니겠지?’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 * *
이세벨의 한마디가 날 괴롭게 만들었다.
‘우주, 우주. 망할 우주!’
복잡한 생각을 비우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주변을 살피며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마르센 가와 펜턴 가 중간에 있는 꽃밭이다. 당연히 이세벨과 하녀들 몰래 나온 거였다. 혹시 몰라 비티 방에 쪽지를 남겼으니 내가 누군가에게 잡혀갔다는 생각은 안 할 거다.
“……리제?”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휴가가 끝나는 월요일, 유릭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은 했지만 시간을 정해놓지 않아 그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살짝 기대했다.
근데 꽃밭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에 앉아 있던 유릭이 날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유릭…….”
그의 손에는 평소 보였던 동화책도 없었다. 나처럼 방금 저택 밖에서 나왔나 생각했는데 손등부터 시작해 그의 콧등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나? 그에게 달려가 손을 낚아챘다. 예상대로 손이 매우 차가웠다.
“유릭, 미쳤어?”
“나 멀쩡한데.”
“이러다 동상에 걸리겠어! 도대체 왜 저택에 안 들어가고 멍청하게 이곳에 가만히 있는 거야?”
속상한 나머지 화가 났다. 내가 장갑을 벗어주자 유릭은 화들짝 놀라 내 행동을 말렸다.
“괜찮으니까 벗지 않아도 돼! 리제.”
“안 괜찮아. 너 손 얼었어.”
“이러다 네 손도 얼어.”
유릭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급한 건 자신 손인데 되레 내 손을 걱정하고 있다.
“유릭, 그냥 내 말 들어. 안 그럼 미워할 거니까.”
내가 한 번 쏘아보자 유릭이 꼬리를 내렸다. 그는 장갑 한쪽을 끼고 나머지 한쪽은 나에게 돌려줬다. 한쪽씩 나눠 끼지 않으면 애써 끼웠던 장갑도 벗을 기세였다.
“손이 꽁꽁 얼었는데 장갑을 거부하다니. 진짜 바보 같아.”
하는 수 없이 왼쪽 장갑에 내 손을 넣었다.
“그럼 장갑 끼는 대신 붙어 있어도 돼?”
“붙어 있겠다니?”
“응? 리제.”
유릭이 어리광을 부리자 나는 유릭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그런 다음 그의 맨손을 잡아서 내 옷 주머니에 넣었다. 유릭은 손까지 잡을 줄 몰랐는지 눈을 똥그랗게 뜨다가 또 웃는다.
“여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오래 안 기다렸어.”
정말로 기다렸구나. 이젠 놀랍지도 않다.
“왜 그런 거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을 안 정했잖아. 네가 언제 나올 줄 모르니까 엇갈리지 않게 빨리 나온 거야.”
“애 같아.”
“우리 애 맞아, 리제.”
말 한마디 안 지면서 자신이 애라고 주장하는 유릭이 살짝 얄미웠다.
“보고 싶어서 기껏 나왔더니만. 자꾸 놀리기만 하고.”
내가 입술을 살짝 내밀자 유릭은 자신의 얼굴을 내 어깨에 묻고선 비볐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의 뺨을 간지럽혔다.
“왜 웃어?”
유릭을 내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날 빤히 바라봤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네가 기분 좋아 보이니까.”
“내가?”
“응, 리제 마르센이.”
유릭이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이 민망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나는 얼굴에 슬며시 올라오는 열을 느꼈다.
“기분이 좋기는. 평상시랑 같아.”
“응.”
“오히려 네가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응, 좋아.”
할아버지에게 또 매서운 잔소리를 듣고 온 걸까? 유릭이 오늘따라 내 곁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머니 안에 잡고 있던 손에는 슬슬 땀이 찼다. 유릭이 찝찝해할까 봐 손깍지를 푸는데 그가 더 강하게 내 손가락 마디를 파고들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간질거리는 게 몸이 가벼워졌다.
“눈 내린다.”
눈이 뺨에 닿았는지 유릭이 하늘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인가?”
“첫눈이야.”
유릭의 대답에 나는 내 손에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를 보았다.
“신기하다. 첫눈.”
“겨울정원에서 보는 첫눈이네.”
유릭이 작게 중얼거렸다.
“겨울정원?”
“이 꽃밭은 겨울에만 꽃이 피니까.”
그렇구나.
“예쁘다…….”
첫눈이 내린 날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대부분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첫눈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아니네…….’
* * *
그때도 첫눈이 내렸다. 학부모 상담으로 초등학교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아이들이 나간 학교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다른 학부모들이 상담 오시기 전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부른 게 원인이었다.
여태 내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온 적이 없다. 학부모 직업을 조사하는 설문지에 내가 아무것도 쓰지 못해 선생님의 의심을 받았다. 그렇게 추궁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대충 질문을 요리조리 피한 뒤, 복도로 나왔다. 창문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보하니?”
앞을 보자 아직 학교를 떠나지 않은 방과 후 바둑선생님이 서 있었다. 너무 놀라서 다리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선생님 보기가 껄끄러웠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아버지가 선생님께 전화로 이상한 소리를 퍼붓지 않았던가.
“안, 안녕하세요.”
“잠시 얘기 좀 할까?”
선생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날 빈 교실로 불러 따듯한 코코아와 과자 봉지를 두 개 주었다. 눈치를 보며 코코아를 조금씩 마시던 나는 선생님이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두려웠다.
어서 이 코코아를 다 마시고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보하야.”
“……죄송해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날 가만히 쳐다보았다.
“바, 바둑은 저랑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어렵고, 또 사실 그다지 흥미도 안 가고. 그리고 전 프로기사보다 다른 걸 원해요.”
“……의사 말이니?”
날카로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의사가 되고 싶은 거야?”
“……전 돈이 많았으면 해요. 부자가 되고 싶어요.”
“정말로?”
“네. 돈이 좋으니까요.”
대답이 거침없이 나왔다. 의사는 모르겠으나 부자가 되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항상 나에게 돈이 많았으면 했다. 부자가 되어서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걱정 없이 살고 싶었다.
“돈 말고는?”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네?”
“돈 말고는 정말로 더 원하는 게 없는 거야?”
“전, 전 프로기사가 되고 싶지 않아요.”
“보하야, 지금 나는 너에게 프로기사를 강요하는 게 아니야. 바둑을 두지 않아도 돼. 그냥 나는 돈 말고 네가 또 원하는 게 있는지 궁금한 거란다. 정말로 돈이 제일 갖고 싶은 거니?”
선생님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보자 의심이 확신으로 번졌다. 선생님의 눈빛은 이미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돈을 원했지만 돈보다 원하는 게 딱 하나 있었다.
딱 하나.
“하나 있는데…….”
“알려주지 않을래?”
“……그냥, 엄마하고 아빠가 항상 웃었으면 해요.”
선생님이 알아듣지 못할까 봐 바로 말을 덧붙었다.
“그러면 저도 매일 웃을 수 있을 거 같거든요.”
행복한 가족.
그게 제일 갖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