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 9장. 좋아해 (1) (42/47)


42 # 9장. 좋아해 (1)
2023.05.26.



 
약 이 주째다.

무인도에 조난된 로빈슨 크루소처럼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날짜를 표시하곤 했다.

나는 이 주간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방에서도 쉽게 나가지 못했다. 식당이나 화장실 경우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만 그 이상 선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


‘나이트 세 개, 킹 하나로 체크메이트를 만드는 연구도 질렸어.’

그나마 체스로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내 평생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체스를 둔 적이 있었을까. 어제는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체스로 할애했다.

하지만 이제 체스 두는 것도 지쳤다.


‘이 주 정도 지났으니 이제 이세벨 화도 풀리지 않았을까?’

요 이 주간은 정말 이세벨 눈치만 보며 살았다. 몰래 밖에 나가거나 뻔뻔하게 행동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던 건 이번 일이 명백히 내 잘못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을 넘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근데 이 주 정도 지났으니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어이, 리제! 죄수번호 20601!”

“간식을 가져왔으니까 어서 문을 열어라. 죄수번호 20601!”

방문 너머 쌍둥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앞으로 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어? 진짜 열었네?”

“그러게.”

내 모습에 쌍둥이들 표정이 멍해졌다. 나는 실케 손에 있는 빵 한 덩어리를 가로채 입 안에 넣었다.


“리, 리제! 아니, 죄수번호 24601! 어디 가?”

스웰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려는 날 붙잡았다.


“죄를 청산하러.”

“……뭐?”

 

* * *



“그래, 왜 왔니?”

“……죄송해요.”

“뭐가 말이야?”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고 걱정을 끼쳐 드린 거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마르센 가에서 십 년을 보낸 지금 터득한 한 가지 지혜란, 굽힐 때는 굽혀야 이득을 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굽힐 때였다.


“로저를 꼬드긴 것도 반성했어요. 이 때문에 바커스 부인도 로저 걱정을 많이 했으니까요. 다시는 어머니와 바커스 부인께 거짓말하지 않겠어요. 또 바커스 부인께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어요.”

고개를 있는 힘껏 숙였다.


“나는 그렇다 치고 바커스 부인한테는 진심을 담아 직접 사과하렴.”

“그럼 로저와 바커스 부인을 보러 가는 걸 허락해주시는 건가요?”

반색하며 묻자 이세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가만히 있으면 돼. 그들이 오니까.”

“네?”

“리제,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바커스 부인이 내일 로저를 데리고 마르센 가로 찾아오고 싶다고 했거든.”

갑자기?

바커스 부인께서 내게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정말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니?”

아뇨!

무엇이 되었든 나한테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긴 거다. 앞으로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로저를 볼 수 있다.

이세벨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날 물끄러미 보았다.


“실리는 더러운 아이를 제일 싫어하니 옷이나 좀 갈아입으렴.”

“아. 그렇네요.”

삼 일간 옷을 갈아입지 않아 옷 색깔이 칙칙했다.


“넌 연한 색이 잘 어울리니 연한 색 드레스를 입는 게 좋겠구나.”

“네, 감사해요. 어머니!”

“……이제 나가 봐.”

방 밖으로 나가자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온 펠리시아와 버나드가 보였다. 펠리시아는 오랜만에 현관에 모습을 비친 나온 날 보며 피식 웃었다.


“드디어 어머니께서 용서해 주신 거야? 리제.”

“응. 그리고 로저가 온대!”

“……로저?”

아래층에서 로저가 누구냐며 묻는 펠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옷장을 열고 나는 내일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했다.

* * *

하루가 지나자 추위가 완전히 가셨다.

싹이 돋아났던 것들도 이제 꽃잎을 펼쳤다. 푸른 빛으로 도배 된 환경과 활기가 돋은 마을처럼 마르센 가 저택에도 새로운 계절에 맞게 변화를 주었다.

곳곳에 화분을 두었고, 정원에는 새로운 꽃들을 심어 색을 추가하였다.

스웰과 실케는 밖에서 자주 돌아다니며 신나게 뛰어놀았지만, 가제보 밑에 있던 펠리시아와 버나드는 곧 있을 테스트 준비로 머리를 붙잡았다.


“실케, 스웰! 너희들 때문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니까 뛰지 마!”

“그럼 들어가서 공부하면 되잖아!”

“저것들이……!”

펠리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날 보았다.


“……리제, 「겨울」이 고대어로 뭐야?”

“앗! 그거 나도 궁금했는데!”

펠리시아에 이어 문제 앞에 가로막혀 있던 버나드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발음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어떻게 쓰는지 궁금한 거야?”

“둘 다.”

그리고 나는 곧 이곳에 올 로저를 기다리고 있다.

로저는 마르센 저택에 삼 일간 머물 것이라 했다.

방문 원인에 대해 알아보니 갑작스럽게 잡힌 공연 스케줄로 제자들이 연습실을 구하지 못하자 로저의 아버지가 선뜻 저택을 내줬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위해 바커스 부인과 로저가 저택을 나온 거다.

이 사정을 들은 이세벨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예 삼 일간 마르센 저택에 머물 것을 제안했다.


“발음대로 쓰면 안 돼. 가운데에 새는 소리가 들어가서 중간에…….”

“아가씨!”

한참 펠리시아와 버나드에게 설명 중인데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커스 부인과 도련님께서 오신 거 같아요.”

그 둘이 도착했는지 하녀들이 분주해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형제들도 새로운 인물들의 얼굴이 궁금했는지 내 옆에 철썩 붙었다.

곧 바이올린 케이스를 등에 쥐고 있는 로저의 모습이 보였다.


“리제!”

로저는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와 같이 활발한 로저 모습에 나는 걱정했던 마음을 쓸어내렸다. 바커스 부인께 혼이 잔뜩 나 거짓말을 꼬드긴 나에게 화가 많이 날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로저에게 손을 흔들려 했는데 펠리시아와 실케가 내 팔을 붙잡았다.


“리제, 쟤가 로저 바커스라는 애야?”

“으응.”

펠리시아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케가 눈알을 부라렸다.


“말이랑 다르잖아! 엄마만 찾는 바보 같은 놈이라며!”

“사고만 치고 다니고 눈치 없는 귀찮은 녀석이라 했잖아! 나이에 맞지 않게 꾸미기도 좋아해 이상하다며!”

그,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쉬이. 당사자가 오니까 이제 조용…….”

“근데 뭐야, 잘생겼잖아!”

“실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 보라색 눈동자 좀 봐!”

유네도 그렇더니 실케와 펠리시아 마저 로저가 잘생겼다고 말했다. 내 눈엔 그저 예민하고 고집 센 마마보이로 보일 뿐인데.

그렇다고 저 둘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저 둘은 유릭을 경계해도 외모만큼은 하늘에서 갓 내려온 천사 같다며 칭찬했다.


“쳇, 뭐가 잘 생겼다는 거야? 그냥 성질 좀 부릴 거 같이 생겼구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스웰과 버나드는 여자 형제와 의견이 달랐다. 그래놓고선 로저를 경계하는 듯 흘끔 쳐다봤다.

어느새 내 옆에는 언제 나온 건지 이세벨이 서 있다. 그녀는 바커스 부인과 마주치면 바로 사죄부터 하라는 듯 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눈치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잘 지냈니? 리제.”

사죄를 하기도 전 다가온 바커스 부인이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나에게 화가 잔뜩 날 줄 알았는데……. 이미 그 일에 대해 잊은 건지 평상시와 똑같은 다정한 말투와 표정이다. 그 덕분에 나는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이세벨.”

“어서 와요.”

그 뒤로도 나는 쉽게 입술을 떨어트릴 수 없었다. 바커스 부인과 이세벨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레 저택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멍하니 저 둘의 뒷모습을 보는데 로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리제, 오랜만.”

“잘 지냈어?”

“그냥 그랬지. 형제가 많다고 들었지만 정말 많네?”

“어? 어.”

로저는 내 주변에 있는 형제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형제들은 어서 로저에게 자신들을 소개해 달라는 눈빛을 나에게 은밀히 보냈다.


“사실 한 명 더 있어. 로드니라고 하는데, 지금은 기숙사 학교에 있지. 어쨌든 장녀인 펠리시아부터 소개하자면…….”

“뭘 소개까지 해? 내가 먼저 인사하면 되지. 안녕하세요. 리제 친구인 로저 바커스라고 해요.”

로저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형제들을 보며 인사했다.


“아, 반, 반가워! 난 펠리시아 마르센이라고 해!”

형제들도 이때가 기회다 싶어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이와 이름만 대충 말해주면 될 걸 그들은 자신의 특징부터 시작해 취미까지 세세히 늘어놓았다. 로저는 예의상 가만히 들었지만 한쪽 눈썹은 이미 삐딱해졌다.

마지막으로 실케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저가 내 등을 떠밀었다.


“네. 다들 잘 부탁해요. 그럼 리제, 이제 저택을 소개해줘!”

“뭐? 밀, 밀지 마!”

얼떨결에 저택에 들어왔다. 마르센 저택은 화려하고 예술품이 가득한 바커스 저택과 다르게 디자인이 단조로웠다.

로저는 잠시 말없이 현관을 둘러보았다. 그의 예민한 눈썰미와 감각이 마르센 저택 내부를 평가하고 있는 거였다.


“로저, 저택은 우리가 소개해줄게. 근데 이건 웬 거야?”

실케는 로저가 자신에게 통 관심을 주지 않자 먼저 말을 걸었다.


“바이올린인데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리제한테서 바이올린 연주를 잘한다고 들었어!”

“아, 네…….”

로저는 자신의 감상을 방해한 실케가 못마땅한 건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고 있다며? 리제 연주가 꽤 형편없지않아? 쟨 다른 건 잘하면서 그림 그리는 거나, 뜨개질은 취약하거든.”

“그렇긴 하죠.”

수긍하는 말과 다르게 로저의 표정이 좀 무서워졌다.


“역시! 근데 나는 리제와 달리 바이올린을 꽤 잘 연주해! 보여줄까?”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무슨 소리야! 내가 제일 실력이 좋다고!”

“나, 나도!”

실케에 이어 다른 형제들까지 한마디씩 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의견이 합쳐지지 않자 바로 로저 등에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에 손을 뻗었다.


‘아, 로저가 싫어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로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나는 형제들을 말리기 위해 다가가는데 로저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획 가로채더니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나는 물론이고 형제들이 일동 당황해 행동을 멈췄다.


 


“건드리지 마요.”

까칠한 그의 말투에 형제들은 입을 다물었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로저는 더 찬물을 끼얹었다.


“리제 형제라고 해서 그래도 조금은 닮았나 싶었는데…….”

“……?”

“역시 하나도 안 닮았네. 내 바이올린도 리제도 건들지 마세요.”

……쟤, 지금 뭐라는 거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