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내 남편의 신데렐라 (1/46)


#1. 내 남편의 신데렐라
2023.05.01.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방. 그런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클로에는 멍하니 바깥을 응시했다.

밖은 눈보라가 한창이었다. 그것은 겨우내 가끔 오던 고향의 눈과는 달랐다. 북부의 눈보라는 사람 하나쯤은 즉금 얼릴 수 있을 정도로 거셌다.

‘괜찮으시려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클로에가 돌연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까짓 재해에는 끄떡없을 정도로 막강한, 그녀의 남편을.

남편이 마물 토벌을 위해 원정을 떠난 지 벌써 열흘이 훌쩍 지났다. 오늘마저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가 저택을 비운 지 보름째가 되는 것이다.

은연중 창문을 짚던 클로에가 차가운 감촉에 놀랐다. 황망히 손가락을 떼자, 유리 위에 새겨진 짙은 지문이 보였다.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창문은 맑다 못해 투명했다. 그곳에 짙게 남아버린 지문 자국이 유일한 흠이 되었다.

아르헨 공작가에서의 클로에처럼.

클로에는 그곳에 다시금 서리가 낄 때까지, 더러운 자국을 응시했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 될 정도의 좁은 시야. 재해와도 같은 눈보라를 힘차게 거스르며 달려오는 자들.

가장 전방에 선 자. 새까만 마필을 몰고 오는 자. 긍지 높은 아르헨 공작가의 깃발을 내보이는 자.

칼리스 아르헨.

아르헨의 가주이자 클로에의 남편이 영웅의 터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저건…….’

낯선 여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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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에선 가주의 귀환을 기념하는 축하 연회가 열렸다.

하지만 공작을 맞이하는 저택의 일원들은 행복해 보이기는커녕 숙연했다. 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해 왔던 클로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여자였지?”

“응. 그것도 가주님 앞에…….”

저들의 천박한 대화에 가주를 올리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결례를 끼치는 무뢰한들을 꾸짖어야 마땅하나, 클로에는 차마 그러질 못했다.

정작 그녀마저도 그들의 대화 주제에 온 신경이 쏠려 있으므로.

‘……여자.’

출정에서 돌아온 칼리스가 누군가를 데리고 온 적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종종 보호 명목으로 피난인들을 데려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함께한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앞선 그들과 달리 칼리스와 동행했다. 또 그의 마필에 탑승한 것도 모자라 품에 안겨 보호되기까지.

그 여자는 대체 누구길래 과한 대우를 받는 걸까.

‘혹시 여분의 마필이 없던 걸까.’

그럴 리 없다. 그랬더라면 칼리스는 다른 기사를 시켜 여자를 에스코트했을 것이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허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렵이었다.

클로에가 애써 잡념을 떨쳐냈다. 거듭 덮쳐오는 불안감을 외면하며, 그녀는 당장 있을 연회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들 오랜만이군.”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행차했다.

클로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연하게 그의 앞까지 다다른 후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인사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녀의 인사가 끝났으니 이번엔 칼리스의 차례였다.

평소라면 서슴없이 행해졌을 입맞춤이 오늘은 늦어만 졌다. 허공에 덩그러니 놓인 하얀 손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연거푸 움찔거렸다.

‘……어째서?’

‘그 일’ 이후 클로에와 칼리스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졌다.

하지만 행사나 인사 등 의례적인 것들은 전부 치렀다. 그래도 가주와 부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부라면, 하다못해 초면인 이성끼리도 지키는 관습을 선뜻 해내지 못하고 있다.

클로에가 남편의 의중을 알아채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칼리스의 뒤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 인영조차 보이지 않는 그 여자의 정체를 클로에는 대번에 눈치챘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여자의 걸음걸이는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었을지언정 누추한 때를 벗길 순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추워 불그스름해진 뺨도, 영양분이 충분치 않아 앙상한 몸도, 관리 없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도.

“칼!”

여름의 햇살을 품은 것처럼 푸근한 미소와, 따스한 목소리도.

전부.

‘아…….’

모를 수가 없다.

저 여자가 칼리스 아르헨의 ‘그녀’라는 사실을.

***

“부, 부인? 어떻게 해드릴까요!”

먹먹했던 귀 안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각이 선명해지자, 시각 또한 뚜렷해진다.

번뜩 정신을 차린 클로에가 앞을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 자신의 앞으로 목걸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 만찬을 위한 치장이 한창이었지.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눈이 급기야 건조해졌다. 잇따라 부드럽던 인상에 금이 갔다.

시녀의 손에 들린 목걸이 두 개.

저건 클로에가 오늘 있을 만찬을 기대하며 며칠 전 준비했던 것들이다.

남편인 칼리스가 자신을 싫어하더라도 클로에는 하염없이 노력했다.

저를 사랑해주길 바라서, ‘그 여자’처럼 이성으로 보아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한낱 인간으로라도 취급해주길 바라서.

오늘 상대가 저지른 무례를 보아하니 그는 클로에를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는 듯하지만.

“……그냥 아무거나 해주렴.”

그 사실도 모르고 애쓰다니, 실로 창피한 일이었다.

지겹다는 듯 목걸이로부터 시선을 돌린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졸지에 결정권을 갖게 된 시녀는 눈치를 보다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선택했다.

가느다란 목선 위로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자리를 잡았다. 초췌해 보이던 클로에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가려지는 듯했다.

“이만 내려가자꾸나.”

늘 옷매무새도 깐질기게 신경 쓰던 클로에인데, 오늘은 별다른 확인 없이 넘어갔다.

시녀와 함께 내려간 식사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가 늦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 클로에는 비어 있는 상석을 바라보다, 얌전히 자리에 착석했다.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칼리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 미리 음식을 준비해드릴까요?”

하물며 만찬 시간으로부터 반 시간이나 지났을 때까지도.

그쯤 되자 집사가 다가와 질문했다.

“괜찮으니 더 기다려보도록 하지.”

클로에는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약속 시각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을 때쯤, 저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한참이나 깔깔대던 두 사람은 클로에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게다가 칼리스는 옆 여자의 눈치를 보기까지 했다.

그제야 클로에는 깨달았다. 칼리스가 고의로 만찬에 지각했음을. 두 사람은 그녀가 홀로 식사하고 떠나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요리는 벌써 준비되었답니다. 앉으세요.”

클로에는 금이 간 마음을 감추었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그들을 안내했다.

“자, 앉자.”

이후 칼리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상석에 앉았다. 와중에도 제 옆의 여자를 챙기기 바빴다.

한낱 사과라도 바란 클로에는 문득 서운해졌다.

“……그래서 저분은 누구시죠?”

식사가 나오기 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클로에가 대화를 시도했다.

“알면서 묻는 건가? 내가 모셔온 손님이지.”

“오늘은 제게 소개조차 해주지 않으시길래요.”

클로에는 처음 여자를 대면했을 때를 떠올렸다.

칼리스를 귀여운 애칭으로 부르며 달려오던 여자는 클로에를 보자마자 돌처럼 굳어버렸었다.

마주한 이상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예법이다. 하다못해 칼리스라도 손님을 소개해줘야 할 터.

하지만 두 남녀는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여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야 할 때다.

“저…….”

그때, 눈만 끔뻑이고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얇고 간드러진 음성이 한 마리의 꾀꼬리 같았다.

“저는 헬레나라고 해요.”

헬레나.

클로에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꼭 제 둘째 이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낙인처럼 그녀 뒤에 따라오던 이름.

확언을 듣고 나니 머리가 차가워진다. 쿵쿵, 연신 빠르게 뛰어대던 심장이 급격히 느려졌다.

“……반가워요, 헬레나 씨. 클로에 아르헨입니다.”

뒤따른 소개에 헬레나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정인을 바라보던 칼리스가 클로에를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에는 씁쓸해졌다.

그녀가 새롭게 입은 이름을 고깝게 여기는 것이었다. 허울만 가진 ‘아르헨’ 이름조차 싫어서.

‘……두 사람은 내 모든 것이 싫은가 보구나.’

알고 있었지만, 역시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낀 장애물에 불과하다.

클로에는 입을 닫은 채로 식기를 들었다. 그녀의 노력이 사라지기 무섭게 세 사람 간의 대화 또한 사라졌다.

오로지 클로에만이 만찬에서 배제된 채로 식사는 이어졌다. 헬레나와 칼리스는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뛰어놀기 바빴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재료나 유래 따위를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칼질이 서투른 헬레나를 위해 고기고 채소고 일일이 잘라주기까지.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도 클로에는 그 역겨운 행위를 직관해야만 했다.

“헬레나는 여기서 계속 머무를 예정이야.”

클로에가 음식을 삼키는 둥 마는 둥, 대충 식사를 마무리 지었을 무렵이었다.

내내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칼리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 돼.’

그때 클로에는 적신호를 감지하고 말았다. 불안감이 그녀를 덮쳐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공작가의 일원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 대화를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샅샅이 엿듣고 있을 테다.

“부디 당신이 헬레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길 바라.”

연이은 말에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이에 짓눌린 입술에서 비린 맛이 맴도는 순간에도.

‘안 돼. 안 돼. 안 돼.’

저 입에서 ‘그 말’이 나와서는 안 되었다.

비단 클로에가 받을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았다.

그녀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지난날 함께했던 과거를 위해서라도, 칼리스는 그 말만은 삼켜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거든.”

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칼리스는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내뱉은 더러운 현실이 클로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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