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작가의 외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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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작가의 외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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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작가의 외톨이
2023.05.02.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클로에의 다리가 맥없이 풀려버렸다. 문 벽을 타고 내려오던 그녀는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
클로에는 목을 쥔 채로 꺽꺽댔다. 숨을 쉬기 위해 노력할수록 호흡은 더욱 가빠질 뿐이었다.
눈과 코, 그리고 입에서 투명한 액체가 쏟아졌다. 지쳐버린 그녀가 숨을 쉴 의지조차 포기했을 때 비로소 몸은 평온을 되찾았다.
‘……대체 어떻게.’
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사랑을 지껄이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다.
‘당신도 알잖아. 내가 헬레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난 일 년간 아무 탈 없이 당신의 남편 행세를 했으니, 이젠 내 삶을 살게 해줘.’
차라리 미안한 기색을 내비칠 것이지.
그랬더라면 클로에는 속절없이 남자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당당하게 남편의 도리를 다 했다고 거들먹거리는 칼리스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그는 정녕 지난 반년간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일’이 있은 후, 칼리스는 클로에를 저택에서 없는 사람 취급 했다. 영주민들과 공작가의 일원들까지 합세시켜서까지.
사교 모임에서나 그녀는 겨우 사람 취급을 받았다. 권력마저도 없었더라면 그녀는 아예 벌레 신세가 되었을 테다.
게다가 칼리스는 몇 주간 저택을 비우더니 합방을 거부했다. 이후 그녀에게 주어진 방은 다락방보다도 못한 자그만 방이었다.
그뿐일까. 북부의 추위가 낯설던 그녀가 고뿔을 심하게 앓았을 때도, 저택을 침범한 마물에 습격당해 피를 보았을 때도, 나 몰라라 외면했다.
그런데도 클로에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던 건 그에게 갖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인격 모독을 인내해왔던 건, 그럼으로써 그의 분노를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데면데면해진 사이가 언젠간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단단히 화가 난 그가 언젠간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전부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돌아온 건 또 다른 모독이었다.
***
클로에와 칼리스가 결혼하게 된 계기엔 많은 것이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두 사람 다 원치 않은 결혼이었다는 것이다.
시초는 무려 삼 년 전, 제국과의 전쟁이 터져버리면서였다.
평화를 지키던 발론트 왕국 앞으로 갑작스러운 제안이 내려왔다.
제국과 통합해 그들 또한 제국의 일원이 되는 것.
왕국이 통합에 응하지 않을 시엔 전쟁이 선포될 테니, 사실상 협박과도 같았다.
제안을 수락해야만 한다. 거절해야만 한다. 수많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왕은 끝내 거절을 택했다.
「제국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국가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순 있을지언정 조국을 등질 수는 없소. 발론트 왕국은 프리히드 제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거절하겠소.」
왕의 의견을 확인한 제국은 예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서로의 국경을 가르는, 빈 황무지인 리안 강에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제국에 비하면 왕국은 약소국에 불과했다. 왕국의 기사들은 패배를 직감하고도 열심히 맞서 싸웠다.
그들의 가족을, 친우를, 정인을,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그중엔 왕실의 공주인 클로에도 포함이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그녀는 기사들처럼 무력을 쓸 순 없었다. 대신 왕실 몰래 간호를 자처해 밤낮으로 기사들을 돌봤다.
하지만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도 냉혹한 현실을 뒤바꿀 순 없었다.
어느새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기사의 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결국, 왕국의 기사단은 최후의 보루를 쓰기로 했다. 기사단의 일원을 제국 쪽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병상에 있는 기사들은 제국의 막사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둘 중 하나였다.
제국의 왕을 암살하거나, 그와의 협상에서 성공하는 것.
성공률이 무(無)에 임박한 임무였다. 작전을 위해 떠난 기사들이 죽지라도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임무가 시작된 지 열흘. 그동안 보내진 기사는 무려 서른한 명, 도중 돌아오지 못한 자는 스무 명.
「제국과의 협상에 성공, 제국 끝내 종전 선언…….」
제국의 막사로 스물한 명째 기사가 돌아왔을 때, 전쟁은 끝을 알렸다.
놀랍게도 황제와의 협상에 성공한 것이다.
「협상에 성공한 기사는 누구?」
왕국을 구한 스물두 번째의 기사는 바로 칼리스 아르헨이었다.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에 모두가 놀랐다. 두뇌도, 검술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가 왕국을 구제하다니!
게다가 아르헨 백작가는 선조가 남기고 간 빚더미에 서서히 몰락해 가던 곳이 아니던가!
「‘칼리스 아르헨’, 왕국을 구한 세기의 영웅!」
하지만 그깟 과거 따위, 칼리스의 찬란한 업적에 의해 말끔하게 사라졌다.
칼리스 아르헨! 우리의 영웅!
그의 이름은 왕국 모든 곳에 널리 퍼졌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그는 그야말로 왕국이 섬기는 신이 되었다.
왕실도 처음엔 아르헨의 업적을 높이 샀다. 금은보화는 물론 작위까지 내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왕실을 뛰어넘었을 때, 국왕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이러다간 왕실의 위엄이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칼리스의 반역 위험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칼리스를 제지할 방법을 탐색하던 발론트 15세는 곧 명답을 떠올리고 말았다.
바로 제 딸아이를 칼리스와 혼인시켜 영웅의 발을 왕실에 묶는 것.
그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줌으로써 무궁한 혜택을 주지만, 왕의 자리는 넘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영웅의 아내가 될 적임자로는 3왕녀인 클로에가 제격이었다.
위 왕녀들은 이미 혼처가 정해져 있었으며, 아래 왕녀들은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 나이기에 혼인을 주도하는 건 비도덕적인 일이었다.
클로에는 본디 가장 고결한 남자와 결혼했어야만 했다. 공주의 혼처로 적합하지 않단 반대 목소리도 있었으나, 세기의 영웅을 묶을 수로는 나쁘지 않은 타산이다.
발론트는 제 딸에게 혼처가 정해졌음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혹여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그 대상이 칼리스임은 알리지 않았다.
세기의 영웅, 칼리스는 의외로 깔끔하게 발론트의 계약을 받아들였다.
공작위와 공작이 꾸릴 수 있는 거대한 영지. 그리고 매달 왕실에서 주는 지원금. 이 어마어마한 보상을 무시할 수 없던 것이다.
사실 칼리스는 애초부터 반역처럼 번거롭고 머리 아픈 일을 궁리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뜻밖의 횡재가 되었다.
대망의 결혼식 날, 클로에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마주했다.
그녀의 앞에서 기도를 받는, 추후 남편이 될 사람은 의아하게도 세기의 영웅이었다.
아비에게 들은 바로는 상대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구혼 신청을 했더랬다.
그렇다면, 왕국은 물론 저의 평화까지 구한 영웅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영웅님께서 내가 좋다고 청혼하셨다니.’
세상을 구한 용사의 구혼이라니. 이토록 환상적인 일이 있을 순 없으리라.
항상 영웅을 동경하고 있던 클로에가 사랑에 빠지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두 사람의 신혼은 괜찮았다. 자신에게 구혼했다면서 적극적으로 애정을 보이지 않는 칼리스가 의아하긴 했지만.
‘그대는 정말 똑똑한 여자야. 당신이 있기에 공작가도 이렇게 클 수 있었겠지. 부인은 내 아내이자, 은인이야.’
서로를 신뢰하고 돕는 것 또한 사랑의 종류라고 믿었다.
공작가의 일원들도, 영주민들도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다. 덕분에 늘 왕궁에서만 지내오던 클로에는 출가 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나날은 계속되는 듯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이 결혼한 지 반년이 되던 무렵 왕국을 뒤흔들 거대한 스캔들이 터진다.
「비운의 신데렐라」
가장 큰 신문사인 밀리언 페이퍼에서 칼리스의 옛 연인에 관한 기사를 수록했다.
늘 그에게 이타적이었지만, 남자가 영웅이 되자마자 비참하게 버려진 여자의 이야기를.
클로에는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자신에게 반해 구혼했다던 남자가, 사실 오래간 교제했던 여자가 있었다니?
하지만 칼리스가 기사가 터지기 무섭게 저택을 나선 바람에 물을 틈도 없었다.
그의 대답은 다음 날, 같은 신문사에서 발간한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비운의 신데렐라에 이은 비운의 영웅?」
기사에 실린 내용은 이러했다.
‘그가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교제했던 오랜 연인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 연인을 고의로 등지려 한 적은 없었으며, 이는 전부 왕실의 소행이다.
왕실은 공주와의 결혼을 강행했으며, 이는 왕국민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이게 무슨……. 아버지께선 전하께서 내게 구혼하신 거라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신문을 읽은 클로에는 혼란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건 시초에 불과했다.
왕국의 제일가는 신문사인 밀리언 페이퍼는 왕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곳이었다. 그들은 공작가의 스캔들을 더 널리 퍼뜨렸다.
칼리스 또한 멈추지 않고 폭로전을 이어나갔다.
계악서에 똑똑히 명시되었고, 계약 내용을 발설하면 안 된다는 위반 사항을 반하지도 않았으니, 원칙적으론 왕실의 지원이 끊길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르헨 공작의 후속 기사에 따른 동정 여론이 생겨났다. 세기의 영웅이 사창가에 팔려가듯 왕실에 팔려갔다며, 왕실 쪽으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대체 공작님께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이실 수 있는지……!’
한편 공작가에서는 클로에가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여보. 우리 이야기를 조금…….’
‘여보?’
‘…….’
‘내가 지난 반년간 그대와 함께하느라 얼마나 역겨웠는지 모르나 보군. 이젠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클로에 발론트.’
반년간 그녀와 원만한 사이를 이어나가던 칼리스 또한 그녀를 질책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 끔찍했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며, 클로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자신이 알던 사실이 모조리 거짓이었음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끝내 남은 것은 그녀 혼자 무럭무럭 키워나가던 사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