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 10장. 이세벨의 고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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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10장. 이세벨의 고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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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10장. 이세벨의 고백 (1)
2023.06.09.
형제들은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도란도란 앉아 있었다. 마르센 저택에서 하룻밤 머문 바커스 부인과 로저도 마찬가지였다.
“안녕. 로저, 잘 잤어?”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내가 묻자 로저는 하품을 하다 삼켰다. 여기까지는 내가 예상한 그림이 맞았다.
“실리, 잘 주무셨습니까?”
회사에 가지 않고 번 듯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제외하면.
날만 밝지, 상황은 어제 저녁 식사하고 다를 게 없다.
아버지는 어제보다 더 과하게 부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부인도 그 친절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어제처럼 말을 더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오늘은 어디까지 이야기가 이어질까. 현재 이야기가 진행된 마르센 연대기는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과 아버지의 유년 시절까지다.
즉 아직 마르센 연대기의 절정을 기록할 아버지의 청년 시절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얘기다.
길고 험난한 이야기일 거다. 실상은 부모 잘 만나서 모자란 거 없이 풍족하게 지냈을 터지만.
“자식이라고는 저뿐이라 기대가 저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죠. 그때를 회상하면 참 힘들었어요.”
아버지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학교 다닐 필요도 없이 완성된 사람이다.
근데 뭐 그리 문제가 많았는지 회사를 물려받은 것도 늦었고, 작위를 이어받은 것도 다른 이들에 비해 늦었다.
아버지는 이를 운이 없다고 표현했다. 문제는 아버지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버지가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재능은 없어도 운 하나만은 타고났다. 운 없으면 시체가 되었을 정도로.
“아버지께선 끝내 저에게 작위를 비롯한 모든 걸 물려주시고…….”
“그럼 백작님, 그때 즈음 이세벨과 결혼한 건가요? 제가 기억하기론 그래서요.”
바커스 부인이 은근슬쩍 주제를 바꾸자 아버지는 표정이 바로 시큰둥해졌다.
“뭐, 그렇지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막 작위를 넘겨받은 백작님에게 혼담이 왔다고 이세벨이 말했어요.”
“그랬습니까? 뭐, 이 얘기는 중요하지 않으니…….”
“이세벨은 발표된 물리학 이론에 반박할 논문을 쓰고 있었어요. 이세벨을 주축으로 그 밑에 있던 학도들도 같이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들 잠을 못 이루었죠.”
아버지의 말이 끊겼다.
“처, 처음 듣는 소리군요.”
그는 다시 이야기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근데 갑자기 이세벨이 결혼한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갑작스럽게 혼담을 나누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그렇지만 이세벨이 결혼을 위해 하고 있던 일을 포기했으니까요. 그 대단한 일을요.”
대단한 일?
활기가 더해진 바커스 부인의 목소리가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전했다. 세 명이 한팀으로 구성된 그 그룹은 가히 현존하는 학생 중 가장 천문학에 유능한 젊은이들이라 했다.
“연구로 인해 구성된 그룹 주축은 이세벨이었어요. 이세벨이 제일 뛰어났죠.”
바커스 부인은 종이가 가득 쌓였던 책상과 잉크가 다 떨어진 병, 쓰고 다 닳아 깨끗이 닦아도 분필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칠판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세벨이 연구할 때 저는 조수 역할을 했었어요. 망가진 깃펜을 모아 버린다거나 이런 역할이요. 다들 열정적이라 연구실을 치울 사람이 마땅히 없었거든요. 그만큼 신중하고 중요한 연구였어요.”
신난 건 바커스 부인뿐이었다. 아버지는 흥미가 떨어진 이야기에 별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할 수 없어 영혼 없는 대답만 꾸준히 내뱉었다.
그때, 잠자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세벨이 잔을 툭 내려놨다. 이세벨의 반응에 당시 일을 회상하던 바커스 부인은 현실을 자각했다.
“그만 얘기해요, 실리.”
이세벨은 입가 주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별로 중요한 연구도 아니었고 그래서 기억도 잘 나지 않으니까.”
그 말에 바커스 부인은 멈칫하다가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아뇨. 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나요, 이세벨. 이세벨이 반박할 이론은 다른 분야의 증명을 도왔던 이론이기도 했어요. 근데 이 이론에서 작은 오류 값을 그대가 발견했지요. 이세벨. 이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이 바뀔 수도 있었어요.”
“그건 증명이 되었을 때 얘기예요. 난 연구만 했을 뿐,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어요.”
“발표하지 않았잖아요.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었고. 그날, 이세벨에게 혼담이라는 압박이 오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마르센 연대기로 시작된 얘기는 어느새 바커스 부인과 이세벨의 충돌로 번졌다. 매번 이세벨에게 과거를 들먹거렸던 바커스 부인은 답답하다는 듯 참아왔던 울분을 토해냈다.
‘왜?’
바커스 부인은 진심으로 과거의 영광을 부정하고 자신의 재능을 포기한 이세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저렇게 안타까워할 정도로 이세벨에게 많은 재능이 있었던 거야.’
이제 이세벨의 능력을 더 부정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서 저런 반응이 나올 정도면 이세벨은 그냥 재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특출났던 게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특출남이 이세벨에게 남아 있을지 모른다.
“전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이세벨.”
“백작님과 얘기 나누세요.”
이세벨은 자리를 피하는 걸 택했다. 그녀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 닫히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빈 잔을 채우던 하녀가 그 소리에 물을 흘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사죄와 함께 하녀가 다급히 흘린 물을 닦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녀를 나무라거나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내내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형제들은 이세벨이 머문 자리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분위기를 망치고 홀연히 사라진 이세벨을 못마땅해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낯빛이 어두운 바커스 부인은 자리가 불편한지 손짓이 굳어 있다.
“그냥 입맛이 떨어져서 그런 걸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죠.”
아버지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자신이 하고픈 얘기를 하려 했다.
“죄송해요. 저도 입맛이 없어서.”
“네?”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죄송해요.”
바커스 부인까지 자리에서 일탈하자 식당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어두워졌다.
나불거리던 아버지도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기 몇 덩어리만 씹다가 형제들의 얼굴을 살피더니 그대로 식당에서 나갔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와 로저도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 * *
“어머니께서는 마르센 부인을 내내 부러워하셨어.”
로저는 바이올린 줄을 몇 번 튕기며 말했다. 식사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후였다.
“부러워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세벨이 바커스 부인을 부러워했으면 부러워했지, 왜 반대일까. 내가 되묻자 로저는 조율된 바이올린을 내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선 아버지와 결혼하시고도 의사 일을 계속했지. 어머니가 원하던 일이기도 했고, 아버지께서도 어머니가 하시는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어.”
“근데?”
“문제는 어머니께선 피를 무서워하셨지. 그래서 수술도 잘 맡지 않았고, 심한 상처를 보면 어지러움을 호소하시기도 했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수술 도중 환자가 발악할 때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 하셨대. 도망가려는 환자를 붙잡으려 해도 힘이 부족해 그러지 못했다고 했어.”
담담하게 말했지만 로저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그래서 병원에 내쫓기고, 자선활동을 하셨던 거야.”
로저는 이번에 가방에 있는 자신의 악기도 꺼냈다. 나는 로저에게 건네받은 바이올린을 내려놓고선 그의 행동을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바커스 부인이 어머니를 부러워할 이유는 없는데.”
“그때 무렵 아버지가 무대를 대성공으로 끝마치셨거든. 관객들을 비롯해 평론가와 귀족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아버지의 성공에 어머니는 기뻐하면서도 초조해 보였어. 며칠 안 가 어머니는 의사를 그만두셨지. 스스로.”
로저는 자신의 바이올린마저 조율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음들이 삐걱거리며 불안정한 소리를 냈다.
“아버지 못지않게 어머니도 야망이 있으셨어. 의사라는 고된 직업도 이겨내셨고, 남자들 사이에서 들었던 차별도 이겨내셨지. 근데 스스로 포기하신 거야. 외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 때문에 말이야.”
로저는 이제 이해가 가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의사 일을 다시 하고 싶어도 한계에 부닥쳐 더 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바커스 부인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의사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했고.
“그래서 부인이 어머니께 자꾸 옛일을 언급하는 거야?”
“뭐, 그렇지. 마르센 부인께서는 재능이 많으셨대. 결혼을 이유로 연구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부인을 붙잡으려던 사람도 많았고. 아직도 마르센 부인이 연구로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어.”
바커스 부인은 이세벨을 보면 어떤 심정일까, 생각했다. 로저의 말처럼 이세벨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과 다르게 꿈을 이룰 수 있는데도 외면한 이세벨이 비겁해 보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졌다.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 너무나 현실적인 얘기에 겁을 먹었다. 그 두 사람의 얘기와 사정이 나에게 닥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행복을 꿈꾸는 나에게 그 두 상황 다 피해야만 할만한 상황이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사실 내가 곡을 하나 선정해왔거든. 쉬운 곡이라서 너도 연습하면 연주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뭐, 어찌 됐든 좋아. 그 곡으로 해.”
“듣지도 않고?”
로저는 영혼 없이 대답하는 날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부인에 대한 생각으로 잠겨 있는 날 눈치채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바이올린을 턱 밑에 두더니 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활과 느리게 울리는 선율이 내 시선을 이끌었다. 구슬픈 곡이 감성을 자극했다. 곡이 절정으로 갈 때, 로저는 활을 멈췄다.
“우선 여기까지.「그리고 연단」이라는 곡인데 어때?”
“좋긴 한데 내가 연주할 수 있을까?”
“내가 가르쳐주잖아. 또 넌 내 약혼녀니까 무슨 고민이 있거나 걱정이 있으면 말해도 돼.”
내 걱정을 덜어주려는 건지 로저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야, 웃어?”
“약혼녀라니. 넌 정말 진심이구나.”
“싫으면 깨든지.”
로저의 목소리가 소심했다. 그새 삐친 걸까?
“로저.”
“왜.”
“연주 마저 해주면 약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로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끝까지 연주해주면 되는 거지?”
뭐?
“말 바꾸기 없기다.”
“잠, 잠시만!”
로저가 냅다 바이올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