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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5) (37/47)


37 # 7장. 폭풍이 몰아치다 (5)
2023.05.09.


나는 마차를 넘고선 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가 내린 지 얼마 안 된 땅에는 희미하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이 빗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움직여야만 했다.

원래 맨 앞자리였던 유릭 대신 로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고개를 밑으로 숙여 땅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씨, 이래서 잘 보이지도 않네!”

“괜찮겠어? 로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로저는 꽉 잡은 내 손을 한 번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비바람을 뚫고 십 분 정도 걸었을까. 흙길이 끊겼고 자갈길이 이어졌다. 비에 젖은 땅이 발자국을 덮은 지 오래였다. 감각만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

사고가 났으니 멀리 가지 않았을 거다.


“리제, 저기!”

뒤에 있던 유릭이 멈췄다. 그가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눈을 가늘게 뜨니 앞에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여태 보았던 나무 중 가장 크고 거대했기에 위용이 남달랐다. 그 덕분에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거의 흔들림 없이 우뚝 서 있다.

저기면 폭풍을 피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데 나무 밑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가 자꾸 움직였다.


“……사람이 있는 거 같아.”

“뭐라고?”

로저의 되물음에 대답 대신 나무 쪽으로 이동했다. 예고도 없이 내가 손을 끌자 두 소년은 힘을 쓰지 않고 따라왔다.

가까이 갈수록 저 앞에 있는 사람이 부인의 일행임을 확신했다. 끝까지 의심하고 따라왔던 로저도 확신이 생겼는지 내 옆에 붙었다.


“어머니! 유네!”

“……유릭?!”

이윽고 부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유릭은 내 손을 놓은 채 앞으로 달려갔다. 그 탓에 나와 로저가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저게, 말도 없이 손을 놔버리면 어떡해?”

로저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혼자 가버린 유릭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나무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저는 바람으로 인해 꼼짝 못 하는 날 흘끗 보더니 엉망 된 내 머리를 이마 위로 한 번 쓸어넘겼다.


“리제, 우리도 가자.”

“응!”

로저가 등을 밀어준 덕분에 무사히 나무에 도착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나무 안은 밖보다 안전하고 아늑했다.

고개를 돌리자 담요를 두르고 있는 유네가 고통에 괴로워하는 게 보였다. 호전되기는커녕 더 좋지 않은 유네의 얼굴에 유릭과 부인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온 거니? 리제, 로저!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부인은 유릭과 함께 이곳에 온 나와 로저를 발견하고 호통쳤다.


“그보다도 부인 다리가…….”

펜턴 부인 다리에 생긴 상처를 발견했다. 어딘가에 긁힌 건지 상처가 꽤 크고 깊어 표피 안이 다 보였다. 출혈도 많아 부인 신발까지 다 붉게 물들었다.


“난 괜찮다. 그보다도 어서 빨리 병원에 가야 할 텐데…….”

“지금 이 날씨로 병원에 못 가요. 어머니.”

“그럼 어떡하니? 유네가 많이 아파해.”

유릭은 유네의 이마를 만졌다. 열이 심각한지 유릭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별장으로 돌아가요. 언제 폭풍이 심해질지 모르는 지금, 이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에요. 유네의 몸도 비정상적으로 떨고 있고요.”

“하지만…….”

펜턴 부인은 나무에 기대 앉아 있는 마차꾼을 보았다. 한쪽 다리가 부러졌는지 마차꾼은 땀까지 흘리며 주저앉았다. 펜턴 부인 또한 상처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릭, 로저. 내가 부인을 부축할 테니까 너희들은 마차꾼을 도와줘.”

유릭의 말처럼 날씨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는 지금, 이곳은 믿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곳과 별장까지 거리도 멀지 않으니 유네의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맞다. 부인의 상처와 마차꾼의 다리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별장 어딘가에 의료상자가 있을 거다. 그걸로 다친 사람을 치료해야 했다.


“……그래. 별장에 가는 게 좋겠다.”

부인은 하늘을 가만히 보다가 결정했는지 업고 있던 유네를 하녀에게 넘겼다. 그리곤 내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제, 미안하구나.”

“아뇨. 당연한 일을 하는 건데요.”

로저와 유릭은 양쪽에서 마차꾼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걸었다.

한 번 지나쳤던 길이라 돌아가는 길은 그나마 수월했다. 우리는 옆으로 쓰러진 마차를 지나 요란하게 흔들리는 나무들도 지났다.

익숙한 길이라 하여도 마냥 편한 것도 아니었다. 도중에 다리를 잘못 짚은 마차꾼이 몇 번이나 신음을 내뱉었다. 놀라 걸음을 멈추면 마차꾼은 고통을 애써 참고 괜찮다고 말했다.


“전, 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가십시오.”

빗물인지 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것들이 마차꾼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그는 다친 다리를 땅에 딛지도 못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땅에 발등이 스치면 표정을 찡그리거나 신음을 삼켰다.

보는 사람마저 괴로울 정도다. 마차꾼이 얼마나 인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힘내요!”

유릭의 말처럼 저 앞에 우리가 떠났던 별장이 보였다. 걸음이 제일 빨랐던 하녀들이 유네를 안고 먼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 차례대로 나와 부인, 마지막으로 마차꾼이 들어왔다.


“하아.”

문을 닫자마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젖은 겉옷을 다 벗어냈다.


“유네는?”

부인은 밑층에 내려온 하녀에게 물었다.


“침대에 누워 계세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거 같아요.”

“상태를 봐야겠어.”

“제 어깨에 손을 두르세요. 어머니.”

부인은 유릭의 부축을 받으며 위층에 올라갔다.


“윽.”

옆에서 괴로움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부축을 받았지만 걸을 수 있는 부인과 달리 마차꾼의 상태는 심각했다.

벽에 등을 기대 아픈 다리만 유심히 보고 있는 마차꾼은 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마차꾼 앞으로 가 다리를 살피고 있던 로저가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상처는 어때?”

“부러지진 않고 어긋난 거 같은데.”

로저는 무릎 밑이 심하게 부어있는 마차꾼의 맨다리를 보았다.

그 외 깊은 상처나 까진 곳은 없었지만 원래 겉으로 볼 수 없는 아픔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나. 로저는 부은 곳에 손을 슬며시 얹었다. 마차꾼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역시 뼈가 나와 있잖아.”

“돌출되어 있다는 거야?”

내가 묻자 로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대로 손으로 뼈를 맞춰야 할 거 같아.”

“……누가?”

“응? 당연히 내가.”

로저의 당돌한 말에 나는 물론이고 가만히 있던 마차꾼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네? 뼈를 맞, 맞춘다고요?”

“그냥 한 번 이 악물고 참으면 되는데.”

말이 쉽지.

마차꾼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했다. 조금만 스쳐도 다친 다리가 알알해 죽겠는데 오늘 처음 본 열 살짜리 작은 소년이 접골은 한다고 한다.

나 같아도 기겁해 도망가겠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뼈를 맞춰도 한동안 움직이기 어려울 테니까 다리를 고정할 게 필요해.”

“……로저?”

“그러니까 나무판이랑 천을 가져와줘, 리제.”

“넌 뭐 하려고?”

“나? ……음. 어쨌든 나무판이랑 천 좀 가져와줄래? 부탁해.”

로저는 내 물음을 회피했다.

마차꾼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날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는 뜻이었다. 마차꾼의 바람대로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로저가 내 등을 떠밀었다.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정말, 정말 위험한 짓 하지 않을 거지?”

“아, 몇 번을 말해! 빨리 가!”

그 말을 믿고 자리를 떠났다. 나무판은 의외로 빨리 찾았고, 마지막으로 천을 찾기 위해 빈방으로 들어갔다. 방을 살필 필요 없이 작은 창문에 걸린 커튼을 빼냈다.


“아악!”

그때 현관 쪽에서 날카로운 마차꾼의 비명이 들렸다.


“으윽!”

얼마나 우렁찼을까. 화들짝 놀란 나는 커튼을 확 당겨 그냥 뜯어냈다.


“로저! 도대체 무슨 짓……!”

현관으로 가자 고개를 축 늘어트리며 숨을 씩씩거리는 마차꾼이 눈에 들어왔다.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은 방금 전과 똑같은데 표정은 왜인지 편안해 보였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조용히 다가가 마차꾼의 코 밑에 손가락 하나를 대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안 죽었어.”

로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 미쳤어?”

“오, 다 찾아왔네. 이리 줘 봐.”

“너 내 말은 듣고 있……!”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차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어,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로저가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제 안 아파요.”

“네?”

“다리가……이제 안 아픈 거 같아요.”

응?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무릎을 보자 툭 튀어나왔던 뼈가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진짜? 진짜로 뼈를 맞췄다고?’

로저가?

믿지 못해 로저를 보는데 그는 능숙하게 나무판과 천을 묶어 마차꾼의 다리를 고정했다.

편하냐는 로저의 물음에 마차꾼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로저는 마지막으로 아직 나아지지 않은 멍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멍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거예요.”

“네, 도련님.”

“다리가 더 부을 수도 있는데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애초에 심한 건 아니었어요. 저 정도 돌출은 보통 뼈를 직접 맞추는 게 빠르니까요. 병원에 가도 의사가 똑같이 했을 거예요.”

로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얘, 정체가 무엇일까?


“그나저나 리제, 의료상자는 어디 있어?”

“아, 식당 선, 선반에 있던 걸 봤어.”

“그걸 가지고 우리도 위층에 올라가자. 부인 다리도 치료해야 하잖아.”

로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느린 숨을 뱉는 마차꾼의 얼굴을 살폈다. 겉으로 보면 정말로 로저가 병세를 고친 듯싶다.


“정말……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네. 뼈를 맞출 때만 아팠지 지금은 괜찮습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전에 비하면 지금은 살 거 같아요.”

마법이라도 쓴 걸까? 아니면 최면이라도 건 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디 책에서 뼈를 맞추는 방법이라도 본 걸까?

하지만 책을 읽고 배운 것과 실제로 응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책 한 번 읽었다고 척척 해결하면 나는 진작 이 제국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되어있을 거다.


“야, 리제. 나 먼저 올라간다.”

“어디 불편하면 절 부르세요! 알겠죠? 같이 가! 로저!”

나는 로저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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