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9장. 좋아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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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9장. 좋아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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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9장. 좋아해 (2)
2023.05.30.
형제들 얼굴에서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이러다 분위기가 진짜 험악해지겠다.
“로저, 아무리 낯을 많이 가린다 해도 그렇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 어떡해?”
그래서 내가 나섰다.
“뭐라는 거야? 나는 낯 같은 거 하나도……읍!”
나는 황급히 로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로저가 원래 자기 악기 건드리는 거 안 좋아해. 언니, 오빠들도 바이올린 배웠으니까 알잖아. 바이올린은 조금만 건드려도 현이 풀어져서 소리가 이상하게 나는 거. 그렇지? 로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내 악기를 누가 만지는……읍.”
“봐, 들었지? 악기 만지는 건 안 좋아한대. 어쨌든 로저, 내 방 구경시켜 줄 테니까 이제 올라가자.”
로저가 더 헛소리하기 전 그의 손목을 억지로 잡고 끌었다.
계단 위로 올라가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형제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분명 로저를 아니꼽게 보고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 모두에게 미움을 받은 로저가 원망스러웠다.
“왜 입을 막은 거야?”
“조용히 해. 아예 꿰매버리고 싶은 걸 꾹 참은 거니까.”
그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눈살만 찌푸리고 있었다.
“근데 저거, 진짜 네 형제 맞아?”
뭐? 저거?
내 형제들이 바이올린을 멋대로 만지긴 했지만 그전까지 로저가 거슬릴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저에게 잘 보이려고 은근히 노력했는데 이를 모른 척 한 사람이 로저 아닌가.
“우선 방에 들어가자.”
“여기가 네 방이야?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네? 너무 좁지도 않고…….”
로저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잘 정돈된 방이 신기한지 그는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하자도 없네.”
그는 견고한 책상에 놀라기도 했고, 침대보가 푹신하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단언컨대 로저의 방에 있는 책상이 더 단단할 거고, 침대보의 감촉이 더 좋을 거다.
나는 헛소리하며 가구들을 한 번씩 건드려보는 로저 앞을 막았다.
“로저. 내 형제들한테 무슨 짓이야?”
“형제가 뭐 저래?”
로저의 말과 함께 나는 그의 발을 꽉 밟았다.
“야! 무슨 짓……!”
“네가 뭔데 내 형제들을 욕하는 거야?”
그는 화가 잔뜩 난 내 얼굴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내 형제들이 좀 심술궂고 장난이 많긴 해도 남들에게 못된 소리를 들을 만큼 나쁘지 않았다.
“……야, 너는 사람이 좋아도 그렇게 좋으면 안 돼. 너한테 못되게 구는 형제들이 뭐가 좋다고 감싸는 거야?”
주저하던 로저가 사과는 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내뱉었다.
“못되게 군다고?”
“널 막 괴롭히는 걸 내가 모를 거 같아? 아, 설마 널 때리는 건 아니지?”
로저는 내가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따돌림을 의심하는지 내 팔과 다리를 살폈다. 타박상이나 흉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거다.
황당해 말이 잘 안 나왔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나와 형제들은 꽤 친하다고.”
“그런데 왜 네 앞에서 널 욕하는 거야? 네 실력이 형편없다고 하고.”
“그건 그냥 장난이지!”
“장난? 형제인데?”
로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제면 무슨 하하호호 사이좋게 지내야만 하나?
형제가 없어서일까. 그는 친구처럼 못된 말도 서슴없이 하는 우리들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최근에 로저와 가까이 있었던 형제는 펜턴 남매였다. 드물게 사이가 좋고 서로를 배려하는 유릭과 유네를 보다가 우리 형제들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이야, 로저. 서로 못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지켜주기도 해. 저번에도 그랬고.”
“그게 뭐야.”
“형제들이라고 꼭 펜턴 남매처럼 좋은 건 아니라고. 그리고 유릭과 유네도 네 생각과 달리 자주 싸워. 마르센 형제처럼 말이야.”
진심으로 형제들을 감싸주는 내 행동에 로저는 표정이 풀어졌다. 오해가 잘 풀린 거 같았다. 내 시선에 고개를 약간 숙인 로저는 품에 넣어두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
로저가 나에게 사과했다. 오해로 비롯된 일이라 나도 화가 다 풀렸다.
“됐어, 그나저나 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으로 우릴 만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 얼굴 봐서 좋다, 로저.”
“부인께서 널 많이 혼내셨어?”
아, 그렇구나.
나는 로저가 내 출생에 대해 알았음을 눈치챘다. 그러자 방금 내 방과 가구를 살피며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던 로저 행동도 납득갔다.
‘걱정되나 보네.’
로저는 까탈스럽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또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 집안이라 당연히 사생아에 대한 편견이 있을 줄만 알았다.
근데 아니다.
“아니, 그다지 안 혼났어. 그냥 놀고먹고 아주 게으르게 지냈지.”
로저는 침대에 앉은 날 보다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뒤적거렸다. 케이스 바깥쪽 주머니에 뭘 넣고 왔는지 로저의 손이 주머니 깊숙이 들어갔다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에 구겨진 종이 한 장이 쥐어졌다.
“자, 이거.”
로저가 건넨 종이를 받았다. 쓰레기인가 싶었는데 유심히 보니 체스 기보다.
“이게 웬 거야?”
“네가 있을까 봐 몇 번 펜턴 저택에 갔었어.”
“정말?”
“근데 있을 줄 알았던 넌 없고, 키토 남작을 몇 번 만났지.”
나에게 건넬 종이가 더 있는지 로저는 도로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방금 받았던 것보다 구김이 심한 종이 두 장이 주머니 밖으로 나왔다. 로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구겨진 부분을 곱게 폈다.
“그리고 이건 키토 남작께서 널 만나면 전해달라는 기보들이야. 내가 널 보기 위해 마르센 저택에 간다고 말했거든. 총 세 장을 받았지만 한 장을 잃어버려서 중간에 공백이 생길 거야. 그래도 괜찮지?”
“로저, 진짜 너밖에 없어!”
종이를 내려놓고 로저를 와락 안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지라고 말할 줄 알았던 로저는 평소답지 않게 쭈뼛쭈뼛 서 있었다.
안 그래도 혼자 체스 두는 게 질렸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기보가 생겼으니 며칠 정도는 따분하지 않을 거다. 나는 로저 품에서 나와 키토 남작의 기보를 찬찬히 살폈다.
“……또 원한다면 가져다줄 수 있어. 그때는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가져올게.”
이 귀여운 것!
“네가 최고야, 로저!”
“흠흠, 그것보다 남작께서 마을에 돌아오셨어. 널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로저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말을 바꾸었다.
키토 남작이 마을에 돌아왔다는 건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몇 번 정도 키토 남작 앞으로 편지를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남작과 만나지 못할수록 나는 그가 더 유능하고 능력 있는 제자를 곁에 두는 건 아닐까 불안에 떨었다.
“그나저나 키토 남작께서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않으셨어?”
“……펜턴 공작과 키토 남작께서 네 자랑을 좀 하시긴 했지. 유릭 펜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놈은 워낙에 널 좋아하잖아.”
“그래도 펜턴 저택에 자주 찾아갔구나.”
“뭐, 그렇지. 어머니께서 내게 화가 나셔서 나도 꼼짝없이 저택에 갇혀 있을 줄 알았는데 펜턴 부인께서 우리 저택에 찾아왔거든. 몇 번이나 바닷가에 날 데리고 간 것에 사과하셨어.”
정작 사과할 사람은 나인데.
펜턴 부인이 직접 바커스 저택에 찾아가 사과했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리제?”
“……미안.”
갑작스러운 사과에 로저는 대답이 없었다.
“널 바닷가에 데려간 거 말이야. 괜히 나 때문에 따라가서 부인께 혼도 나고, 폭풍 때문에 고생만 하고. 진심으로 사과할게, 로저.”
“뭐야, 그거였어? 난 또 심각한 얘기인 줄 알았네. 걱정하지 마. 재미있었으니까.”
그는 살짝 웃었다.
“……재밌었어?”
폭풍 때문에 날아갈 뻔했는데?
로저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저 얼굴을 보면 재밌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거 같다.
나는 쥐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로저에게 다가갔다.
“어쨌든 사죄의 의미로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내가 하고 싶은 거? 딱히 없는데.”
“정말로?”
“음…….”
로저는 잠자코 고민하다가 바닥에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말을 잘못 놀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예상대로 로저는 케이스 안에 있던 바이올린과 활을 꺼내더니 씩 웃었다.
“바이올린 레슨을 느슨하게 받았지, 아마.”
“…….”
“쉬운 곡 하나는 연주해야 하지 않겠어? 나랑 연주회 하려면 말이야.”
“……이참에 내 형제들이랑 노는 건.”
“피할 생각 마, 리제. 오늘 그동안 못 뺐던 진도 다 뺄 거니까.”
내 주둥아리가 문제였다.
* * *
“리제. 들어가도 돼?”
문 앞에서 실케와 펠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두 시간째 바이올린 활을 잡고 있었다.
조금만 음이 틀리면 로저는 칼같이 다시, 라고 말해 팔이 저리고 턱이 알알했다. 그러던 중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이때다 싶어 활을 내려놓았다.
문을 열자 두 형제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내 모습 너머에 있는 로저를 발견하더니 얼굴을 약간 붉혔다. 아까의 일로 로저에 대한 정이 다 떨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이놈이 그리도 잘생겼나?’
미운 소리를 들어도 잊을 만큼?
로저의 보라색 눈동자가 특이하고 예쁘긴 했지만. 얼굴형이 날렵하고 뚜렷해 멀리서 보아도 그 윤곽이 잘 잡히긴 했지만. 지금은 어린아이라 몰라도 나중에 커서 선이 굵어지면 상당한 미남이 될 수 있겠다 싶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어머니께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내려 오래.”
“저기…….”
실케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저가 파고들었다. 펠리시아와 실케는 거리가 가까운 로저로 인해 침을 꿀꺽 삼켰다.
로저는 둘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가능하다면 누나랑 형들과 사이가 좋아지고 싶어요.”
“어……어.”
로저가 예의 있게 말하자 실케와 펠리시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이러다 저 둘이 흥분할 거 같아 나는 로저의 등을 밀었다.
“로저, 먼저 식당에 가 있어.”
“아, 응.”
자신의 말에 두 여자가 반응이 없자 로저도 머쓱했는지 바로 자리를 피했다. 펠리시아와 실케의 시선이 로저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래, 잘생겼다 해주자.’
로저의 잘생김을 인정한 나는 바이올린은 가방 안에 넣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제 식당으로 가려는데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던 펠리시아와 실케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한테 들었어. 로저가 네 약혼자라며?”
“……어머니께서 멋대로 정하신 거야.”
“우리한테는 약혼자를 정해주지 않았으면서 왜 너한테는 저 잘생긴 귀족을 약혼자로 정해 준 거야?”
실케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순수하게 말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의문이었다.
로저에게 불만이 많아도 사실 그는 나에게 과분한 상대였다.
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