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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4) (36/47)


36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4)
2023.05.05.


똑딱.

현관에 있는 시계 소리가 고요함을 깨트렸다.

똑딱.

별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밖에는 천둥까지 기승을 떨쳤다. 불어오는 비바람은 한풀 꺾일 기세가 없이 요란했다. 넋까지 잃어버린 유릭은 얼굴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불안하게 일렁였던 촛불까지 꺼졌다. 방 내부가 우중충해졌다. 시야가 둔해지자 예민해진 청각이 별장 밖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잘 잡아냈다.

유릭은 유네가 누워 있던 침대에 앉았다. 그 곁을 로저와 내가 지켰다. 침대보를 슬쩍 만져보자 축축하고 눅눅한 촉감이 느껴졌다.


“걱정하면 할수록 네 마음만 상해.”

로저가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위로라고 한 말이겠지만 투박했다. 나야 로저와 친했기에 그 말을 꺼내기까지 로저가 얼마나 갈등했을지 알고 있었다. 언행이 저렇다 하여도 로저는 진심으로 유릭을 걱정하고 있는 거다.


“이럴 땐 차라리 아무 생각 안 하는 게 좋아.”

로저는 일어나 복도에 있는 빗자루를 하나 들고 왔다. 하녀도 없으니 부인이 올 때 동안 더러워진 방이나 청소하자는 의미였다. 로저는 어디서 났는지 걸레를 내 손에, 그리고 유릭의 손에는 쓰레기통을 쥐여 주었다.


“청소해 놓아야 네 동생이 이 방을 또 쓸 수 있겠지.”

“…….”

“침대보는 네가 갈도록 해. 할 수 있지?”

로저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유릭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돌덩어리가 된 거야? 왜 이렇게 조용해?”

유릭의 시선이 그제야 로저에게 향했다. 그 싸한 시선을 알아챈 나는 좋지 않은 징조임을 알아채고 소심하게 바닥을 닦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았다.


“로저……!”

“야,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 거라니까?”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로저가 유릭에게 말했다. 저 눈치 없는 놈!


“네가…….”

“응? 뭐라고?”

“……네가 뭔데 그걸 장담해?”

이제야 분위기를 알아챈 로저가 입을 다물었다. 유릭은 굳어진 얼굴로 슬며시 일어나 로저 앞으로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진 유릭의 몸뚱어리에 로저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로저보다 키가 한 뼘 이상 큰 유릭이 그를 내려보았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이 날씨에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은 알아? 마차가 기울어질 뻔한 걸 너도 알잖아.”

“아니, 난 그저 위로해주려고…….”

“네가 뭔데?”

이미 화가 난 유릭의 말투가 따가웠다. 처음에 우물쭈물한 로저도 자신의 위로를 되레 무시한 유릭이 같잖은지 눈빛이 매서워졌다.


“야, 너 말 다 했냐?”

“얘들아, 조금 진정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둘 사이에 껴 말했다. 내 말에도 둘은 서로를 향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리제, 비켜 봐. 이건 저놈이 먼저 잘못한 거야.”

“잘못?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거지?”

언제까지 이 둘 사이에 껴 말려야 할까. 이해관계가 살짝 엇갈려도 으르렁거리니 나만 곁에서 고생이었다.


“기껏 말해줬더니만 더럽게 굴잖아.”

“처음부터 네가 주제넘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이 둘은 중간에 내가 껴 있든 말든 자신 마음부터 풀려고 든다. 로저를 끌고 펜턴 저택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같은 성별에 비슷한 또래이기 때문에 서로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게 다 내 죄였다.

로저에게 유릭을 소개해 준 것도. 로저를 바다 여행에 데려간 것도. 바다에 가고 싶다고 소원을 빈 것도.


“진짜 개 같아.”

“……?”

“……리제?”

 

 
둘은 서로 싸우다 말고 똥그래진 눈으로 날 보았다. 놀라든 말든 난 지쳤다.


“이제 말리는 것도 지쳤어. 싸우든 뭐든 마음대로 하니까 제발 내 앞에서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말투는 상당히 가시가 돋아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이렇게 화가 났나 놀랄 정도였다. 근데 두 사내는 오죽했을까. 자신들로 인해 완전히 토라진 날 보며 멍청하게 서 있었다.


“아니. 지금은 내가 자리를 비켜야겠네. 복도에 나가 있을 테니까 너희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든 마음대로 해.”

“리제!”

자리를 비키자 둘이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진작에 잘하지 그랬어.


“야, 미안해.”

“아니. 내 잘못이야. 미안해, 리제. 정말 미안해.”

서로 네가 잘못했다고 싸우더니 이제는 서로 미안하단다. 노력하는 것이 정성 가득하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가만히 두어 반성 좀 하게 할까.

아니면 더 못된 말을 해 앞으로 저 둘이 싸우지 않게 만들까.

-쿵!

그 계획이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에 모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강해졌다. 창문이 깨질 것 같은 바람세기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강했다.

큰일이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마차는 아직 마을에 도착하지 않았을 거였다. 심지어 부인과 유네가 타고 간 마차는 막 수리해 불안정한 상태였다. 별장바닥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마차가 멀쩡할 리가 없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아.”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가보자.”

상황을 파악한 내가 방문으로 향했다.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사고를 당했다면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사고로 몸을 다쳤다면 상태는 심각했다. 그러니 직접 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안 돼, 리제. 위험해.”

유릭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돌덩어리 말이 맞아. 몸 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데 어떻게 마차까지 가겠다는 거야?”

“어제는 비 때문에 시야를 제대로 볼 수 없었잖아. 그러니까 비가 오기 전에 가자는 거야.”

“비가 안 온다고 안전한 건 아니잖아.”

“비가 오는 것보다는 안전하지.”

내가 또박또박 대답하자 로저는 표정을 구겼다. 그 사이 밖을 살폈던 유릭은 뭔가 결심한 듯 표정이 변했다.


“리제, 네 말이 맞겠다. 하지만 나 혼자 갈 거야.”

“너 혼자는 위험해. 유릭.”

“그럼 저 바보랑 같이 가면 돼. 리제 너는 이 별장을 지켜 줘.”

유릭은 로저를 가리켰다.


“그렇게 하는 게 낫겠네.”

로저도 이에 대해서는 찬성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에 비해 체력적으로 약한 내가 별장을 지키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힘이 약하긴 해도 너희들보다 상황파악이 빠르고, 결정하는 것도 빨라. 그러니까…….”

내가 꼭 방해만 되는 건 아니었다.


“나도 갈 거야.”

거부하면 몰래 쫓아갈 생각이었다.

좀 위험하긴 하겠지만 이대로 별장을 혼자 지키는 건 싫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있는데 유릭이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가자. 대신 위험하니까 서로 손을 꼭 잡는 거야.”

“……손?”

“그래, 왼손은 나랑 잡고 오른손은……로저 손을 잡아.”

로저도 나에게 손을 뻗었다.


“잡기 싫어도 무조건 잡아야 해.”

로저가 쐐기를 박았다. 아, 다시는 이 둘 사이에 서 있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운 것은 물론 손까지 잡게 생겼다.


“맞아, 리제. 절대 놓으면 안 돼.”

“아, 차라리 밧줄로 묶을까?”

“바보야, 그건 지나치잖아.”

사이가 풀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유릭과 로저가 티격태격했다. 둘도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내 눈치를 살폈다.


“하아, 알겠어. 잡을게.”

어쩔 수 없다. 저 둘 사이에서 벗어나는 건 글렀다. 내가 손을 주자마자 로저와 유릭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지금부터 손을 강하게 붙잡을 필요는 없는데.


“절대 놓지 않는 거야. 리제.”

“응. 절대로.”

다시 한번 내 대답을 확인한 유릭이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강하게 부는 바람이 안면을 강타했다.


“간다.”

앞장선 유릭이 문밖을 나섰다.


 

* * *



“리제! 갈만해?”

“응! 고마워, 로저!”

바람이 강하긴 했지만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아 중심 잡기는 쉬웠다. 젖은 땅에 새겨진 바퀴 자국으로 마차의 경로도 알았다. 이대로 앞만 가면 된다.

꽤 걷자 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진 거리가 보였다. 바람으로 인해 나뭇가지가 양옆으로 휘청거렸다. 몸통이 견고한 나무라 부서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유릭도 마찬가지인지 거리에 들어서기 전 발걸음을 멈췄다.


“야, 뭐 하는 거야? 빨리 가!”

보다 못한 로저가 내 등을 미는 것도 모자라 유릭의 등도 밀었다. 손에 휩쓸려 앞으로 간 유릭은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다.


“리제, 걸음이 빠르면 말해!”

“괜찮으니까 쭉 가!”

유릭은 거의 뛰듯이 걸었다. 거리를 빠져나온 뒤에도 유릭의 발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한참을 걸었을까 저 앞에 큰 형체가 보였다. 눈을 살짝 찌푸린 나는 저 앞에 있는 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마차다!”

펜턴 가 마차였다. 불행하게도 마차는 바퀴가 빠진 채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어머니! 유네!”

마차를 발견한 유릭이 다급하게 뛰었다. 그 탓에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뒤에 있던 로저가 내 등을 받쳐주었다.

그때 잠잠했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몇 초 사이에 많은 비가 쏟아져 순식간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유릭! 앞을 조심해!”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세 마차로 간 유릭은 그 안을 살폈다.


“어머니! 어머니!”

새파란 얼굴로 마차 안을 본 유릭은 손짓을 멈추었다.

충격에 젖은 그의 얼굴에 나도 마차 안을 살폈다. 조각 난 창문과 엉망진창이 된 내부는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것보다 땅바닥에 묻어 있는 피가 내 눈에 들어왔다.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혈흔이다. 누군가 다친 게 확실했다.


“유릭!”

이성을 잃은 유릭은 아무런 생각과 행동도 하지 않았다. 특히 저 피를 발견한 후부터 유릭의 사고는 완전히 끊겼는지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번개까지 내리친 탓에 앞이 번쩍했다.


“유릭! 분명 어딘가 몸을 피하고 계실 거야! 응?”

“…….”

“정신 차려! 제발!”

“비켜봐, 리제.”

내 말도 통하지 않자 로저가 유릭 앞으로 다가갔다.


“정신 차리라고! 이 바보야!”

“…….”

“아오, 진짜, 손 가게 만드네! 정신 차려!”

“로저!”

로저는 망설이지 않고 주먹 쥔 손으로 유릭의 얼굴을 세게 쳤다. 그의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나는 허겁지겁 그의 팔을 붙잡았다. 덕분에 유릭의 몸이 뒤로 넘어가진 않았지만 한순간에 볼이 빨개졌다.


“그렇다고 때리면 어떡해?”

“이래야 빨라. 봐.”

유릭 눈에 초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야, 돌덩어리! 리제 말처럼 부인은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피했을 거야. 그러니 찾으러 가자!”

로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유릭의 팔을 잡아끌었다. 유릭은 그런 그를 보더니 입술을 열었다.


“……너, 언젠간 나 때린 거 그대로 갚아야 할 거야.”

“그러든가!”

로저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좋게 풀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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