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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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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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2)
2023.04.28.
“얘들아, 어서 나가렴! 어서!”
마차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이었다. 마차꾼이 온몸으로 기울어가는 마차를 잡고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부인은 우리의 등을 떠밀며 빠르게 마차에서 탈출시켰다.
안을 벗어나도 문제였다. 바람이 생각보다 거세 앞으로 나아가는 거조차 힘들었다. 이러다 몸이 허공에 뜨는 게 아닐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있는 별장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향하려 했지만 묶지 못한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하게도 걸음 하나 제대로 옮길 수 없다.
“리제! 내 손 잡아!”
유릭이 내민 손이 얼핏 보였다. 몇 번 팔을 허공에 휘적거리다 그의 손을 잡는 데 성공했다.
유릭의 이끌림에 따라 천천히 나아갔지만 앞을 가린 시야와 바람의 세기는 여전했다. 아슬아슬했던 몸뚱어리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야! 조심해!”
넘어지기 전 다행히 뒤에 있던 로저가 내 등을 받쳐주었다.
“미, 미안.”
“받쳐줄 테니까 제대로 걸어!”
유릭과 로저가 앞뒤에 없었더라면 이미 저 멀리 굴러갔을지도 몰랐다. 덕분에 무사히 별장 앞까지 도달했다. 뒤이어 유네를 품에 안고 온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쿵!
둔탁한 소리에 뒤를 돌자 끝내 뒤로 넘어간 마차가 보였다. 다행히 마차가 넘어가기 전 몸을 비킨 마차꾼은 다치지 않았다. 문제는 말이었다.
마차꾼은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끈을 꽉 잡았다. 강풍으로 말들이 멋대로 움직이자 마차꾼이 크게 애를 먹었다. 그는 몇 번이나 끙끙거리며 소리를 내다 뜻대로 안 되자 작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제가 도와야겠어요.”
유릭이 마차꾼을 보았다.
“괜찮겠니?”
“네.”
부인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자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함께 돕기 위해 머리를 묶는데 로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넌 방해되니까 여기 꼼짝하지 마.”
“방해?”
“너보다 팔 힘이 훨씬 강한 내가 갈 테니까.”
로저는 그 말을 끝으로 유릭과 함께 다시 바람을 뚫었다.
마음을 졸이며 마차꾼에게 가는 두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리긴 해도 사내는 사내인지 중심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게 대단했다.
유릭과 로저는 마차꾼을 도와 말의 고삐를 하나씩 잡았다. 잔뜩 겁이 난 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괜찮니?!”
부인의 물음에도 다들 정신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다.
“오빠! 조금만 힘내!”
유네도 목소리를 높였다.
큰 문제 없이 다들 별장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창고까지 말들이 소란 피우지 않고 들어갔으면 좋겠건만…….
한 걸음 앞두고 로저가 잡고 있던 말이 바닥에서 날카로운 것을 밟았는지 경련을 일으켰다.
-끼이이이잉!
“제기랄! 왜 이래?!”
“로저!”
말이 제자리에서 돌더니 방향을 틀고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했다. 차마 고삐를 놓지 못했던 로저의 몸도 같이 움직였다. 그가 말과 함께 멀어지기 전 손을 뻗은 나는 가까스로 로저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앗!”
“으악!”
고삐를 놓은 로저의 몸과 내 몸이 겹쳤다. 동시에 앞으로 넘어간 우리는 바닥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리제!”
“리제! 괜찮아?”
뒤에서 부인과 유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충격으로 근육이 놀란 거 같지만 큰 이상은 없었다. 문제는 로저였다. 고개를 든 나는 바로 밑에 있는 로저의 얼굴을 살폈다.
“로저, 괜찮아?!”
“……안 괜찮아.”
“어디 다친 거야? 어디? 어디!”
로저의 두 뺨을 잡고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다 내 손이 자연스레 로저의 가슴팍을 더듬었고, 시선은 그 아래로 이동했다.
“괜, 괜찮다니까. 무거우니까 비켜!”
“아, 미안.”
로저는 나를 확 밀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 혼자 일어나는 걸 보니까 로저도 크게 다치지 않았나 보다.
“도망간 말은 어쩌죠? 부인?”
“어쩔 수 없지. 우선 창고에 말을 대피시킨 후, 몸을 녹이도록 하자꾸나. 별장 안에 담요가 있을 거야.”
부인이 말에 모두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황이 그렇게 일단락되고 감기에 들지 않도록 몸을 대피했다.
* * *
창문이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이를 제외하면 꽤 견고하게 지어진 별장이었다.
나무판자를 이어붙인 바닥엔 넓은 현관과 큰 난로가 있었고, 좁았지만 식당하고 주방도 구비 되어 있었다.
그 옆 나무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2층 복도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고용인들도 다 머물 수 있는 방과 함께 안에는 가구가 다 갖춰졌다.
“펜턴 가 별장인가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묻자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란다.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의 별장인데, 이번 여행을 위해 빌려달라고 부탁했지. 보다시피 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 눈치 보지 않고 휴항을 즐길 수 있어. 앞에 있는 바다도 독차지하고 말이야. 웬만한 것들은 이 별장에 있어 마을에 가지 않아도 되고.”
“날씨만 좋았다면 완벽했을 거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폭풍도 지나갈 테니 너무 실망하지 말렴.”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저 마님. 마차는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바퀴 하나가 부서진 거 같은데요.”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낸 마차꾼이 부인에게 다가왔다.
“우선 날이 잠잠해지길 기다려야지. 바람이 가라앉으면 제일 가까운 마을을 가보는 게 좋겠구나. 말을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작은 마을이 있다고 들었다.”
“알겠습니다.”
부인 말대로 폭풍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지만, 흐리멍덩한 날씨가 길게 이어질 거 같았다. 만약 내일까지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면 정말로 큰일이다.
‘어머니가 알고 있는 일정은 일박이일이야.’
폭풍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내가 저택에 오질 않는다면 이세벨이 어떻게 생각할까? 바로 캠프에 연락을 넣을 터고, 나와 로저가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면……. 그만 상상하자.
빨리 날씨가 좋아져야 할 텐데.
“리제. 추우니까 담요 덮어.”
“야, 내 거는?”
유릭이 건네받은 담요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몸을 덜덜 떨고 있던 로저가 빠르게 오더니 물었다.
“자, 네놈 거.”
“으으, 덮어도 춥네. 안 되겠다, 리제. 같이 좀 두르자.”
로저는 내 옆에 찰싹 붙더니 나와 같이 담요를 둘렀다. 온기를 나누자 추위가 좀 가셨는지 잔뜩 경직된 로저의 어깨가 풀렸다.
“야, 리제한테서 떨어져.”
하지만 불만스럽게 로저를 쳐다보는 유릭의 시선은 전보다 더 매서워졌다. 그는 내 옆에 있는 로저를 당장이라도 걷어찰 거처럼 바라보았다.
“괜찮아. 유릭. 너도 옆에 와. 같이 덮자.”
“그래도 돼?”
“싫으면 말고.”
“아니! 싫을 리가 없잖아!”
그는 재빠르게 내 옆에 앉아 자신의 담요까지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따듯하다.”
셋도 따듯했다. 내 양옆에 있는 유릭과 로저의 몸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덩달아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내 몸도 녹아내릴 거 같다. 그 따듯함에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는데, 유릭이 나에게 더 가까이 와 밀착했다.
그와 내 어깨가 부딪쳤다. 그걸 본 로저도 질세라 나에게 붙는다.
“……음?”
……이건 좀 많이 밀착된 건 아닌가?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갇혀 있는 기분이다.
-꼬르륵.
이 갑갑함을 깨트린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내 배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로저. 너는 배도 시끄럽구나.”
“뭐? 나, 나 아니야!”
“뭐? 그럼 누구…….”
나와 로저의 고개가 자연스레 유릭 쪽으로 돌아갔다. 유릭은 변명할 생각 없이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저 빨개진 귓불을 보아하니 소리의 행방이 바로 파악됐다.
“멍청한 놈, 배가 고프면 말을……악!”
비아냥거리려 했던 로저의 옆구리를 능숙하게 팔꿈치로 찔렀다. 로저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로저. 넌 배 안 고픈 거 같네. 그럼 너 빼고 점심을 먹으면 되겠다!”
“뭐, 뭐?”
“사실 나도 배가 무척 고프거든.”
로저는 상황이 역전되자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식사 할 때가 되었구나.”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부인이 시간을 살폈다.
“마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다.”
“저……마님. 그럼 저는 마차를 살피러 가겠습니다. 바람이 많이 약해져서 지금 마차를 창고로 옮길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마차꾼이 아까보다 나아진 바람세기를 보며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
“위험하다 싶으면 뒤에 있는 가방들만 건져 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하렴.”
몸을 녹였으니 하녀들은 주방으로 향했고, 마차꾼은 도로 밖으로 나갔다. 상황을 살피던 부인은 품 안에 있는 유네를 보고선 낯빛이 어두웠다. 비를 홀딱 맞은 유네의 몸이 아직도 차가운지 그녀는 담요를 더 유네의 몸에 끌어당겼다.
“어머니. 유네의 몸이 어디 안 좋은가요?”
오늘따라 유네가 조용했다. 유릭이 걱정되어 묻자 부인은 유네를 안고 일어났다.
“몸이 많이 차갑구나. 침대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고.”
“걱정 마세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유네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기대했던 여행이고 기분 좋게 가려 했던 여행이었다. 근데 날씨부터 몸 상태까지 엉망이었다. 그나마 유네가 이 침울한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그녀가 아프다.
“별일 없을 거야.”
유릭이 안심시켰지만 기분이 침울했다.
“계속 날씨가 이러면 어떡하지.”
“뭐가 어떡해. 집에 못 가는 거지.”
“집에 못 가면 거짓말한 걸 들킬 텐데.”
“넌 엄청 혼날 테고.”
로저의 대답이 날 더 침울하게 만들었다. 또 아무렇지 않게 건조하게 말하는 그의 대답이 좀 어이없기도 했다. 지금 로저도 나와 같은 처지 아닌가? 집에 못 돌아간다. 그럼 당연히 바커스 부인께 했던 거짓말을 들킨다.
“나만 혼나? 너도 혼나.”
“……알아.”
홧김에 말했는데 로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슬쩍 로저를 보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분명 나한테 실망하실 거야.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거든.”
“로저.”
“어떡하지?”
그는 심각했다.
울먹이는 로저의 목소리에 나도 유릭도 덩달아 놀랐다. 도저히 농담으로 풀 분위기가 아니었다.
“저, 저기 로저.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그, 그래도 거짓말 한 번 했다고 바커스 부인이 너한테 실망하는 일은 없을 거야. 거짓말은 누구나 한 번씩은 꼭 하는 거니까.”
“너도 거짓말 한 적 있어?”
“나는 화장실 가는 것보다 거짓말하는 횟수가 더 많아.”
“넌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돌덩어리, 너는……?”
로저의 시선이 유릭에 닿았다. 유릭은 로저가 자신에게도 물을지 몰랐는지 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정말?”
유릭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거짓말을 하다니. 이건 의외였다.
“언제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는데? 어떤 거짓말을 했어?”
로저가 집요하게 묻자 유릭은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눈에 보이는 그의 반응에 로저는 대답을 기다렸다.
유릭은 대답 대신 입술만 달싹이며 말을 피했다. 그 침묵의 시간이 오래 걸리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궁금하게 왜 말을 못 해. 혹시 야한 거라도 몰래 본 거야?”
그냥 농담이었다. 농담이었는데 유릭에게서 대답이 또 없다.
아.
“…….”
“…….”
“……본 건 아니야. 저택에 그런 책은 없으니까! 그, 그냥 그게 꿈을…….”
이번에는 아주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지금 유릭 몇 살이지?
생일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열두 살이 된 거였다.
보통 그 나이대 남자들은…….
……그렇구나.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