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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3) (35/47)


35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3)
2023.05.02.



“……리제. 정말로 이상한 거 아니야. 안 봤어. 안 봤어, 진짜.”

내 표정이 좀 노골적이었는지 유릭이 진땀까지 흘려가며 변명했다.


“그래서 어떤 걸 봤는데? 보지 않았다면 설마 상상한 거야?”

“…….”

“무슨 상상? 말 좀 해 봐.”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걸까 로저가 연신 물었다. 당연 유릭이 곱게 대답해줄 리 없다.

그는 로저를 한 번 쏘아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반면 침울했던 로저는 금세 기분이 풀어졌는지 조잘조잘 말했다.

그 입방정에 참다못한 유릭이 팔을 뒤로 뻗어 로저의 머리를 확 내리쳤다. 맞고도 가만히 있는 건 로저가 아니었기에 그도 다리를 뻗어 유릭의 옆구리를 쳤다.


“뭐 하는 짓이야?”

“네가 먼저 날 쳤잖아!”

“네가 이상한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

“이상한 질문? 아주 정상적이었거든?”

몸싸움이 시작됐다. 예전처럼 주먹을 날리는 싸움이 아니었다. 날 가운데 두고 팔이나 다리를 힘껏 뻗어 상대방의 몸을 살짝 치는 정도다. 사실 장난에 가까웠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문제는 자리 선정 잘못한 나도 같이 휩쓸린다는 거였다.


“이 돌덩어리! 어떻게 손도 돌같이 딱딱하냐?”

“네가 지나치게 약한 거야. 머리가 빈 거처럼 근육도 비어 있으니까.”

어쩌면 로저나 유릭보다 내가 제일 많이 맞았을지도.


“이 망할 돌덩어리!”

“이 바보가!”

“그만해……. 그만하라고!”

 

 

* * *

배를 채우고 난 뒤, 주사위 놀이나 가져온 보드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금세 어두워진 날이었지만 폭풍은 아직 진행형이었다. 바람이 약해져 밖에 나갈 수 있어도 언제 다시 폭풍이 휘몰아칠지 몰랐다. 날씨는 그만큼 변덕스러웠다.


“또 리제가 우승이네.”

“너 무슨 수 쓴 거 아니지?”

유릭과 로저는 어김없이 승리한 날 보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사위에 어떻게 수를 써? 운이 좋은 거뿐이지.”

현실에서 없는 운. 게임에서라도 좋아야 하지 공평하지.


“그럼 난 체스 기보 살피고 있을게.”

우승한 내가 자리를 빠지자 게임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등이라는 등수를 차지하기 위한 사투가 시작된 거였다.


“돌덩어리. 우리 내기 하나 하는 건 어때?”

주사위를 굴리기 전 로저가 씩 웃으며 유릭에게 제안했다.


“뭘 걸 건데?”

“만약 내가 이기면 아까 네가 말하지 못한 그 얘기를 해줘. 뭘 상상했는지 말이야.”

“……뭐라고?”

로저는 유릭의 거짓말이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가 나올 줄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유릭이 보드 판을 한 번 살폈다. 승률이 거의 반반이었지만 굳이 누가 더 우승에 가까운가 살핀다면 미세한 차이로 로저였다.

평소라면 그 미세한 차이에 망설이지 않고 승부에 걸 유릭이 조용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유릭이 무슨 생각 하는지 훤히 보였다.

로저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제 자존심이 용납 못 했고, 그렇다고 받아들인다면 미래가 걱정되는 거다.


“뭐야, 왜 말이 없어? 나 던진다.”

“잠깐!”

로저가 주사위를 던지려 하자 유릭이 재빠르게 막았다.


“왜? 질까 봐 무서워?”

“그게 아니라 다른 거! 다른 걸 들어 줄 테니까 비밀은 없던 거로 해.”

“싫어.”

로저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릭은 더 다급해졌다.


“그럼 두 개, 두 개 들어줄게!”

“싫은데?”

이때만큼은 둘 다 제 나이 또래 같았다. 하는 짓이 귀엽고 웃겨 바라보고 있는데 위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 셋의 고개가 이층 난간 쪽으로 향했다.


“유릭!”

펜턴 부인은 계단에 내려오다 말고 급하게 유릭을 불렀다.


“……어머니?”

“양동이에 시원한 물을 떠서 가져와 줄 수 있을까? 하녀들은 지금 유네를 돌보느라 바빠.”

“유네가 많이 아픈가요?”

“이상하게도 열이 많이 나는구나. ”

상태가 좋지 않은지 펜턴 부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게임은 중단되었다.

물을 뜨기 위해 밖으로 나선 유릭을 보곤 나도 쥐고 있던 체스 기보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오랫동안 하녀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유네는 단순한 미열이 아닌 걸까?

양동이에 물을 담아온 유릭이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와 로저는 잠깐 서로를 보다 유릭의 뒤를 쫓았다.


“유네, 괜찮니? 응?”

위로 올라가자마자 펜턴 부인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물 떠왔어요.”

“고맙구나, 유릭.”

슬며시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땀을 많이 흘리는 유네의 얼굴을 발견했다. 입술이 허했고, 얼굴이 창백했다. 딱 봐도 상태가 많이 심각해 보였다.

펜턴 부인은 유릭이 가져온 물에 수건을 적셔 유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다른 하녀들도 땀에 젖은 이불을 새 이불로 바꾸고 몸을 닦는 등 분주했다.

그래도 유네 몸이 나아지려 하지 않자 이를 불안하게 여겼던 하녀가 입을 열었다.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아요. 마님.”

“하지만…….”

부인을 따라 창문 너머를 보았다. 바람이 약했지만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마차 또한 아직 바퀴를 수리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도 마을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렸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유네를 말에 태운다고 해도 문제였다. 걸리는 요소가 많아 부인도 병원행을 쉽게 결정 못 했다.


“아가씨께서 상태가 더 악화되면…….”

“나도 알아. 하지만 곧 있으면 병원 문이 닫히지 않니?”

“그럼 저희가 말을 타고 가 의사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시 태풍이라도 불면 어떡하려고?”

끙끙거리던 유네의 입에서 거친 숨과 뜨거운 열기가 나왔다. 괴로워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의 모습에 펜턴 부인은 잠시 갈등하다 일어났다.


“날이 어두워졌어. 이 근처에는 사람 한 명 없고. 말을 타고 가다가 폭풍이라도 만나면 큰일이야. ……우선 우리끼리라도 유네를 간호하자꾸나. 밤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때까지 저는 최선을 다해 마차를 고치겠습니다.”

지켜보던 마차꾼이 등을 돌렸다.

방 내부는 유네의 신음으로 가득 찼다. 유네 곁에 더 있고 싶었지만 펜턴 부인은 혹 병세가 옮을 수도 있으니 나가라고 했다.

문이 닫히고 유릭을 비롯한 로저와 나는 복도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다.

유네가 아픈 걸 알아차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로저도 마찬가지였고, 유릭은 말할 것도 없다.


“네 동생, 평소 열을 심하게 앓았어?”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은 로저가 물었다. 나와 유릭도 로저를 따라 무릎을 굽혔다.


“몸이 약하거든. 감기가 유행할 때면 항상 열에 시달리곤 해.”

“음.”

“그래도 매번 나아졌으니까.”

유릭은 지금도 분명 나아질 거라고 말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평소 워낙 씩씩하고 활발한 유네이니 병세도 금방 이겨낼 거다. 근데도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깜깜한 복도에 빛 하나 없었다. 방 안에 있는 유네의 울음소리가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아, 괜히 바다에 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나?


“고지식한 리제.”

로저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심란해 죽겠는데 로저는 농담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어 무릎에 고개를 묻는데 로저가 내 등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담요는 또 언제 챙겼을까.


“이상한 생각 말고 덮고나 있어.”

“이상한 생각 안 했어.”

로저는 기어코 내 입술이 열리게 만든다. 몸을 뒤척이던 유릭은 내가 어설프게 덮고 있던 담요를 내 목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리제. 지금은 저 바보 말이 맞아.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넌 가끔 꽉 막혀 있으니까.”

“너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했냐?”

로저는 발끈하면서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유릭에게 별말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꽉 막혀 있다고? 내가? 어디가?

억울해 유릭을 쳐다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 찔렀다.


“……?”

한 번도 아니고 꽤 여러 번 쿡쿡 찔렀다.


“뭐 하는 거야?”

“꽉 막힌 거 풀어주는 거야.”

유릭의 말에 듣고 있던 로저가 ‘그거 좋은 생각인데?’ 하면서 내 반대쪽 볼을 툭툭 찔렀다. 양쪽에 있는 소년에게 두 볼을 내주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은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안 되겠다. 앞으로 이 둘 사이에 앉거나 서 있질 말아야지. 이 자리는 터가 매우 좋지 않다.


“리제, 너 볼 생크림 같아. 되게 부드럽다.”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뭔가 아기 피부 만지는 거 같지 않아?”

“말랑말랑하기까지 해.”

“은근 촉감이 좋다니까. 이거 중독되는데?”

로저와 유릭은 은근 합이 잘 맞았다. 내 볼을 툭툭 찌르는 손가락을 말리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이내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마냥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좀 우스꽝스럽긴 해도 옆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꽤 좋았다.

* * *



“유네! 유네! 어서 빨리 물을……!”

벌컥 열린 문과 함께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복도가 흐릿하긴 했지만 환했다. 그대로 잠들었는지 창문 너머 날이 뜬 게 보였다. 허리를 일으킨 나는 내 무릎에 얼굴을 두고 자는 유릭과 내 어깨에 기댄 로저를 살폈다.


“유네! 괜찮니? 유네!”

방문이 활짝 열린 곳에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확 달아나는 목소리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나는 내 몸을 베개 삼아 자고 있는 두 아이를 깨웠다.


“유릭, 로저 일어나 봐, 어서!”

“……?”

“으……. 뭐야, 리제.”

둘은 잠에 약했다.

내가 자리에 벌떡 일어나자 유릭과 로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이좋게 맞닿은 머리에 둘은 눈만 깜빡거렸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겠어.”

방 안에 들어서자 겉옷을 챙겨입는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에는 어제보다 더 창백한 얼굴의 유네가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다. 열이 얼마나 나는 걸까. 그녀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했고, 옷은 다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만 마님, 밖 상황이…….”

“어젯밤 마차를 다 고쳤으니 그걸 타고 가야겠지.”

“언제 다시 바람이 거세질지 몰라요. 저희가 의사를 불러올 테니…….”

“그럼 늦어.”

이미 결정을 내린 부인은 단호했다.


“어머니?”

“마침 잘 됐다, 유릭. 너는 별장을 지켜주렴.”

잠에서 완전히 깬 건지 유릭과 로저가 방 문턱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유릭은 유네와 부인을 한 번 살피고 상황을 파악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 돼. 너는 이곳에 남아 리제와 로저를 지켜주렴.”

“바보랑 리제는 제가 없어도 잘 있을 수 있어요.”

“아니, 마차에 타는 건 나와 유네, 그리고 두 명의 하녀뿐이란다. 더 태웠다간 고친 바퀴가 또 빠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때마침 밑에서 마차를 준비했다는 마차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은 유네의 몸을 조심스레 안았다.


“유릭, 빨리 오겠다고 약속하마. 응?”

부인의 말에 유릭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부디 다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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