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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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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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8장. 거짓말은 불행을 부른다 (4)
2023.05.23.
“으……음!”
“리이제……안, 안 돼.”
양옆에서 난리가 났다.
‘여기서 자겠다고 한 내 죄지.’
얌전히 일자로 손을 포개어 자는 나와 달리 로저는 몸을 자주 뒤척였고, 유릭은 헛소리를 열심히 했다.
“아오, 떨어져.”
“으!”
로저는 코알라처럼 내 옆에 찰싹 붙었다. 발로 옆구리를 밀어도 시간이 지나면 상태는 전과 같아진다.
“왜 자꾸 끙끙거리는 거야? 무슨 악몽이라도 꾸나?”
로저는 그렇다 쳐도 유릭은 어찌나 끙끙 앓던지 나는 몇 번이나 일어나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지쳤다.
나는 로저를 유릭 옆으로 밀어두고 침대 끝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추워 이불을 끄집어 당기려 했는데 잠버릇이 험한 로저가 다리 하나를 이불 위에 올렸다.
“망할 로저.”
잘 때는 어찌나 힘이 센지 이불을 끄집어당겨도 로저의 다리가 굳건히 버티고 있다.
결국 이불도 포기했다. 베개도 없었다.
잠은 잘 수 있을까. 불안과 다르게 오늘 하루 피곤했던 탓인지 눈이 감겼다. 몸이 추워 깊게 자지 못했지만 꽤 달콤했다.
* * *
“악! 너, 너 뭐야!”
“내가 할 소리야!”
옆에서 시끄러운 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무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뜨자 환한 빛이 시야에 파고들었다. 아침인지 창문 너머로는 새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내가 왜 너랑 붙어 있는 거냐고!”
“뭐? 난 가만히 있었는데 네가 붙은 거잖아.”
“내가 잠결에 붙었다고 해도 넌 그런 날 끌어안았잖아!”
“그, 그건 네가 리제인 줄 알고……!”
자면서도 시끄럽더니 눈을 뜰 땐 더했다. 둘은 지치지도 않은지 일어나자마자 티격태격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았지만 침대가 자꾸 흔들렸다. 사소한 말다툼이 사소한 몸싸움으로 번졌는지 둘이 베개를 들고 싸웠다.
‘얘들아, 제발…….’
잠 좀 자자.
여기서 자는 건 글렀고 지금이라도 당장 내 방으로 돌아가야지, 안 되겠다.
“힘, 힘이 왜 이렇게 세……앗!”
“……?”
허리를 일으키자마자 그림자가 생겼다. 고개를 들자마자 로저의 등이 내 얼굴을 덮쳐왔다. 베개싸움에서 힘으로 밀린 로저가 중심을 잃은 거였다.
충돌을 피하려고 몸을 옆으로 굴렸지만 늦었다. 뒤늦게 내 위기를 알아챈 유릭은 팔을 뻗어 로저의 옷자락을 잡았다.
-쿵!
빌어먹을.
“……야. 괜찮냐?”
“리제. 어디 안 다쳤어?”
결국 나 혼자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잠도 완전히 깼다.
나는 침대 위에 있는 유릭과 로저를 쏘아보았다. 둘은 화가 잔뜩 난 날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긴말하지 않을게.”
“…….”
“…….”
“두 손 들어, 둘 다.”
* * *
유릭과 로저는 사고도 잘 쳤지만 그만큼 말도 잘 들었다. 홧김에 두 손을 들라고 했지만 진짜로 둘이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들 줄은 몰랐다.
이제 혼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애초에 누구를 혼내 킨 적이 있어야지.
“어깨만 쑤시네.”
밤새 웅크리고 잔 탓에 어깨가 아팠다. 그 어깨로 침대 밑에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가만히 있어도 쿡쿡 쑤셨다.
“리제. 잠 못 잤어? 많이 피곤해 보여.”
“유릭. 양심 있으면 입 다물고 있어.”
“……어깨가 쑤시면 내가 주물러줄까?”
그건 좀 솔깃했다.
“좋아. 유릭 너는 팔 내리고 내 어깨 주물러 줘.”
“뭐? 그럼 나도!”
“로저. 넌 얌전히 있고.”
“칫.”
로저는 슬쩍 내리던 팔을 다시 올렸다. 그사이 내 등 뒤로 온 유릭은 어깨를 주물렀다.
저번 유릭이 내 어깨를 주무를 때와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유릭의 손이 매운 탓에 어깨가 무척 아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충분히 손에 힘을 뺀 후 적절한 강도로 시원한 곳만 노렸다.
“어때?”
“시원해…….”
“여기는?”
“어떻게 시원한 곳만 파고드는 거야?”
“최근에 책으로 공부……는 아니고 그냥 여기를 주무르면 시원할 거 같아서.”
책으로 공부했구나.
만족해하며 유릭의 손맛을 느끼는데 그의 손이 목 가까이 옮겨졌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 아파!”
“미안! 괜찮아?”
“으.”
“이, 이상하네. 책에서는 분명 힘을 줘도 그다지 아픈 곳이 아니라고 했는데.”
유릭이 고통스러워하는 날 보며 걱정했다. 역시 책으로 공부한 게 맞았구나.
“으, 아파.”
“그러니까 누가 침대 끝에서 웅크리고 자래? 다 자기 탓이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내리지 않고 있던 로저가 말했다. 이게 다 누구 탓인데!
“로저.”
내가 로저를 노려보자 그는 흠칫하더니 팔을 더 위로 곱게 뻗었다.
“왜. 맞, 맞는 말이잖아.”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자꾸 달라붙으니까 그런 거잖아!”
“뭐?”
내 말에 유릭은 매서운 눈매로 로저를 노려봤다. 로저는 당황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가 달라붙었다고 그래?”
“너! 너 말이야! 로저 바커스! 아주 좋다고 끌어안던데? 발로 차고 손으로 밀어봐도 내 옆에 오고!”
“…….”
“저 자식이……. 리제, 말만 해. 이참에 저 바보가 정신 좀 차리도록 손쓸게.”
유릭은 정말로 로저의 정신머리를 고쳐 줄 생각인지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유릭의 모습에 로저는 지레 겁먹더니 벌떡 일어섰다.
“제기랄! 난 억울해!”
“거기 서!”
로저가 문밖으로 달아나자 유릭은 그를 뒤쫓았다. 아침부터 아주 활기찬 게 참 건강해 보였다.
‘됐다. 내가 뭘 바라겠어.’
무섭다고 저들과 같이 잔 내가 죄지.
대충 침대를 정리하고 씻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복도를 가로지르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언니!”
유네였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뛰어오더니 나에게 안겼다.
“유네?”
“언니, 안녕! 잘 잤어?”
“이제 몸은 괜찮은 거야?”
내 가슴에 고개를 비비는 유네를 살폈다. 어제만 하더라도 진짜 유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마음을 떨었을까. 그녀는 아팠던 때와 달리 지금은 몸이 괜찮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괜찮아! 선생님께서 잘 진료해준 덕분에 나았어. 그 이상한 물은 맛없었지만 말이야.”
이상한 물은 느릅나무 껍질로 만든 차를 말하는 거 같았다.
“정말 다행이다.”
“응. 의사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거야.”
유네는 어제 로저가 민간요법으로 치료해 준 걸 모르는 걸까.
“선생님도 그렇지만 어제 로저가 널 낫게 했어.”
“……응? 누구?”
로저 얘기에 유네가 웃음기를 싹 지웠다.
“로저 말이야. 부모님 중 한 분이 의사셔서 로저도 민간요법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나 봐.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괜한 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네가 내내 로저를 어색해하는 게 마음에 걸려 얘기했다.
유네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부터 로저를 보면 유네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그저 낯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유네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로저가 불편해?”
유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가 좀 예민하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알아.”
“성질이 있어도 막 너한테 못되게 굴 아이는 아니고.”
“……응.”
“솔직한 면이 있지만 가끔 보면 도움이 될 때도 있어. ……아마.”
의도치 않게 로저를 변호하고 있었다. 말하면서도 양심이 찔렀다.
“응, 알고 있어.”
유네는 토 하나 달지 않고 알고 있다고만 말했다.
“근데 왜 로저를 피하는 거야?”
“……잘생겼어.”
응?
“뭐라고?”
“잘생겼어.”
“누가?”
“그……오빠 말이야.”
“유릭? 유릭이 잘생겼긴 했지.”
“아니, 오빠 말고.”
“……그럼 나?”
“언니도 말고.”
유릭도 나도 아니라면……설마 로저 바커스?
유네는 수줍은 듯이 웃었다.
경악한 나는 입술을 서서히 벌렸다. 얼굴만 따진다면 로저 바커스는 날렵하고 뚜렷해 잘생기긴 했다.
입만 다물면.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면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처음 로저를 보았을 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의 실체를 몰랐을 때지 않았나.
유네도 로저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유네 앞에서 유릭과 자주 충돌했고, 로저는 자신의 성격과 비꼬는 말투를 유네 앞에 드러냈다.
근데 왜? 천사 같고 인형 같은 유네가 왜?
“잘생겼으면 유릭도 잘생겼잖아.”
“우리 오빠 말이야? 우리 오빠가 뭐가 잘생겼어?”
유네가 또 망언을 내뱉었다. 그녀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못생기진 않았잖아?”
“못생겼어! 로저 오빠는 잘생겼고!”
취향 참 독특하다.
때마침 유릭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로저의 비명이 들렸다. 괴한 소리에 유네는 놀라기는커녕 눈을 반짝거리며 난간 밑에 있는 로저를 쳐다봤다.
……뭐 이런 경우가.
“얘들아!”
그때 별장 밖에 있던 부인이 나타났다.
“곧 출발할 테니까 이제 준비하렴!”
* * *
폭풍이 지나간 날씨는 맑고 깨끗했다.
‘……유릭과 로저가 거짓말을 잘해야 할 텐데.’
마차에 오른 지 두어 시간 정도 지났다. 조금만 가면 마을에 도착하는지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 온 거였다.
내가 캠프에 가지 않았음을 알아챈 이세벨은 지금 즈음 무엇을 하고 있을까. 화가 많이 난 것은 물론 하녀들을 시켜 온 마을을 뒤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와 반대로 날 찾지 않고 저택의 문을 걸어 잠글 수도 있다.
둘 다 최악이었다.
마차가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인해 다리가 떨렸다. 혹시 몰라 펜턴 부인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무거운 마음이 나아지질 않았다.
“마을에 도착했구나.”
펜턴 부인이 말했다. 먼저 도착한 마을을 다름 아닌 바커스 저택이 있는 로스코프 예술가 마을이었다.
마차가 바커스 저택에 도달하는데 그 앞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어머니?”
일어난 로저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고통이 아니었다.
바커스 부인 옆에는 이세벨도 서 있었다. 그들은 저택 앞에 오는 마차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부인들 앞에 도착한 마차 문이 열렸다. 나와 로저는 고개를 숙여 조심스레 마차 밖으로 나왔다.
“어, 어머니.”
“저, 저기 다, 다녀왔어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손을 모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우리의 모습만을 훑어보고 있다. 침묵이 불편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다.
“안녕하세요, 마르센 부인. 바커스 부인. 애들에게 사정을 들었어요.”
우리를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펜턴 부인이 말을 이어 했다.
“이런 일로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해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원래 어제 저택에 올 예정이었지만 사정이 있었어요.”
“오랜만이군요, 펜턴 부인. 그리고 운이 참 좋아요. 이제 막 바커스 부인과 실종신고를 하기 위해 관리에 가려고 했거든요.”
이세벨의 낮은 어조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날카로웠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날 보았다.
“어제는 새벽까지 아이들을 찾았어요. 바커스 부인께서는 밤새 울어 눈이 부으셨고요. 하녀들은 모든 일들을 뒤로 밀어두고 인근 마을까지 다리가 부러지도록 돌아다녔죠. 우편을 전달하러 온 사내의 가방을 몇 번이나 뒤지기도 했어요.”
“…….”
“그것뿐일까요? 캠프 관리인에게 가 협박도 했어요. 오랜만에 교수님 저택을 찾아가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는데 괜한 짓이었네요.”
“저, 어머니! 그건 다 사정이……!”
죄책감에 소용없는 거짓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세벨의 손이 더 빨랐다. 그녀는 내 가방을 가로채더니 안에 있는 물건들을 탈탈 털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캠프에 관련된 물건이 하나도 없구나.”
큰일 났다.
“부인, 잠시 진정하시고 이건 다 제가…….”
“펜턴 부인. 부인이 끼어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세벨은 펜턴 부인의 말을 단호하게 끊은 뒤 나의 팔을 잡았다.
“부인께서도 분명 리제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겠죠. 그러니 앞으로 부인이 리제의 얼굴을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머니! 잠, 잠시만요!”
이렇게 화가 난 이세벨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내 팔을 억지로 끌고선 마르센 가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차에 갇힌 나는 유릭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잠시, 이세벨은 커튼으로 창밖을 가렸다.
마차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