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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3) (40/47)


40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3)
2023.05.19.



 


“다, 다리가 마비되었다고?”

“응, 못 움직이겠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의심했지만 유릭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마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놈이 무릎은 왜 꿇고 있어?”

침대를 독점하고 있던 로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저런 거짓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다며 나에게 무시하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만약 로저가 저랬다면 무시했겠지만 유릭은 달랐다.

유릭의 말을 무시하는 건 어려웠다.


‘어떡하지?’

뻔한 거짓말에 속아줄까, 아니면 잔소리할까.


‘그래, 한 번 져주자.’

유릭이 매번 저러는 것도 아니고.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자 생각하며 무릎을 굽혔다.


“자, 업혀.”

유릭 앞에 앉아 등을 내밀었다. 그러면 유릭은 좋다고 업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여서 참다못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안 올라탈 거야?”

“리제. 생각해봤는데.”

뭘?


“너한테 내가 무거울 거 같아.”

그걸 이제 알았니.


“그러니까 나 대신 리제 네가 업히는 거야.”

뭐?

마비가 되었다고 당당하게 외쳤던 것과 달리 유릭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뻔뻔한 유릭의 태도에 잠시 얼이 빠져 있는데 그가 내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유릭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나의 두 다리를 들었다. 순식간에 내 몸이 허공에 떴다.


“잠, 잠깐……!”

“움직이면 넘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꽉 붙잡아.”

불안했다. 예감대로 유릭은 나를 안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문제는 이게 시초에 불과했다는 거다.


“잠, 잠시만! 으아아악! 유릭! 어지러……!”

“더 세게 돌릴까?”

유릭은 나를 안고 몇 바퀴를 더 돌았다. 그래도 부족한지 그는 방 한 바퀴를 크게 돌기도 하고 내 몸을 위로 던졌다. 몸이 제어가 안 되는 느낌에 눈이 질근 감겨졌다.


“으하하! 리제, 표정 봐!”

“시끄……으악!”

무서워 죽겠는데 구경하고 있던 로저는 웃어댔다. 웃지 말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저 큰 웃음소리 때문에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가 더 울리기까지 했다.


“유릭! 그, 그만!”

유릭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자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유릭의 얼굴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한참을 더듬었던 손이 유릭의 얼굴에 딱 닿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유릭의 뺨을 몇 번이나 툭툭 쳤다. 유릭이 멈추지 않았다.


“야! 그만하라고!”

유릭의 볼 한쪽을 잡아 길게 늘어트렸다.


“아파! 리제!”

따가움에 유릭이 속도를 내지 못하자 이 틈에 나머지 한쪽 볼도 세게 잡았다. 유릭은 정말로 아픈지 중심을 잃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도 유릭의 품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놓는 게 좋을 거야!”

“미, 미안. 많이 어지러웠어?”

“이게.”

진짜로 몰라서 묻나.


“내려줄게, 리제! 다치면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 줘. 응? 다치면 아프잖아.”

유릭은 날 막 다루었던 것과 달리 차분하게 침대 위에 내 몸을 내려놓았다. 힘없이 침대에 쓰러진 나는 어지러움에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지금 보이는 천장의 무늬가 두세 개로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야, 괜찮냐?”

불쑥 나타난 로저의 얼굴이 천장을 가렸다. 이게 바로 완벽한 ‘병 주고 약 주고’구나.


“방금까지 좋다고 웃어댔으면서 웬 걱정.”

“난 웃기만 했어. 널 괴롭힌 건 저 녀석이라고.”

로저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신날 때는 언제고 유릭은 반성하는 건지 침대 앞에 공손히 있었다. 내가 화가 많이 났을까 쩔쩔매는 것도 눈에 다 들어왔다.


“리제, 미안해. 난 그저 널 기쁘게 해주려고……. 화가 풀릴 때까지 날 더 꼬집어도 좋아.”

저렇게 침울해 있으면 또 내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유릭은 알고 있는 걸까?


“됐으니까 옆에 와서 누워. 춥잖아.”

“응.”

말 끝나기 무섭게 유릭이 쪼르르 다가와 내 옆에 누웠다.

큰 침대였기에 어린아이 세 명이 들어가긴 충분했다. 오순도순 모여 누운 우리는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에 한 번 깨서인지 새벽인데도 눈이 쉽게 감기지 않았다.

다행히 어지러움이 금방 가셔 속이 괜찮아졌다. 화가 난 것도 풀려 유릭과 로저에게 남아 있던 악감정도 사라졌다.


“……많은 일들이 있었네.”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로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로저 바커스 덕분에 일이 좀 해결되었지.”

로저는 아까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게 얄밉긴 해도 맞는 말이었다.


“그걸 네 입으로 말하네. 민망함도 모르고 말이야.”

유릭이 비꼬았다.


“아까 나한테 고맙다고 말한 녀석이.”

“그래. 너 때문에 내 동생이 나아졌어.”

두 번은 인정 안 해줄 줄 알았던 유릭이 로저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로저도 저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더 말을 놀리지 않았다.


“근데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 어머니를 포함해 어머니 집안이 다 의사 출신이라며.”

호기심에 내가 물었다.


“어렸을 땐 그랬지. 그래서 의학과 예술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나는 바이올린이 더 잘 맞더라고.”

수술 도구를 잡고 있는 로저를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어색했다. 내 눈엔 로저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릴 거다.


“그리고 난 바이올린에 재능이 아주 많으니까.”

“그렇긴 하지.”

“이래서 재능이 많은 것도 문제라니까. 마음 같아서는 두 개 다 하고 싶지만 몸이 안 따라주니. 그래서 결국엔 더 재능 있는 걸 선택했어.”

말문이 트였는지 로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꿈에 대해 더 말했다. 그는 저번에 말했듯이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유명세와 즐거움 중 무언가를 택할 거냐는 질문에 당연히 즐거움을 택하는 걸 보면 참 그 나이대 같았다.


“그럼 유릭, 너는 꿈이 뭐야?”

“꿈?”

유릭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로저처럼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유릭의 꿈이라.’

유릭은 펜턴 가의 후계자로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진 사람이었다. 책에서도 유릭은 자연스럽게 펜턴 가를 이어받지 않았나.

그러니 유릭이 꿈을 자유롭게 꾸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환경. 귀여운 취향을 숨겨야 하는 것도 다 그 탓이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 펜턴 가의 후계자가 되어 펜턴 가를 크게 성장시키는 것 말고는…….”

역시나.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검을 잡고 싶어.”

“검? 검술을 말하는 거냐?”

로저가 묻자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부모님께서 뭐라 안 하셔?”

“말리진 않아. 근데 내가 기사가 되고 싶다고 주장하면 말리시겠지. 나 말고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없는 이유도 있고, 지금은 평화롭다고 하지만 전쟁이 나면 기사는 무조건 전장에 서야 하니까 말이야.”

유릭은 그로 인해 고심이 많아 보였다.


“기사가 되고 싶다면 역시 바이올렛 기사단에 가고 싶은 거겠지?”

로저의 물음에 유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명예롭고 이름있는 기사단을 말하라고 하면 모두 바이올렛 기사단을 말할 거였다.


“이제 내 얘기는 했으니 리제, 네 얘기를 해줘.”

“리제? 쟤는 보나 마나 체스 챔피언이겠지.”

유릭과 로저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꿈이야 항상 가득했다. 이세벨이 내 책을 빼앗을 때, 그녀가 다음 날 책을 돌려주었으면 했다. 아버지가 날 마르센 가에 내쫓으려 할 때는 다음 날 그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나에게 사과했으면 했다.

그렇듯 나는 내 앞에 닥친 위기를 넘기는 꿈을 꿨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하지만 장래는 달랐다.


“체스 챔피언이 되고 싶은 거 아니었어?”

내 대답이 의외라는 듯 로저는 놀라워했다.


“그건 목표야. 내가 꼭 이루어야 할 만한 목표.”

“그럼 십 년 뒤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상상해본 적 있어?”

유릭이 구체적으로 묻자 나는 또 신중히 생각했다.


“십 년 뒤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감도 안 잡히지만 하나만은 변치 않았으면 좋겠어.”

달이 구름이 가려졌는지 방에 들어왔던 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뒤덮었지만 서로의 온기는 그대로였다. 아주 미세한 접촉에도 우리 셋은 몸을 움찔했다.


“뭔데?”

“음. 그때도 지금처럼 너랑 로저와 친구였으면 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웃으며 말했는데 오히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유릭, 너는 알고 있을까? 책의 내용과 너의 삶이 평행하게 흘러가는 거라면 십 년 뒤, 넌 날 죽음으로 밀어 넣을 거야.


“흥, 십 년 뒤에도 친하겠지.”

로저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사람 마음은 항상 변해.”

“불안하면 약속할까?”

로저와 내 고개가 유릭 쪽으로 돌아갔다.


“십 년 뒤 말이야. 오늘이 2월 23일이니까 딱 십 년 뒤,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정각 12시. 겨울 정원에서 셋이 서 만나는 거지. 어때? 아무리 전날에 대판 싸웠다고 해도 꼭 와야 해.”

“그래도 안 오면?”

로저가 물었다.

약속을 잊을 수도 있고, 다른 친구에 비해 초라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사이가 완전히 좋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다 안 오면 어떡할까.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는 강력한 해결방안이 필요했다.


“음.”

곰곰이 생각해도 마땅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보복이 더 낫지 않을까?


“아, 안 온 사람의 저택이나 일터에 찾아가는 게 어때? 그리고 오지 않았던 이유나 오해했던 일을 그 날 다 풀어버리는 거지.”

무작정 찾아가는 것이 그 보복이다. 내 의견에 모두 고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승낙했다.


“좋아, 그럼 이 약속은 절대 깰 수 없는 거야. 알겠어? 특히 고지식한 리제하고 펜턴, 네놈은 꼭 명심해.”

나는 오히려 로저가 약속을 깰까 봐 걱정했는데. 이 생각을 솔직하게 내뱉으려다 꾹 참았다. 유릭이 허공에 팔을 쭉 뻗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냐?”

로저가 묻자 유릭은 자신처럼 팔을 올리라고 손짓했다. 얼떨결에 팔은 든 로저에 이어 내 팔도 위로 올라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새끼손가락 내밀고 약속하자.”

과연 십 년 뒤 이 약속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보복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다 약속을 잊어버리면 끝나버리는 거였다.

구름에 의해 가려졌던 달이 드러났다. 어둠이 걷어지자 제일 높은 곳까지 뻗어 있는 새끼손가락 세 개가 나타났다. 작고 아기자기한 손가락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다.


“리제, 네가 약속해줘.”

유릭이 속삭였다.


“……그러면 정말로 십 년 뒤에 꼭 만나자. 절대로, 절대로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내 말에 양옆에 있는 소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뒤, 2월 23일.

리제 마르센,

유릭 펜턴,

로저 바커스.

우리 셋은 후에 있을 소중한 만남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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