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 9장. 좋아해 (3)
(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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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9장. 좋아해 (3)
2023.06.02.
아니, 과분한 상대라고 말한 거 취소.
날이 저물지 않았음에도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다 형제들 사이에서 약혼 얘기가 또 나왔다.
“로저가 너무 아까운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리, 리제가 아까워!”
형제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며 흥분했다.
여자 형제들은 로저를 아까워했지만 남자 형제들은 의외로 내가 더 아깝다며 말을 높였다. 덕분에 식탁 위도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제가 다 양보하는 거죠. 제가 아니면 리제는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요.”
말리기는커녕 내 맞은편 자리에 앉은 로저는 형제들의 흥을 더 부추기고 있다. 로저는 진심으로 자신의 말처럼 생각하는지 상당히 의기양양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을 말자.
“옛날 생각이 나요. 가끔 이세벨 집에 놀러 가 식사를 하곤 했는데 입맛에 맞아 그릇을 싹싹 비웠죠. 이를 보곤 할아버지께서 신기해하셨는데. 기억나시나요?”
관심을 돌리자 바커스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커스 부인은 얘기하느라 식사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세벨과 꺼낼 추억이 한 보따리인지 부인의 입술이 도통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찾아와 곤란했어요.”
“어머, 그랬나요?”
웃는 바커스 부인과 달리 이세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유지되고 있는 이세벨의 표정이 딱딱해서 되레 바커스 부인의 속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선 절 꽤 예뻐하셨죠.”
우려와 달리 바커스 부인은 그런 이세벨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 둘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터라 내 생각보다 훨씬 추억이 많았다. 추억이 많은 만큼 내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대학 시절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긴 이세벨은 대학을 중퇴했고, 바커스 부인도 지금은 의사 일에 손을 놓고 있으니까.’
대학 얘기는 나올 일이 없겠구나, 생각하고 실망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뵌 브루타뉴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학에 다닐 때와 똑같은 거 같아요.”
고기 자르던 손이 멈췄다. 문제의 천문학 캠프 일정 중 포함되어 있던 이름이었다. 만약 내가 캠프에 참여했더라면 그 교수님 저택으로 가 인터뷰를 하고 식사를 했을 터다.
그 이름이 바커스 부인의 입에서 한 번 더 거론되었다. 그러자 나는 이세벨도 그 교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걸 떠올랐다. 상황만 보면 이세벨은 그 대학교수가 있었던 학교에 재학했을 확률이 높다.
기억을 더듬어 브루타뉴 교수님이 어디 대학교수였는지 생각했다. 동시에 왜 저번에 로저에게 이세벨과 바커스 부인이 다닌 대학 이름을 묻지 않았나 후회하기도 했다.
“이세벨과 브루타뉴 교수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요. 마주칠 때마다 마찰이 있었고요.”
“옛날 일이라 기억도 안 나네요.”
“어머, 그래도 성격이 안 맞는 건 여전한 거 같아요. 이번에 교수님 저택에 찾아갔을 때, 이세벨은 교수님을 몰아세웠죠. 그때 교수님 표정이 얼마나 창백했는지 이세벨도 알죠?”
바커스 부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이 끊기질 않았다. 그 웃음 속에서 생각하던 나는 곧 캠프 전단지에 적혀있던 글귀 하나를 떠올렸다.
[웨이클린 대학의 전 천문학 교수 브루타뉴.]
웨이클린 대학이 어디에 있는 어떤 대학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지나가는 아이 한 명 붙잡고 물어봐도 대답이 쉽게 나올 명문대학이었다. 특히 과학분야 쪽으로 유명해 그곳 출신의 과학자라면 모두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
“웨이클린……을 다닌 거예요?”
중간에 끼어든 내 목소리에 바커스 부인은 손뼉을 쳤다.
“어머, 이제 알았니? 나랑 이세벨이 다녔던 대학이란다.”
“…….”
대학을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일인데 그 대학이 최고 명문이라니. 온 세상이 나를 등지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기도 했다.
“내가 말을 이상하게 하고 있었구나, 리제. 네 어머니와 교수님 사이가 좋지 않아도 교수님께선 매번 네 어머니의 재능을 인정했어.”
바커스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서도 조금 겁이 났다.
대학을 다니는 건 내가 바라왔던 일이었다.
근세에 가까운 이곳에서 한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사는 것. 이를 이루기 위해서 가야 할 좁고 굴곡이 많은 길 중 그나마 대학에 진학하여 배움을 쌓는 일이 가장 쉬운 길일 거다.
중간에 대학을 나오긴 했어도 이세벨은 그 길을 한때 걸었다. 내가 바라고 추구하는 그 길을.
그러자 여태까지 이세벨을 은근히 무시하며 한편으로 동정했던 그 감정들이 그대로 나에게 향했다. 없었던 비참함까지 껴들어서.
“전 이때가 기회인가 싶어요. 이세벨. 올해 벌써 대학 교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잖아요? 다시 천문학을 공부해보는 게 어때요?”
내가 염려했던 상황이 왔다. 모르고 있었던 이세벨의 과거를 또 하나 알게 된 거다.
“실리.”
“잘 해냈잖아요. 대학을 중퇴하기 전까지 논문을 발표하고 인증을 받았죠?”
“그 얘긴 그만 해요.”
“그래서 교수님의 저택으로 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고요.”
“그만 하세요, 실리.”
이세벨이 단호하게 말하자 분위기를 눈치챈 바커스 부인이 말을 멈췄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모양이에요. 죄송해요.”
“난 결혼해서 잘살고 있어요, 실리. 천문학 같은 건 그만둔 지 오래고요. 남은 생은 아이들을 위해 살려고 해요.”
이세벨의 초연한 태도에 바커스 부인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화를 마친 두 여인은 아이들보다 한발 늦게 식사를 이어갔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은 탓에 아이들의 목소리만 들렸다.
바커스 부인은 이세벨을 흘끔 쳐다보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세벨은 그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 이세벨은 부인 옆에 앉아 있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겨 무언의 신호를 주었다.
처음에는 저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싶었다.
“바커스 부인.”
“왜 그러니, 리제?”
내 부름에 부인은 웃으며 반응했다.
포크를 내려놓은 다음 두 손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이세벨이 준 신호는 어서 빨리 부인에게 잘못을 사죄하라는 의미였다.
사죄하기에는 타이밍이 적절치 않았지만 이세벨이 지켜보고 있다.
“저번에는 죄송했어요……. 부인께 거짓말을 해서 걱정 끼치게 한 점이요. 로저를 꼬드겨서 부인께 말도 없이 바닷가로 갔잖아요. 어머니께 들었어요. 저와 로저를 찾기 위해 교수님 저택을 찾아가고, 밤새 마을을 돌아다니셨다면서요?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형제들과 로저도 반응했다.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로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꼭 부인께 알리겠어요. 그러니까……제가 로저와 계속 친하게 지내도 될까요?”
“어머니,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리제와 계속 친하게 지내게 해주세요.”
신나게 떠들고 있던 로저도 급하게 껴들었다. 이 일과 상관이 없는 형제들도 리제와 로저를 용서해달라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끌고 있다.
형제들이 나서주지 않아도 마음씨가 따듯한 바커스 부인은 나를 용서했겠지만,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리제. 너와 로저를 걱정하긴 했지만 그것뿐이란다. 너희들이 무사하면 됐어. 그리고 로저와 앞으로 친하게 지내는 건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부탁 같은데? 앞으로 로저와 친하게 지내주겠니? 리제.”
바커스 부인은 천사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인은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거면 됐다.’라고 말을 덧붙었다.
“너무 빨리 용서하면 버릇이 잘못 들어요.”
그와 반면 이세벨은 참 엄격했다.
“리제처럼 착실하고 예쁜 아이는 또 없는걸요? 이세벨 어린시절을 보는 거 같아요. 이세벨도 리제처럼 무척 예쁘고 똘똘하고, 체스까지 잘 뒀잖아요. 생각해보니 닮은 점이 참 많네요.”
무의식적으로 다시 옛이야기를 꺼내던 바커스 부인은 말을 다 하고 나서 싸늘한 이세벨의 반응을 알아챘다. 이번에는 나와 형제들까지도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었다.
바커스 부인과 이세벨의 사이가 완전히 깨지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 불행을 막을 소리가 저택 밖에서 들렸다. 요란하게 우는 말이 정적을 깨트렸다.
누군가 마르센 저택에 온 거였다. 이를 알아챈 이세벨은 일어나 현관을 살폈다.
“젠장, 얼어 죽겠군.”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약간 보였다. 봄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에겐 아직 바람이 차가운지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백작님? 일주일간 저택을 비운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남편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 소리요? 사정이 있어 하루만 있다 왔소.”
“그럴 줄 알고 손님을 불렀는데요. 바커스 부인과 그의 아들이 삼 일간 마르센 저택에 머물기로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들었던 거 같아. 인사만 잠깐 하고 난 방에 들어가겠소.”
이 분위기에 아버지라니. 왜인지 모를 걱정이 몰려왔다.
이세벨과 아버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바커스 부인과 로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함이 역력한 아버지 얼굴이 식당에 나타났다. 흐린 눈으로 식탁을 한 번 살피던 아버지와 바커스 부인의 눈이 마주쳤다.
바커스 부인은 들었던 나이보다 젊고 말끔하게 생긴 아버지를 보며 살짝 긴장하는 거 같았다. 시체 같았던 아버지의 표정도 통통하고 귀엽게 생긴 바커스 부인을 보자마자 화색이 돌았다.
“아, 혹시 저 아름다운 여인이 바커스 부인이요?”
“……실례합니다. 실리 바커스라고 해요. 저 아이는 제 아들인 로저 바커스고요. 백작님이 오시는 줄도 모르고 저희가 무례를 범했네요.”
“무례라니. 그런 섭섭한 소리 하지 마세요, 부인.”
부인과 아버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의문 모를 걱정이 더 짙어졌다.
아버지는 코트를 벗더니 식당 깊숙이 들어왔다. 지쳤던 모습은 어디 가고 아버지의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는 벽으로 다가가 나열된 와인 하나를 꺼냈다.
“방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꽤 거창하게 벌인 식사 분위기를 보니 피할 수 없네요.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부인.”
“그럼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자리에 앉자 이세벨도 얌전히 앉았다.
착석한 지 몇 초 되지 않아 아버지는 평소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던 친절과 미소를 부인에게 드러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이를 어쩌지.’
바람기가 다분한 아버지는 아름다운 여성이나 자신의 취향인 사람을 보면 말이 많아지곤 했다. 그리고 바커스 부인은 아버지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내와 예전부터 친구였다고요? 이세벨이 통 자신의 얘기를 안 해서 말입니다.”
“옛, 옛날 일이니까요. 친구라 해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부인은 아버지의 관심이 부담인지 말을 더듬거리거나 피했다.
자리에 완전히 눌러앉은 아버지는 와인을 따랐다. 그는 술을 거부하는 바커스 부인과 이시벨 잔에도 와인을 가득 부은 뒤, 분위기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만 흥분된 꼴이었다. 형제들과 로저는 지루해했고, 이세벨은 금방이라도 식탁을 엎을 거처럼 조용히 있었다.
“백작님. 실리가 부담스러워하니 여기까지 해요.”
“아,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보다 못한 이세벨이 말렸지만 아버지는 그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질문이 두 개가 되었고 이어 여러 개가 되었다. 적당히 회피하려던 바커스 부인도 결국 포기하고 대답을 꼬박꼬박했다.
이 식탁이 완전히 아버지 독무대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