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녀와의 만남
(3/46)
3. 그녀와의 만남
(3/46)
#3. 그녀와의 만남
2023.05.03.
클로에가 왕실에게 정략혼의 전말을 물었을 땐 몰랐다는 간단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제야 그녀는 칼리스의 구혼 사실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인지했다.
뒤늦게 진실을 고백한 왕실은 저들의 처지를 이해해달라 부탁했다. 그의 연인에 대해서도 물어보자, 왕실은 이번에도 몰랐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고의성이 없던 왕실에 클로에가 할 수 있는 항변은 없었다.
왕실이야 시간이 흐르면 비난의 여파가 잠잠해질 테지만 클로에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공작령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미운 오리가 되었다.
답답하고 비참한 상황이나 클로에가 왕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없었다. 기사로 여론을 바꾸려 한들 칼리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순 없을 테니까.
차라리 왕실이 칼리스와의 계약 사실을 밝혔더라면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진 않았을 테지만, 계약 사항에 대한 발설은 금기되어 있었다.
이를 위반할 시엔 상대에게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했으므로 왕실은 그냥 침묵을 택했다.
숫제 클로에만에게라도 귀띔해주었다면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는 일이라도 없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던 클로에는 남편이 제게 험한 말을 내뱉을 때도, 필요할 때만 찾을 때도, 군말 없이 따랐다.
그리되니 저택의 사용인들도 클로에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의 무례한 푸대접에 클로에도 처음엔 반발했지만, 칼리스에 의해 기각되었다.
이후 그녀는 저택 내에서 어떤 불상사를 당해도 함구해야만 했다.
무지가 죄라면 죄였을까. 클로에는 결국 자신이 꾸렸던 터전에서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다행히 사교계 내에서 그녀의 입지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약육강식인 귀족 세계에서 왕실의 유치한 수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마저도 칼리스의 이익을 위해 돌아갔지만 말이다.
일평생 몰락 귀족으로 살아온 공작은 사교계에 입지를 다지지 못한 상태였다.
영웅이 된 이후엔 사교계에 이따금 얼굴을 내비치곤 했지만, 영웅이란 칭호는 평민들에게나 신비로웠지 귀족들에겐 큰 존재가 아니었다.
클로에의 왕족 신분이라면 몰라도. 결혼 이후 칼리스는 냉큼 그녀를 이용해 사교계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도 변함없이.
철저한 이용이었지만 클로에는 그래도 좋았다. 칼리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그나마 죄책감을 덜어서.
그래도 이렇게 다가가다 보면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언젠가 녹지 않을까 싶어서.
미련한 사랑. 클로에는 그깟 감정 하나를 버리지 못해 멍청함을 택했다.
***
“……헉!”
가슴에 돌덩이가 나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겁한 클로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등 뒤가 축축한 것이 밤새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었다.
악몽의 여파인지 등이 오싹거리고,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끔찍했지.’
클로에가 가장 지우고 싶던 과거.
모두의 앞에서 클로에의 삶은 끔찍했노라고 고백하던 공작.
사용인들이 저를 보며 웅성거리던 게 생생했다. 자신을 손가락질한 채로 연신 윽박지르는 공작 또한 선명했다.
‘그만 생각해야겠어.’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 그녀는 저를 다독이며 애써 진정시켰다.
겨우 유지한 차분함으론 아침 단장을 도와줄 시종들을 불렀다.
딸랑, 딸랑.
종을 울렸건만 부름에 답하는 이가 없었다.
종은 공작가 저택 전체에 울리게끔 되어 있었다. 사용인의 전부가 ‘실수로’ 듣지 못할 우연은 없을 터.
그러잖아도 위태위태하던 클로에의 입지가 끝내 완벽하게 무너져내린 것이다.
바람이 불어 와르르 무너져버린 모래성처럼.
실망할 여력도 없었던 클로에는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도로 눈을 감으려던 무렵이었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발을 들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녀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클로에와 마주한 그녀는 멋쩍은 듯 어색하게 미소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마님. 저희가 이제부터 마님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도울 수 없어?
하녀는 마치 저들이 타의적으로 클로에를 돕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공작님꼐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앞으로 마님의 시중을 들지 말고, 헬레나 님의 시중을 들으라고……. 설령 마님이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무시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
“그, 그래도 제가 도와드릴게요. 지금 다들 헬레나 님 쪽으로 이동했고……. 저는 부엌에 가 점심 만찬을 준비해달라 아뢰겠다고 하며 나왔으니까…….”
목소리를 높이는 하녀가 무색하게 그녀의 말소리는 점점 희미해진다.
충격적인 소식이 클로에의 머리를 연거푸 강타했다.
조금 전 시중들의 묵살은 괴롭힘이 아닌 충성의 의미였다. 이런 유치한 것을 사주한 자는 놀랍게도 칼리스와 그의 정인이며.
“……정녕.”
클로에는 다시금 깨닫는다.
남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인을 두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면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정녕 나를 소리 없이 죽일 심산이시구나.”
어느새 클로에는 칼리스에게 그러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죄책감과 사랑. 그에 부응하는 보답이 이것이었다.
클로에는 제게 사실을 고해준 하녀, 제인 덕분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단장을 도운 제인은 바깥의 소음이 사그라들었을 즈음 잽싸게 도망쳤다.
홀로 남은 클로에는 화장대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수고해 치장했을지라도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칼리스를 위한 큰 연회를 열어줄 계획이었다. 타국으로 출장을 떠났던 고위층 자제들이 귀국했다길래, 친목도 다질 겸 연회에 부를 참이었다.
모두 부질없게 되었지만.
멍하니 앉아 있던 무렵, 클로에의 방문 너머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작 문을 두들기는 소리 따위에 악의가 실려 있을 수 있음에 놀라웠다.
들어오라는 허락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방문객은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시녀로, 클로에를 눈에 띄게 싫어하던 시녀였다.
시녀 셰인은 클로에를 발견한 후 웃고 있던 눈매를 거두었다. 예상과 달리 준비가 완벽하게 된 클로에를 보고 당황한 것이었다.
“흠, 흠. 곧 티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지금 저와 함께 내려가시면 됩니다. 헬레나 님께서 함께 담소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제 도움 요청을 완벽히 묵살할 땐 언제고, 이제 와 하는 말이 헬레나의 초대에 응하라니.
공작가의 시녀인 셰인도, 직위뿐이지만 한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칼리스도 잘 알 테다.
두 사람이 친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선, 신분이 낮은 자가 일방적으로 높은 자를 초대하는 것은 금기시된다는 걸.
더군다나 헬레나는 저택에 입주하지도 않은 일개 손님이었다. 일개 손님이 어찌 공작부인을 초대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 누구도 아무런 첨언을 하지 않았다니.
“가도록 하지.”
가봤자 우스움만 당할 게 뻔하다.
사실 클로에는 헬레나와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듣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러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조율을 해주어야겠는데.”
“……예?”
“헬레나 양과 단둘이서만 대화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전하께선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헬레나와의 대화를 통해 클로에의 선택이 현저하게 바뀔 것이었다.
그녀가 말이 통하는 사람인지, 혹은 칼리스와 비슷한 짐승인지가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셰인은 클로에의 의견을 전달해주었다.
돌아간 그녀는 머지않아 클로에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헬레나와 단둘이 만나게 되었다는 희소식과 함께.
***
“공주님! 와주셔서 영광이에요.”
짐승이로구나.
상대의 첫인사말을 들은 클로에는 대번에 판별을 끝냈다.
비록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을지라도 헬레나가 미운 적은 없었다.
굳이 상대에게 잘 보이고픈 마음은 없었으나, 반대로 밉보이고 싶지도 않은 정도.
하지만 헬레나의 해맑은 인사를 듣고 나니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참 잘 맞는 한 쌍의 영혼이라고. 저 여자도 별반 다를 거 없는 사람이라고.
엄연한 호칭이 있음에도 구태여 옛날 호칭을 부른다는 것은, 클로에가 공작부인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귀족 사회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기본적인 상식은 알고 있을 터.
고의적인 행동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반가워요.”
상대의 악의적인 호칭에 클로에의 마지막 남은 인내심이 떨어져 나갔다. 또, 아주 예부터 그녀에게 남은 죄책감도 흔적 없이 스러졌다.
‘그래. 내가 이 여자를 고려해서 뭘 한다고. 멍청한 생각이었지.’
이제 정말로, 클로에에겐 보호 본능밖에 남지 않았다.
“헬레나 양.”
클로에 또한 같은 이치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오로지 태생만을 논해 자신이 공주로 불린다면, 헬레나 또한 고상하고 거추장스러운 호칭을 가져가지 못했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헬레나는 이내 주변 하녀를 불러왔다.
차가 준비될 동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헬레나는 앞에 준비된 다과를 신경질적으로 씹다가, 차가 달여진 후에야 표정을 풀었다.
채워진 찻잔에 클로에가 먼저 차를 음미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던 헬레나가 이내 클로에의 몸짓을 모방했다.
두 번째 잔이 채워졌을 때였다.
“공주님께 저를 인사드리고 싶어서 뵙자고 했어요!”
상대의 입이 먼저 열리며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클로에를 모욕하기 딱 좋은 상황.
이번에도 무지로 인한 결례는 아니리라.
“그렇군요. 반가워요.”
클로에는 그에 큰 신경을 두지 않았다.
왕실에서, 그리고 사교계에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녀는 저런 자들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역시 그녀가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자 헬레나는 금세 시무룩해진다.
“저를 따로 보길 원하셨다고요.”
“저희는 이제 함께 살 식구잖아요!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순진무구하고 사랑스러운 미소와 꽃을 꺾어온 듯한 분홍빛 눈동자.
‘비운의 신데렐라’ 기사에서 읽었던 외양 그대로다. 앳된 얼굴이 참으로 순진해 보인다.
그리고 그 악의 없는 얼굴로 클로에를 헐뜯으려 애를 쓰고 있다.
“저런. 저희는 친해질 수 없는걸요.”
상대가 짐승이란 걸 깨달았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으리라.
“……뭐라고요?”
“그대는 원래대로라면 내게 말도 붙이지 못하니까.”
무미건조했던 클로에의 얼굴 위로 싸늘함만이 잔해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