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 10장. 이세벨의 고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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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10장. 이세벨의 고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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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10장. 이세벨의 고백 (2)
2023.06.13.
바이올린 연습이 끝나고 로저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점심에는 쌍둥이들과 함께 정원에 나와 술래잡기를 했다.
서로 쫓고 잡는 사이에 덧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아래로 기울어진 짧은 시곗바늘이 곧 다섯 시를 가리켰지만 이세벨과 바커스 부인은 모습 한 번 비치지 않았다.
걱정된 마음에 바커스 부인을 찾아갔던 로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어떤 물음을 내뱉어도 부인께선 ‘괜찮다’ 만 반복했다고 한다.
이세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저처럼 직접 방에 찾아가지 못했고, 벌어진 문틈으로 이세벨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꽃을 가꾸거나 시들어진 잎들을 정리하는 게 다일 뿐이다. 그녀가 현재 어떤 기분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서로 화가 나신 걸까?”
숨바꼭질이 끝나고 로저와 저택 뒷마당에 앉았다. 로저는 마당에 있는 꽃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나 손으로 매만졌다.
“그래도 잘 풀리시겠지. 어렸을 적부터 친구니까.”
“그랬으면 좋겠어.”
“근데 그 정도로 신경 쓰이냐? 네 일도 아닌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로저를 쳐다보았다.
“로저, 너는 신경 안 쓰여?”
“좀 걱정되긴 하지.”
“무슨 걱정?”
“두 분이 싸우다가 홧김에 우리 약혼을 취소하면 어떡하냐? 그럼 귀찮아질 텐데.”
로저는 꽃을 꺾어 능숙하게 무언가를 만들었다.
손짓 몇 번으로 줄기와 줄기를 이어 묶은 로저는 팔찌를 완성해 내 손목에 가져다 대었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밀어 로저가 만든 꽃팔찌를 착용하는데 저택 창문 너머로 이세벨 모습이 보였다.
“어?”
이세벨이 이 층에 있었다. 현재 이 층에 있는 사람은 바커스 부인밖에 없을 텐데.
“야, 리제. 움직이지 마.”
내가 허리를 일으키자 로저가 바로 투덜거렸다. 이 층 복도를 거닐고 있는 이세벨을 보기 위해 고개를 퍼뜩 들고 시선을 움직였다.
눈을 가늘게 떠 이세벨의 표정도 보려 했지만 거리가 멀어 불가능했다.
이세벨은 네 번째 창문을 지나쳤지만 다섯 번째 창문을 지나치진 않았다. 그 사이에는 바커스 부인이 머문 방이 있었다.
놀라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놀란 로저가 뭐라 해도 무시하고 가만히 창문을 쳐다보았다.
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흘러도 이세벨은 방 안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신경 쓰여 죽겠다면 찾아가는 게 어때?”
내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로저가 하품하더니 지루함을 참지 못해 제안했다.
“대화에 껴드는 건 좋지 않은 생각 같은데.”
“그럼 몰래 엿듣든가.”
진심으로 말한 건가.
“너, 미쳤어?”
바커스 부인 앞에서 거짓말 한번 못 하던 로저는 어디 가고 이제는 엿듣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래놓고선 당황한 기색 없이 평소처럼 당돌한 얼굴이다.
로저한테 거짓말을 가르친 지 고작 몇 주전인데……. 알고 보니 호랑이 새끼에게 사냥법을 가르쳤구나.
로저도 로저였지만 엿듣자는 제안에 솔깃한 나도 문제였다.
화가 단단히 난 이세벨 기분이 풀린지 며칠 안 되었는데도 나는 또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엿듣다가 들키면 이번엔 정말로 이세벨이 날 저택 밖으로 쫓아낼지 모른다.
“됐어.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
내가 도로 앉자 로저는 기가 찬 듯 피식거렸다.
“망설였으면서.”
“그래도 너보단 낫지. 이제 방으로 가자. 여기 있다가는 창문만 볼 거 같으니까.”
* * *
학교에서 돌아온 펠리시아와 버나드를 포함해 소파에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했다. 이세벨은 바커스 부인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보드게임이 끝난 뒤에는 로저가 어렸을 적 아버지와 같이 옆 대륙에 갔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래도 이세벨은 바커스 부인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놀고 형제가 각자의 방에 들어가고 로저와 내가 체스를 두기 시작해도 이세벨은 바커스 부인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언성이 들리지 않은 걸 보니 싸우는 거 같진 않고, 둘은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그동안 노을이 저물었다.
“아, 다시 해.”
로저가 체스보드를 엎었다. 오랜만에 상대와 두는 체스에 이세벨과 바커스 부인에게 쏠렸던 관심이 분할되었다.
몇 수만에 체크메이트가 되자 로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을 구겼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체스를 둔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벌써 세 판이나 진 게 말이 돼? 너 밑에 기보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예전보다 체크메이트 속도가 빠르자 로저는 날 수상하게 여겼다.
“로저, 넌 오프닝부터 문제야. 기물들이 먼저 앞으로 빠진 건 좋은데 한 번에 갈 수 있는 길을 자꾸 가지 못하고 조금만 움직이잖아. 그러니까 기물들이 서로 길을 막지.”
내가 충고하자 로저는 듣는 척도 안 하며 체스 말을 노려보았다.
“노려보면 답이 나와?”
“조용히 해 봐.”
그래도 로저의 체스 실력은 형편없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또래에 비해 잘 두는 편이었고, 심지어 나를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물론 예전에 그랬지 지금 나에게는 뼈도 못 추렸다.
‘이제 나에게 못 비비지.’
펜턴 공작에게 배운 것도 그렇고 요 며칠간 혼자 체스만 공부한 게 성과가 있나 보다.
하지만 폰을 이용하는 건 여전히 나에게 까다로웠다.
공작에게 충고를 받은 이후 폰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폰이 뒤처졌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도 나중에 또 폰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
“폰이 뒤처지지 않게 잘 활용해야 하는데.”
나는 네 번째 게임을 위해 기물들을 정리했다.
“폰을 활용하는 법? 그건 쉽지.”
로저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쉽다고?”
“폰이 뒤처지지 않게 그냥 앞에 둬. 어차피 앞만 가는 놈이잖아.”
“로저, 방금 넌 네가 나한테 지는 이유 1000가지 중 하나를 말했어.”
“뭐?”
로저가 바로 발끈했다.
아무리 연습 게임이라 하더라도 신중하게 게임을 하는 나에게 막 두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나는 로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후 체스보드를 보았다.
“정 모르겠다면 키토 남작이 준 기보를 보든가. 거기에 해결책이 있을 수 있잖아.”
“그러는 게 좋겠어.”
나는 책상 서랍에 숨겨두었던 기보를 꺼냈다. 남작의 기보를 매일같이 보는데도 새로운 수가 있었다. 그러니 로저 말대로 이 기보 안에 해결방안이 있을 수도 있다.
찬찬히 기보를 살폈다. 해결방안을 얻기 위해서 눈을 굴렸지만 실제로는 완벽에 가까운 수에 약간 자신감이 떨어졌다.
“기보를 보다 보면 생각하는데 키토 남작은 사실 체스의 신이 아닐까?”
“뭔 바보 같은 소리야.”
난 언제 키토 남작처럼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지금 내 나이가 어리다 해도 실질적으로 성인이었다. 가끔 내가 이곳에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의심했다.
“키토 남작은 왜 날 제자로 둔 걸까?”
자조가 섞인 말투에 로저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냅다 폰을 움직여 게임을 시작했다.
“왜긴. 재능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예전에는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마르센 가를 견제하기 위해 날 제자를 두는 둥 얘기했잖아.”
“그거야 예전 일이고.”
로저는 언제 적 얘기를 하냐며 날 노려보았다.
“오랫동안 남작님을 보지 못했어. 공작가에 가지 못했고. 또 이 재능이 얼마 가지 못하고 나중에 꺾이면 어쩌지?”
“키토 남작은 딱히 걱정 안 하는 거 같던데.”
“걱정을 안 하신다고?”
로저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말했잖아. 키토 남작과 공작님이 네 자랑을 했다고. 질릴 정도로 자랑을 하셔서 네가 그분들 자식인 줄 알았다니까.”
“……고마우신 분들이야.”
“반대로 생각해. 그분들은 너의 무한한 재능을 알고 계신 거야. 솔직히 말해서 네가 좀 부러웠어. 나에게도 한때 쓰레기 같은 스승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 자식은 날 칭찬하지 않았거든.”
로저는 그때 일을 회상하는 건지 표정이 굳어졌다.
“아주 개자식이었지. 물론 지금도 개자식이고.”
“…….”
“그리고 노파심에 말하는데 난 이제 키토 남작도 펜턴 공작도 의심하지 않아. 네가 없는 동안 공작 가에 찾아가면서 그 두 분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느꼈거든.”
“…….”
“자, 이제 네가 둘 차례야, 리제.”
로저가 체스보드를 툭툭 치며 말했다.
로저에게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 후회하다가 체스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반성과 자책은 그만하고 한계와 의심을 극복해야 했다. 폰을 골똘히 보던 나는 로저가 했던 말처럼 해볼까 싶다가도 다시 갈등했다.
“리제, 누가 있…….”
“쉬잇. 조용히 해 줘.”
“아니, 누가 온 거 같다고.”
집중력이 깨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인기척과 함께 문틈 사이로 그림자가 보이긴 했지만 누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심심해서 놀러 온 쌍둥인가 아니면 로저와 친해지기 위해 찾아온 버나드나 펠리시아인가.
“누구야?”
“…….”
“뭐야, 음침하게 있지 말고 문 열……!”
내가 말하자마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와 함께 무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이세벨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체스 말을 쥐고 있는 날 내려다보았다.
“어, 어머니?”
정말로 이세벨이다.
“……언, 언제부터.”
망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제부터 이세벨이 문 앞에 있었던 거지? 설마 여태 로저와 내가 나누었던 대화를 다 들은 걸까?
“뭐 하는 거니?”
이세벨의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체스 말을 툭 떨어트렸다. 로저는 사색이 된 내 얼굴을 힐끔 살피더니 내 앞을 막았다.
“아, 그, 그게 부인. 제가 체스를 두자고 했어요. 리제가 싫다고 했, 했는데 제가 너무 심심해서…….”
로저의 거짓말이 전보다 늘긴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불안했다. 이세벨의 눈매가 서서히 매서워지는 것도 모른 채 로저는 말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내 능숙한 거짓말도 이세벨에게 안 통하는데 로저의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다.
“어머니, 그저 체스를 두고 있었을 뿐이에요. 다른 아이들도 두는 것처럼요.”
“…….”
“게임이잖아요. 그저 게임을 했을…….”
“리제.”
이세벨은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말을 중간에 끊었다.
말문이 막힌 나와 다르게 이세벨은 날 주시하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현관 앞이 소란스러웠다.
회사로 갔던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들어왔는지 하녀들의 움직임들도 분주해졌다. 저택에 온 아버지는 언성을 높이며 하녀들과 고용인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이세벨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트린 체스 말이 굴러와 내 발에 닿았다.
“리, 리제. 괜찮냐?”
괜찮냐고?
아니, 전혀.
“다 끝났어.”
어쩌면 영원히 체스를 두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