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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1) (33/47)


33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1)
2023.04.25.


드디어 그토록 기다렸던 날이 왔다.

바다 여행!

가방 안에 물건을 잔뜩 넣은 뒤 계단을 내려오자 소파에 앉은 이세벨이 있었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출발하려던 내 계획이 단숨에 틀어졌다. 이세벨은 외출용 구두로 갈아신는 날 유심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얼마나 매서운지 끈을 묶는 손이 살짝 떨렸다.


“일찍 출발하는구나. 아직 하녀들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로저와 일찍 만나기로 해서요. 어제 분명 말했는데. 근데 안 주무셨어요?”

“잠이 안 와서 말이다. 그나저나 캠프에 참석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귀족이라는 걸 알고 있니?”

“어떻게 알고 계세요?”

이세벨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캠프에 대해 알아보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지금 캠프에 참여하는 척 바다 여행 가는 건데.


“됐다. 괜히 설쳐서 마르센 가문만 망신시키지 말고, 조용히 그리고 차분히 있어라. 또 브루타뉴 교수는 좀 괴짜니 조심하고.”

“괴짜요?”

“보면 알 거다.”

그녀는 이번 캠프 일정 중 만나게 될 브루타뉴 천문학 대학교수를 잘 아는 듯이 말했다.


“그 교수가 너에게 이상한 말을 해도 절대 귀담아듣지 말아.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독특한 분이니까.”

이세벨은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다 허리를 일으켰다. 현관문을 열자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어쨌든 잘 다녀오렴.”

닫지 않은 문틈 사이로 이세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다녀올게요!”

 

 

* * *

봄이 올 것을 알리듯 겨울정원에는 푸른색이 맴돌았지만 날씨는 흐릿하고 우중충했다.


“리제, 리제 마르센!”

저 멀리서 로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들고서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같이, 같이 가!”

언덕의 높이가 완만했음에도 로저는 힘든지 걸음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 탓에 시간이 많이 지났다.


“나 먼저 간다!”

“기다려! 거의 다 왔단 말이야!”

거의 다 오기는 무슨.


“헉, 기다리라고……!”

내가 먼저 가버리기 전에 로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뛰어왔다. 내 앞에 도착한 그는 한동안 거칠게 숨을 내뱉다 헛구역질까지 했다.


“체력이 약하구나, 로저.”

“아, 아니거든. 체력만 약하지, 팔 힘은 강해. 만져볼래? 응?”

로저는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내 앞에 팔을 내밀었다. 틈틈이 검을 쥐는 유릭보다 얇았지만 의외로 로저의 팔은 탄탄하고 근육이 있었다.


“어때? 단단하지?”

“근데 너 혼자 온 거야? 하녀를 데려오지 않고?”

“하녀와 같이 마차를 타고 오긴 했지만 언덕 밑에서 헤어졌어. 저 밑에서부터 혼자 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올라왔다고.”

로저는 터질 듯한 가방을 보여주며 으쓱했다. 가까이서 보니 내 가방과 비교가 될 정도로 크기의 차이가 있었다. 잠시 그와 내 목적지가 같다는 걸 잊었다.


“설마 집안 살림을 다 챙겨온 건 아니겠지?”

“옷 같은 경우 다섯 벌 정도.”

고작 하루 있는 건데 옷을 다섯 벌씩?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어머니께서 간식을 챙겨주셨어. 쿠키 세트랑 티 세트도 가져왔지. 그리고 보통 예술가들은 바닷가에서 영감을 받으니 이를 기록하기 위해 공책 두 권 정도 챙겼어.”

“두 권씩이나?”

“기록은 중요하니까. 가져온 깃펜은 아버지가 대륙을 돌아다니며 공연하실 때 사 온 건데 무척 비싼 거야. 잉크도 세트인데 색깔이 열두 개로 다양해. 물론 그 색깔들도 다 가져왔지. 아, 그리고 또 뭘 챙겼는데 뭐였더라…….”

가방이 무겁지 않으면 이상한 거였다. 더 듣다가는 잔소리만 할 거 같아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야, 같이 가!”

로저가 내 뒤를 쫓았다.

이곳에서 펜턴 가는 전혀 멀지 않았다. 저 앞에 펜턴 저택의 지붕 색깔이 선명하게 보이듯이 조금만 걸으면 금방 정문에 도착했다.

로저는 펜턴 가와 저 너머 있는 마르센 가 지붕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가깝네.”

“맞아. 중간에 겨울정원이 없었다면 저택이 나란히 있었을 거야.”

“이곳을 겨울정원이라 하는구나. 어쨌든 그놈은 가까운데 살아서 좋겠네.”

로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겨울정원이 가까워서 좋겠다는 소린가, 아니면 서로의 저택이 가까워서 좋겠다는 소리인가.


“어? 유릭이다.”

겨울정원을 다 지나고 펜턴 가 정문 앞에서 유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릭!”

“……리제!”

 

 
내가 손을 크게 흔들며 반갑게 부르자 유릭도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내 옆에 있는 로저를 보고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로저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둘은 서로를 쏘아보며 견제했다.


“벌써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묻자 유릭은 내 손에 있는 가방을 가로챘다.


“오후에 비가 올 수도 있어서 일찍 출발하려고. 가방은 마차에 실어줄게. 꺼낼 건 없지?”

“야, 내 가방도 마차에 실어줘.”

로저 또한 자신 가방을 유릭에게 내밀었지만, 유릭은 이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허, 저 자식이.”

“유릭이 네 말을 듣질 못했나 봐.”

“변호하지 마, 리제. 저 자식은 내 말을 정확히 들었으니까.”

로저는 유릭의 뒷모습을 보며 씩씩거렸다. 제발 이번 여행에서 둘이 좀 친해져야 할 텐데…….

내 바람과 반대로 로저는 가방을 싣고 있는 유릭에게 다가갔다. 마차 뒤에는 유릭과 내 가방이 나란히 있었다.

로저는 자신의 가방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더니 유릭의 가방을 앞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내 가방 옆에 자신의 가방을 두었다.


“이렇게 놔야 안정감이 있지.”

로저가 흐뭇해했다.


“뭐 하는 거야? 가방을 싣는 건 나야.”

“도와주는 것뿐이야. 공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너한테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는데.”

“이게 다 나의 선의인 거지. 꼭 도와달라고 해야 도움을 주나.”

유릭과 로저가 또 부딪쳤다.

전부터 사소한 일로 경쟁을 벌이더니 이제는 가방 위치까지 걸고넘어진다. 유릭은 로저 가방을 앞쪽으로 옮기더니 자신의 가방을 내 옆에 두었다. 그럼 로저가 다시 유릭의 가방을 앞쪽에 던져놓았다.


“이게 나아.”

“무슨 소리야. 이게 나아.”

이 같은 행동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신경전을 벌이는 둘보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내가 더 답답했다.


“……그냥 내 가방을 앞쪽에 두는 게 어떨까?”

결국 끼어들었다.

로저와 유릭의 가방을 사이좋게 나란히 두었다. 그러니 제일 안정감이 있었고, 보기도 좋았다.


“이게 제일 낫다. 그렇지?”

내가 웃으며 말하자 둘은 할 말을 잃어 멍하니 있었다. 뭐라고 우기고 싶어도 내가 선정한 자리가 제일 낫자 말도 못 꺼냈다.


“어머, 언제 왔니?”

그때 모습을 보이지 않던 펜턴 부인과 유네가 등장했다. 가방과 함께 유네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해골 인형을 품에 안고 나타났다. 유네는 마차를 보다가 날 발견하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언니!”

“유네. 로저 오빠도 왔잖니.”

유네가 나만 반기자 펜턴 부인이 지적했다. 그제야 내 품 안에 안겼던 유네의 시선이 로저에게 향했다.

그녀는 인사 대신 로저를 경계하며 고개만 살짝 까딱거렸다. 로저도 자신을 조심스러워하는 유네가 어색한지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리제 언니. 저 오빠도 같이 마차에 타는 거야?”

마차에 타기 전 유네가 내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로저를 말하는 거야? 응. 당연하지.”

“그럼 언니가 내 옆에 앉으면 안 될까? 나는 엄마와 언니 사이에 앉고 싶어.”

유네는 로저가 많이 불편한가?

전부터 알아차리긴 했지만 사교성이 뛰어난 유네는 왜인지 로저 앞에서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비가 오기 전에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마님.”

“얘들아, 들었지. 어서 올라타렴.”

마차꾼의 말에 부인이 우리들의 행동을 재촉했다.

마차는 크고 내부가 넓었다. 다섯 명이 들어가 앉아도 한 좌석이 남을 정도로 넉넉해 다리가 부딪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차꾼의 말과 함께 바퀴가 움직였다.

* * *

세 시간 정도의 여정이었다.

펜턴 부인과 유네는 잠을 잤고, 나는 키토 남작의 체스 기보를 살폈다. 남작은 최근 한 달 동안 벌어진 게임 중 하나의 스테일메이트를 제외하고 모두 승리했다.


“남작께서 가장 빨리 최종본선에 이름을 올리셨다고 하셨어.”

같이 기보를 살피고 있던 유릭이 말했다.


“역시 대단하시다.”

“그래서 일주일 뒤 마을에 올 수도 있대.”

“정말?”

“응. 최종본선 후보가 정해지길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야. 그때까지 여유가 좀 있으신가 봐.”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도 키토 남작의 얼굴이 궁금했으니까 말이야.”

로저가 끼어들자 유릭이 피식 웃었다.


“남작님은 네 이름도 몰라. 그리고 남작께서는 워낙 바쁘신 분이시라 네가 보고 싶다고 떼써도 못 보지.”

“바커스 가문이라 해도? 예술 문외한이 아니라면 바커스 가문은 아실 텐데.”

“그럼 네 아버지를 모셔와야겠네. 넌 바커스 가문의 아들이지, 바커스 가문을 대표하지 않잖아.”

“뭐? 난 바커스 가문을 대표하지 않아도 그 후계자야.”

“후계자일 뿐이잖아?”

이제는 저 둘이 안 싸우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날 정도다. 번거로운 말다툼에서 슬쩍 빠진 나는 밖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쳤다. 아까부터 마차가 흔들리는 것이 바람이 많이 부나 싶었다.

날아온 나뭇가지가 창문에 달라붙었다. 날씨가 범상치 않자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는 건물도, 집도 아무것도 없었다. 앞에는 목적지인 바다만 보였다.


‘괜찮을까?’

창문을 닫고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로저와 유릭은 밖이 어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났을까. 마차가 과도하게 흔들렸다.

-쾅!


“뭐야? 무슨 일이니?”

불안하다 싶었는데 바람으로 인해 날아온 무언가가 마차와 부딪쳤는지 굉음을 냈다. 놀란 펜턴 부인과 유네가 눈을 떴지만 늦었다. 상황을 살피기도 전에 마차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윽!”

“마님!”

뒤를 따라왔던 하녀가 문을 열고 다급히 손짓했다.


“어서, 어서 내리세요! 마차가 넘어갈 거 같아요!”

문 너머에는 강한 비바람과 함께 넘실거리는 파도가 보였다.

폭풍이 불어닥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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