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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1) (38/47)


38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1)
2023.05.12.


윗층으로 올라가자 어제부터 계속 불었던 바람이 멎은 게 보였다. 탁한 색깔의 구름이 점점 개고 흐릿했던 하늘이 맑아졌다.


“바람이 또 불기 전에 의사를 불러야겠구나.”

부인의 말에 하녀들이 나갈 채비를 했다.


“부인, 다리에 약을 발라드릴게요.”

“나는 괜찮단다, 리제.”

“어머니, 상처가 벌어지면 그것도 큰일이에요.”

부인의 거절에 곁에 있던 유릭이 설득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의료상자를 들고 부인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자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고 출혈양도 많았다. 우선 상처를 소독한 뒤, 기름을 덕지덕지 발랐다. 내 손길이 따끔했는지 부인은 몸을 몇 번이나 움찔했다.


“네 동생은 좀 어때?”

“나아지질 않아.”

내가 치료할 동안 로저는 유네를 살폈다.


“노란 콧물도 계속 나오고, 코막힘도 있네.”

“열이 내려간 뒤에도 코가 자주 막혔고, 기침도 했어. 특히 코가 불편하다는 말을 많이 했지.”

“가래가 나왔던 적은?”

“가래 때문에 불편한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유릭은 유네의 증상들을 설명해주며 그녀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럼 축농증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의사가 그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단다.”

상처 치료가 끝난 부인이 로저의 말에 대답했다. 로저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살피고선 소매를 걷었다.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느릅나무 껍질이 축농증에 좋다고 했어요. 마침 저 앞에 있으니 껍질 좀 가지고 올게요.”

“뭐? 로저……!”

로저는 느릅나무 위치를 파악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 밖을 나섰다. 부인은 로저가 머물던 자리를 바라보다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째서 로저가 민간요법 등 이 분야에 박식하냐는 표정이었다.


“……음. 로저도 축농증에 걸렸던 적이 있었나 봐요.”

대충 둘러댔지만 정확히는 몰랐다. 축농증은 그렇다 쳐도 마차꾼 다리뼈를 맞춘 걸 생각하면 로저는 평소 의학에 관심이 있던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방에는 바이올린 악보밖에 없었다.

어느새 느릅나무 껍질을 따온 로저는 그 껍질을 잔에 넣은 후 따듯한 물을 따랐다.

순식간에 물 색깔이 노랗게 변했다. 로저가 물을 유릭에게 건네자 그는 유네의 허리를 일으켜 한 모금씩 차를 마시게 했다.

맛이 별로인지 유네가 괴로워했다.


“그래도 삼켜.”

“으.”

“어서.”

차를 다 마시고 유네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잔을 비웠음에도 유네 상태가 그대로라서 역시나 싶었는데, 시간이 흐르니 달라졌다.

불편했던 코가 나아졌는지 유네는 아까보다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코막힘이 호전되고 열도 내려갔다. 고통이 좀 가신 유네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이제 조금은 마음 놓고 의사를 기다릴 수 있었다.


“로저. 도대체 어떻게 한 거니?”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께서 의사셨어요. 주말에는 어머니를 따라 보육원에 봉사하러 다녔고요. 축농증은 자주 봐서 알 수 있었고, 뼈를 맞추는 건 어머니 전공인지라 배웠어요.”

살짝 웃던 로저가 말했다. 나는 매번 나에게 친절했던 바커스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세벨과 친한 친구로만 알고 있었는데 의사였다니! 몰랐다.


“왜 여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묻자 로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난 네가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지.”

“말은 안 해줬는데 어떻게 알아?”

“왜냐니. 어머니랑 마르센 부인이 같은 대학에 다녔으니까 말이야.”

“……어머니께서?”

더 충격적인 말에 생각이 멈췄다.

이세벨이 대학에 다녔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애초에 여성이 대학을 다니는 건 이곳 세계에서 드문 일이었다. 재능이 넘쳐나거나 한 분야에 뛰어나야지만 여성이 대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듣기로는 마르센 부인은 대학을 다니다 중간에 그만두었다 들었어.”

“……왜?”

“결혼 때문이지 않을까? 어머니 집안이 유명한 의사 가문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도 대학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을걸?”

왜 여태 몰랐을까.

중간에 나왔다고 해도 대학에 입학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세벨은 대학 얘기는커녕 자신의 전공에 대해 말한 적도 없었다.

아니, 말했다고 해도 내가 믿었을까? 이세벨은 부인이라는 칭호가 어울렸지 대학생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얘기하거나 자신보다 낮은 작위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대했다. 교수님 아래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근데……대학에 나왔다고?’

이세벨은 폴롱 자작 가의 장녀였다.

폴롱 저택에 몇 번 가보지 않았지만 목공 사업을 하는 회사임을 알고 있다. 원래는 규모가 작았지만 마르센 가문의 도움을 받아 한창 발전해 어느새 크게 성장했다고 들었다.

생각해보면 폴롱 가가 성장하기 위해선 마르센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니 양쪽 간의 결혼은 좋은 수였다.

대학을 포기하고 결혼한 배경도 이해가 갔다.

근데 왜 여태 학교에 가고 싶다는 내 목소리를 무시하고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빼앗았을까? 그녀도 지식인이었다면 배움을 추구하는 날 이해했을 텐데…….


“고맙다, 로저.”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고맙다. 너도 그렇지? 유릭.”

부인의 시선이 유릭에게 향했다. 그러자 유릭은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레 입술을 움직였다.


“……무척이요. 고맙다, 로저.”

끝까지 말하지 않을 줄 알았던 유릭이 로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 목소리에 이세벨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나도 유릭을 쳐다봤다. 나조차도 놀랐는데 로저는 오죽할까.


“야, 한 번 더 말해 봐.”

“두 번은 안 말해.”

유릭은 로저의 시선을 재빠르게 피했다.


 

* * *



“약을 가져왔으니 드시면 좀 괜찮을 겁니다.”

별장에 온 의사는 마차꾼 다리와 더불어 유네의 병까지 진단했다. 로저의 말대로 축농증이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계속 상태를 보고 싶지만 듣기로는 다시 폭풍이 올 거라는 말이 나와서요. 그래도 약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부인.”

“그래요. 바람이 불기 전 어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의사는 밖에 나가기 전 물을 자주 마시고 코를 자주 세척 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럼에도 호전되지 않으면 만성이 의심되니 병원에 가보라고 충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벌써 점심이네.”

일이 정리된 후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그런 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 즈음 호샤 마을로 가야 했지만 타고 갈 마차가 없다. 또 폭풍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부인은 걱정되니 내일 아침에 날이 완전히 괜찮아지면 출발하자고 얘기했다.

이제 캠프에 갔다는 거짓말은 들통난 것과 마찬가지다.


“……야, 리제.”

“왜?”

뒤에 있던 로저가 날 불렀다.


“지금 보러 갈래?”

“뭘?”

“바다.”

그 소리에 나는 곧장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렴.”

마침 아래층에 있던 부인이 방으로 올라가기 전 말했다.


“지금은 날씨가 괜찮으니까 말이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바다를 보고 오렴. 유릭, 너도 갈 거지?”

젖은 수건을 난간에 널고 있던 유릭이 대답 대신 재빠르게 겉옷을 챙겼다.

지금 아니면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로저도 나도 가방에서 겉옷과 장갑을 꺼낸 뒤 추위에 맞설 준비를 했다. 유릭은 그래도 불안한지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나가려 하는데…….


“자.”

“자.”

유릭과 로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됐어, 나 혼자 갈 수 있어.”

둘이 싸우기 전 먼저 별장 밖으로 나가 모래사장에 뛰어들었다.

비에 젖어 눅눅하고 축축한 모래가 무척 차가웠다. 어찌나 시린지 그 냉기가 신발을 뚫고 내 발등까지 전해졌다. 그래도 모래사장을 밟고 앞으로 가는 내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리제, 위험하니까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물이 차서 들어가는 건 더더욱 안 되고.”

내 옆까지 달려온 유릭이 걱정스레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쟨 바다에 발을 넣고 싶어 할걸?”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 표정에서 다 드러났는지 유릭과 로저가 날 붙잡았다. 아쉽게도 계획을 뒤로 미룬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떨어져 바다를 보았다.


“우와, 예쁘다.”

폭풍으로 인해 파도가 거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불순물이 한 번 빠져나간 것인지 바다의 색깔이 투명하고 고왔다. 밑에 있는 자갈색까지 보일 정도로 맑은 색이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는 듣기 좋았고 평온했다.

무릎을 숙여 바다 색깔을 자세히 보았다. 장갑을 벗어 물 안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다. 뼛속까지 얼얼한 게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나저나 어떡하냐. 어머니께서 분명 나한테 실망할 거야.”

로저가 내 평온함을 깨트렸다.


“어쩔 수 없잖아.”

유릭의 건조한 대답에 로저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다고? 나도 그렇고 리제도 엄청 혼날 텐데. 너, 앞으로 리제랑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보지 못한다고?”

유릭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참에 거짓말을 또 하는 게 어때?”

내 제안에 로저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 리제, 너 제정신이야?”

여러 번 한 거짓말, 또 못하라는 법 있나?


“로저. 원래 한 번이 어렵댔지, 두 번은 쉽다고 했어. 그러니 넌 할 수 있을 거야.”

“뭔 거짓말을 할 건데?”

“캠프에 가는 도중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래서 헤매고 있는데 마침 바다로 가고 있는 펜턴 부인을 만난 거지.”

“그래서?”

“이미 캠프 모임 시간도 지났고, 마을까지 꽤 멀리 왔으니 어쩔 수 없이 부인과 동행했고. 그 이후 폭풍 때문에 돌아올 수 없었다는 말만 솔직하게 말하면 돼.”

내가 설명을 끝내자 집중하고 있던 유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믿어주실까?”

“운에 달렸지.”

확률은 반반. 그냥 멍청하게 있다가 거짓말을 들통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았다. 문제는……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은 못 해. 거짓말.”

로저였다.


“로저, 넌 해야 해.”

“리제 말이 맞아. 이번에는 네가 희생 좀 해야겠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내 말보단 네 말을 더 믿는단 말이야. 로저.”

“너 하나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

나와 유릭이 번갈아 말하며 부탁하자 로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하,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나는 거짓말을…….”

“연습하자. 지금부터 연습하면 돼. 그래, 지금 한 번 거짓말을 해봐.”

“해보라고?”

로저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짓말을 찾았다. 몇 초가 흘렀을까, 로저의 입은 여전히 꾹 다문 채였다.


“너 정말 거짓말 잘 안 하는구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내가 말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참 애매하다.


“좋아. 그럼 난 어머니를 싫어한다. 라고 말해 봐.”

나는 자연스레 패륜을 가르치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도가 높은지 로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리제, 그 말은 나도 못 할 거 같아.”

유릭도 어려운 난도를 인정했다. 그래, 이건 너무 어려웠다.


“……음, 그럼 반대로 이건 어때?”

“이상한 거면 못해.”

“이상한 게 아니야. 난 리제를 좋아한다. 이걸 능청스럽게 말해 봐.”

좀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당장 생각나는 거짓말이 없다. 이것도 좀 어려운가 싶었는데, 로저의 표정이 갑자기 차분해지더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나는 리제를 좋아해.”

“…….”

“…….”

“……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로저의 말투가 자연스러워 진짜로 고백받은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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