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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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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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2)
2023.05.16.
정적을 깨트린 파도 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놀란 속마음을 감췄다.
“잘, 잘하잖아! 로저!”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뒷말을 삼켰는데 로저에게서 반응이 없다. 원래라면 뿌듯해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있을 텐데…….
조심스레 그를 보자 로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었다. 귓등까지 빨개진 얼굴은 툭 치면 터질 거 같다.
“리제, 나도 연습하고 싶어!”
“유, 유릭. 너도?”
“응. 하지만 널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니 다른 말로 해줘.”
유릭은 로저에게 핀잔을 주며 나와 그 사이에 껴들었다.
“……어, 어 그래. 뭐가 좋을까?”
연습할 필요가 없는 유릭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내 말을 기다렸다. 무엇이 좋을까 고민했지만 신경이 로저에게 쏠렸다. 로저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지 붉은 얼굴이 그대로다.
능글거렸던 로저가 저러니 나까지 민망했다.
“리제.”
유릭이 한 번 더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딴 곳에 정신이 팔린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 그만하자! 하루 연습한다고 거짓말을 잘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을 돌리자 유릭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또 폭풍이 오려는지 바람이 불어왔다. 잔잔했던 파도도 그 크기를 키워갔다. 몇 분 구경하지도 못했는데 별장에 도로 들어가야 했다. 내 아쉬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유릭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을 담그고 싶어 했지? 물이 차지만 잠깐이면 괜찮을 거야.”
“정말?”
내가 묻자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바꿀까 서둘러 신고 있던 부츠와 양말을 모조리 벗었다. 모래사장에 발등이 닿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유릭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걷자 파도가 내 발가락을 툭 치고선 뒤로 빠졌다.
“으앗! 차가워!”
“야! 조심해!”
생각보다 바닷물이 차가워 나도 모르게 기겁했다. 내가 몸을 버둥거리자 로저가 반대쪽에서 날 붙잡았다. 어김없이 내 중심을 잡아 준 로저는 피식 웃었다.
“고지식한 줄만 알았는데 은근 덜렁이잖아?”
“그런 면도 귀여운데.”
유릭의 말에 로저는 기겁했다.
“귀엽다고? 너 취향 참 독특하다.”
둘이 뭐라 하든 나는 물 안에 완전히 들어간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하얗던 발이 더 희게 보였다. 작게 보이기까지 했다.
“얘들아, 이제 들어오렴!”
저 멀리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발이 시려 황급히 물 밖으로 나왔는데 모래사장은 더 차가웠다. 이대로 양말을 신고 싶었지만 젖은 발이 찝찝했고, 맨발로 별장까지 가기에도 발이 얼 거 같다.
“으, 그냥 뛰어갈까?”
내가 발을 동동거리자 로저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어쩔 수 없이 두 신발을 들고 뛰어가려고 했다. 근데 유릭의 행동이 빨랐다. 유릭은 바닥에 있는 내 양말과 신발을 쥐어다 로저에게 던졌다.
“신발은 저 녀석한테 맡기고 리제, 내 등에 업혀.”
“뭐? 업, 업히라고?”
내가 되묻자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펜턴 가 장남 등에 업혀보겠어.”
망설이는데 로저가 비꼬았다.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 덧나나?
‘역시 아까 날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로저를 노려보고선 유릭의 등에 올라탔다. 내가 정말 유릭에게 업힐 줄은 몰랐는지 로저의 미소가 점차 흐릿해져 갔다.
“꽉 잡아, 리제.”
“응? 앗! 유릭! 너, 너무 빨라!”
유릭의 목을 꽉 안았다. 그는 내가 무겁지도 않은지 안정적인 자세로 뛰었다.
“야! 같이 가!”
로저도 뒤늦게 뒤따라 달렸다.
* * *
‘리제.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겠다면서 어떻게 또 거짓말을 할 수 있니? 너한테 참 실망했다.’
‘…….’
‘이제 용서하는 것도 지쳤구나. 나가렴. 넌 더 이상 마르센 가 자식이 아니야.’
“헉.”
이세벨의 단호한 말투에 눈을 떴다. 깜깜한 어둠과 적막함이 날 덮쳤다.
“…….”
뭐 이런 개 같은 꿈이.
식은땀이 절로 나는 꿈이었다. 입술을 떼기도 전에 등을 돌린 이세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멀어져가는 그녀를 따라가려 해도 늦었다. 손끝이 이세벨에게 닿기는커녕 턱없이 부족했다.
‘너한테 참 실망했다.’
이세벨의 말을 떠올렸다.
마음이 미어지기도 했지만 억울하고 분에 차기도 했다. 내가 이세벨에게 거짓말을 했듯 그녀 또한 나에게 숨긴 말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듣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건 용납 못 했다.
“……하아.”
마음이 복잡했다. 잠도 완전히 깼다.
아직 별장이었다. 원래 유네와 같은 방을 쓰기로 했지만 그녀의 병세가 나에게 옮을까 걱정했던 펜턴 부인께서 따로 방을 내주었다.
덕분에 혼자서 넓은 방은 물론 침대까지 차지했다.
“……?”
물이라도 마실까 일어나는데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에 누군가 있다. 한 명이 아닌지 발소리가 다양하다.
조심스레 문 앞에 다가가 열었다. 불빛 하나 없는 복도는 암흑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리제?”
앞에서 유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앞은 캄캄했다.
“유릭이야?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 바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바보? 로저도 있는 거야?”
“내 옆에 있어.”
로저의 인기척이 느껴지긴 했다. 유릭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어서 했다.
“이 녀석이 무서워서 혼자 못 간다고 난리를 피웠거든.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새가슴이었을 줄이야.”
“그, 그래서 불만이야?”
로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그렇다고 했지, 내가 언제 불만이라 했어?”
“계속 툴툴거렸잖아!”
“어머니께서 주무실 거야. 목소리 좀 낮춰.”
“이게……!”
둘이 꽤 많이 친해진 거 같았다.
“근데 리제, 왜 나온 거야? 잠이 안 와?”
유릭은 로저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쟤도 화장실 가고 싶은 거겠지.”
로저가 나 대신 답변했다.
“멋대로 추측하지 마, 로저. 내가 넌 줄 알아?”
“뭐? 리제. 생리현상은 당연한 거야. 너까지 툴툴거리지 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래층에서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꽤 늦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지금 빨리 자두어야 했다.
“어쨌든 우리 먼저 들어갈게. 너도 빨리 자.”
유릭은 로저의 옷자락을 끌고선 날 지나쳤다.
두 명과 얘기할 때는 괜찮았는데 혼자가 되어 버리자 마음이 무거웠다. 이대로 침대에 눕고 싶지 않았다. 넓은 방을 혼자 독차지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얘들아.”
내 목소리에 유릭과 로저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췄다. 둘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실 내가 좋지 않은 꿈을 꿔서 말이야. 그래서 혼자 자는 게 좀 무섭기도 하고.”
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같이 자면 안 될까?”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부탁하긴 했지만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다. 아직 우리가 어리긴 해도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자는 건 이상하다.
또 한평생 혼자 침대를 써본 도련님들이다. 둘이서 침대를 나눠 쓰는 것도 불편한데 한 명이 더 끼면 얼마나 어색할까.
“리제, 손잡아.”
“응?”
유릭은 대뜸 손을 뻗어 휘적거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로저도 남은 빈손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잡았다.
“자, 이제 가자.”
유릭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닥을 살피며 걷는 두 사내 모습이 꽤 심각했다.
복도가 어두워 아무것도 안 보이긴 해도 방향만 잘 잡으면 방까지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너무 느리지 않아?”
내가 말하자 로저도 유릭도 움찔했다. 이러다 방까지 몇십 분은 더 걸리겠다. 도대체 뭔 조심성이 이리 많은지…….
“좀 빨리 가면 안 될까?”
내 제안에,
“리제, 그러다 다치면 큰일 나.”
유릭도,
“맞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로저도 거절했다.
“화장실까지 어떻게 간 거야?”
진짜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놈 발걸음이 너무 느려서 가는 도중에 쌀 뻔했어.”
“너도 느렸잖아, 로저.”
내가 봤을 땐 둘 다 똑같다.
“안 되겠다. 내가 앞장설게, 잘 따라와!”
“뭐? 그, 그러다 다쳐!”
“야!”
둘의 손을 끌고 앞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당황한 두 소년이 몸을 허둥지둥했다. 그나마 잘 따라오는 유릭과 달리 로저는 발이 꼬인 건지 갑자기 확 넘어졌다.
“악!”
“헉, 로저? 괜찮아?”
“……씨, 그러니까 멈추라고 했잖아.”
로저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로저가 몸을 일으키길 기다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보이지 않으니 로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다친 거야?”
“…….”
“말 좀 해 봐, 로저.”
“……다리가 풀렸어.”
다리가 풀렸다니.
“새가슴.”
유릭이 한마디 했다.
로저도 창피한지 말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이를 어떡한담? 로저의 팔을 질질 끌고 갈 수도 없고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로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다리를 굽혀 등을 내밀었다.
“손을 뻗어서 내 등에 업혀.”
“……뭐?”
“사양하지 말고. 이때 아니면 언제 마르센 가 막내딸 등에 업혀보겠어?”
로저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나보다 키가 작았다.
“리제, 차라리 내가 저 녀석을 업…….”
“뭐라는 거야. 무서워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유릭의 입을 막은 후 로저의 행동을 재촉했다.
꾸물거렸던 로저는 결심했는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목을 둘렀다. 예상대로 로저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다리를 일으킨 나는 한 손을 내밀어 유릭의 손을 찾았다.
“로저는 날 꽉 잡고 유릭은 조심히 따라와.”
꼭 내가 이 둘의 엄마가 된 거 같다.
방향을 잡고 복도 끝에 있는 방까지 도달한 나는 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에 있는 환한 달빛으로 인해 방은 밝았다. 나는 침대까지 걸어 내 등에 고개를 묻은 로저를 살폈다.
“자, 이제 내려가.”
“으응.”
로저는 목에 두른 손을 놓고선 침대 위에 안착했다. 이제 드디어 잠을 잘 수 있는 건가.
근데 유릭이 안 보였다. 고개를 돌린 나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릭? 추운데 왜 거기 앉아 있어?”
유릭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넘어진 거 같지도 않고 다친 거 같지도 않다.
“리제.”
“……?”
“업어 줘.”
……응?
“다리가 마비된 거 같아.”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