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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9장. 좋아해 (4) (45/47)


45 # 9장. 좋아해 (4)
2023.06.06.



“네 아버지께서는 말이 참 많으신 거 같아.”

로저는 여전히 떠들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작게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아버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고 있었다.

좋게 말해 말이 많은 거지 실상은 혼자 떠들고 있는 거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 누구도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지질 않고 있는 걸 모르고 있었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백작님, 아이들은 이만 올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러도록 해.”

얘기가 끝나지 않자 이세벨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한마디에 말이 끊긴 아버지는 불쾌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바커스 부인이 앞에 있어서인지 아버지는 화내지 않았다.


“얘들아, 백작님 말 들었지? 이제 올라가도 좋아.”

“네!”

형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식당에서 벗어났다. 발 빠르게 현관으로 모인 형제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들도 아버지의 말이 퍽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말 많은 건 오랜만에 봤어. 선생님인 줄 알았지 뭐야.”

“선생님? 난 연대기를 다 읊는 줄 알았는데. 일명 마르센 연대기.”

펠리시아와 스웰이 말 많던 아버지를 비꼬았다. 다른 형제들도 쌓인 게 많았는지 같이 비꼬다가 정각이 알리는 종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

“…….”

아버지한테 들킨 줄 알았는지 다들 말이 없다.


“우리……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 같이 놀까?”

“그러는 게 좋겠어, 누나. 하하.”

신나게 아버지를 욕하던 펠리시아와 스웰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은 잠들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다 같이 놀자고 의견을 냈다.


“가볍게 숨바꼭질부터 하자. 일 층은 상어소굴로 이 층에만 숨을 수 있는 거야. 일 층에 내려가 숨어도 이미 상어한테 잡아먹혀서 맨 처음에 죽은 것과 다름없어. 알겠지?”

펠리시아는 규칙을 설명했다. 짧고 간단한 규칙이었다.


“그럼 처음 술래는 내가 할래!”

“좋아.”

술래는 스웰로 정해졌다. 이제 숨기만 하면 된다.


“그럼 센다! 스물……!”

스웰이 눈을 가리고 수를 세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계단 위를 오르는 형제들과 달리 로저는 어디로 갈지 모르고 헤매고 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따라와.”

나는 로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계단을 오른 다음 제일 숨을 곳이 많다고 생각한 방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는지 방 안에 있던 실케가 내 앞을 막았다.

그녀는 입을 벌리는 대신 눈치껏 나에게 시선을 건네었다. 자신이 먼저 이 방을 노렸으니 넘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른 방들도 똑같았다. 먼저 선점한 형제들이 나와 로저의 몸을 막았다.


“치사하게 진짜. 같은 방에 좀 같이 숨으면 어디 덧나나.”

“어떡할 거야, 리제?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로저의 말대로 기껏해야 십 초 정도 남았다.


“삼 층은 주로 하녀들이 사용하는 방이라 숨을 곳이 거의 없는데.”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안 돼?”

“하는 수 없지. 펠리시아 방으로 가자.”

결국 바로 옆에 있는 펠리시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인형을 수집하고 다니던 그녀의 방은 온통 인형 밭이었다. 책상 밑에도 인형이 가득했고, 서랍도 다를 게 없어 숨을 곳이 없었다.

초조한 기색으로 방을 살피던 나는 역시나 인형이 가득한 침대 밑을 발견했다.


“여기엔 숨을 곳이 있나?”

겉에 있는 인형을 치우자 두 명 정도 들어갈 공간이 있었다. 바로 몸을 그 안으로 구겨 넣었다. 건조한 냄새와 함께 먼지가 눈앞에 휘날렸다.


“콜록! 좀 치우고 살지.”

“야, 빨리 들어가……!”

로저는 남은 공간에 자신의 몸을 넣었다. 그도 생각지 못한 먼지에 마른기침을 연거푸 했다.


“로저. 아무래도 다른 데 숨는 게 좋지 않을까?”

좁은 건 그렇다 치고 이러다 폐가 망가지는 건 아닐까 싶다.


“다섯! 넷! 셋……찾는다!”

밑에서 스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계단을 오르는 중인지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목구멍이 가려운 걸 몇 번이나 참았다. 근데 자리까지 불편하고 힘들었다.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몸을 꼬무락꼬무락하며 움직이며 편한 자리를 잡으려 애썼다.


“로저, 좀 뒤로 가 줘.”

뒤로 물러나라며 손짓했지만 로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로저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우리 몸은 밀착되어 있었고 얼굴 또한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한발 물러나 내가 먼저 뒤로 몸을 빼려 했는데 겉에 있던 인형이 약간 움직였다. 여기서 더 몸을 빼거나 팔을 벌리면 인형이 엎어진다.

로저도 같은 상황인지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입김과 숨결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그때 스웰의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도 모르게 로저 쪽으로 몸을 붙었다.


“야, 너, 너무 가까운 거…….”

“어쩔 수 없잖아. 참아.”

내가 단호하게 내뱉자 로저는 고개를 힘껏 위로 올렸다. 나와 어떻게든 닿지 않으려고 하는 발버둥이었다.

몇 초 정도 흘렀을까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 떨어져도 되겠지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웰, 이놈이 영악하게 발뒤꿈치를 들고 소리를 죽인 다음 이곳에 온 거다.


“어ㅡ디ㅡ있을까?”

말을 늘리는 스웰의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옷장을 열어보고, 커튼 뒤도 면밀하게 살피는 소리가 들렸다.

이 침대도 스웰의 수색망에 들어가 있는 건지 그의 발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들렸다.


“여기 있을까?”

들킨다! 내 옆에 팔 하나가 쑥 들어왔다.


“……으!”

내가 움찔거리자 로저는 내 입을 다급하게 막고 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내 귀에 닿은 로저의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었다. 그의 심장 소리 때문에 스웰에게 들키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응? 어딨지?”

스웰의 손에 닿지 않으려고 로저의 허리를 꽉 안았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은 민망한 자세로 숨을 참았다.


“진짜로 어디 있는 거지?”

제발 좀 가라……. 슬슬 한계였다.

숨소리를 내고 싶을 때 즈음 내 등에 닿을 뻔한 스웰의 손이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하자 나와 로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이 없는 걸 보아하니 스웰이 정말로 간 거 같다.


“하아.”

참았던 숨을 깊게 내뱉었다.


“로저, 우리 정말 들킬 뻔했던 걸 알……야, 너 얼굴이 엄청 빨개.”

로저의 얼굴이 홍당무나 다름없었다. 침대 밑이 좁고 더워서 그런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려고 했는데 그가 내 손을 확 내쳤다. 당황해 눈을 깜빡이자 로저가 나의 허리를 밀어냈다.


 


“야, 조심해. 인형이 움직이잖아!”

“그, 그건 네가 갑자기 손을 뻗으니까.”

“열이 있나 확인하려 그런 거지! 너 얼굴이 심각할 정도로 붉다니까?”

“괜찮으니까 내버려 둬.”

왜 또 예민하게 구는 걸까.


“됐다. 스웰도 간 거 같으니 이 틈에 내가 다른 곳에 숨을게.”

침대 밑으로 나가려는데 로저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뭐?”

“술래가 다시 올 수도 있잖아.”

“그렇긴 한데.”

“들킬 정도로 나랑 있기 싫으면 가든가.”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한숨을 내뱉은 나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몸을 편하게 두기 위해 움직였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로저는 일일이 반응하며 나와 자신의 몸이 닿지 않게끔 거리를 벌려두었다.


‘참나. 네가 날 싫어하면서.’

그냥 빨리 이 덥고 더러운 곳에 빠져나가고 싶었다.

조용하고 더운 공기만이 내 얼굴에 내려앉았다. 심심한 나머지 눈만 굴리다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반짝거리고 큰 눈을 가지고 있는 토끼 인형에 한 인물이 바로 떠올랐다.


“풋.”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로저가 몸을 움직였다.


“갑자기 왜 웃어?”

“아니. 이 인형. 유릭을 닮아서.”

내가 토끼 인형을 가리켰다. 하얗고 눈도 파란 것이 유릭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전혀.”

“그래? 닮기도 닮았고 보니까 이 인형, 유릭이 좋아할 거 같아. 선물하면 좋아하겠지?”

좋아하는 유릭의 모습을 떠올리니 꼭 선물해주고 싶었다. 펠리시아에게 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인형 가게에 가서 토끼 인형이 있나 한번 살펴야겠다.


“……야. 리제.”

“뭐.”

로저는 뜸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 그 돌덩어리. 아니, 유릭 펜턴 좋아하냐?”

로저가 던진 질문은 열 살 소년이 궁금해할 법한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물어놓고 긴장하는 로저를 알아채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귀엽네, 자식.


“응, 좋아해.”

“뭐?”

당황했는지 로저가 되물었다.


“좋아해.”

“진짜?”

“응.”

충분히 대답도 했겠다, 이제 질문이 끝났나 싶었는데…….


“정말로?”

“…….”

“진심으로?”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래?”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참다못한 내가 짜증을 냈다. 그러자 로저는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고작 이런 거로 삐친 걸까. 로저의 얼굴 살피는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충격받은 듯 굳어 있는 얼굴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같이 공존하고 있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나. 나는 생각에 잠기다 설마 하는 마음에 입을 벌렸다.


“뭘 이리 진지해. 난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말은 한 거였어.”

“뭐? 나는 이성으로서 좋아하냐는 뜻이었어!”

덧붙인 내 말에 로저가 바로 반응했다.


“그래?”

“다시 대답해. 유릭 펜턴을 이성으로서 좋아해?”

“내가 왜 대답해야 해?”

“야!”

로저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 반응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 건지 모른 채.


“왜 궁금한 거야? 설마, 너 나 좋아해?”

“무, 무, 무슨 소리야!”

로저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 좀 더 놀려주고 싶었다. 속 몰래 음흉하게 웃으며 로저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소리긴. 좋아하냐고 묻는 거지.”

“허, 참! 어, 어이가 없네. 너랑 같이 못 있겠다! 내가 그냥 딴 곳으로 숨으……으악!”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앞에 있는 인형을 치우던 로저가 비명을 질렀다.


“뭐야? 무슨 일……악!”

뭔가 싶어 고개를 약간 들자 얼굴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게 보였다. 번뜩 뜬 두 눈과 양쪽으로 찢어진 입술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


“스웰. 언제부터…….”

스웰이다. 그는 마치 숨어 도망친 난쟁이들을 잡으러 온 거인 같았다. 분명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스웰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이건 말 안 되는 일이다.


“다 떠들었어?”

스웰은 사색이 된 나와 로저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저게 사람인가.


“미안하지만 술래가 된 이 몸에게 들키지 않는 법이란 없어.”

스웰이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결론이 났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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