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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린 뺨 (4/46)


#4. 아린 뺨
2023.05.04.


“공작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안 될 건 없죠.”

헬레나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 클로에의 악의를 알아차렸다.

“나는 원래대로라 말하였지. 조금 더 쉬운 말로 설명해주길 바란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주게나.”

처음, 클로에가 헬레나에게 예의를 갖추었던 건 그래도 그녀에게 남았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감정조차 스러진 지금, 공작부인이 정부 따위에게 차릴 예절은 없다.

“됐어!”

두 차례 이상 무시당한 헬레나가 끝내 폭발했다. 그녀는 어쭙잖게나마 사용하고 있던 경어를 멈추었다.

원래대로라면 왕족이자 공작부인인 그녀에게 보인 무례를 꾸지람해야 마땅하지만, 이 저택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

지켜지지 않을 잣대이므로 클로에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당신, 칼리스를 사랑했다며?”

연거푸 망신을 당한 헬레나가 직격탄을 던졌다.

클로에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이 스러질 뻔했다.

‘……저 여자가 그걸 어찌.’

클로에는 칼리스에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다.

완벽하게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가 눈치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이께서 그러시던가?”

그렇다면,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클로에를 무참하게 짓밟은 것일까.

제 앞에 사랑했던 여자를 당당하게 들이미는 지경까지 이르면서.

“불쌍해서 어떡해.”

클로에의 반문에 헬레나는 히죽 웃었다.

‘어쩜!’ 높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은 그녀는 이윽고 손뼉도 치며 제 웃긴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는데도.”

“…….”

“처음부터 그는 나를 이곳에 들일 생각이었어. 공주님.”

처음부터?

알 수 없는 말에 클로에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말끔했던 인상이 비로소 구겨지자, 헬레나는 적잖게 만족한 듯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처음엔 강압적이었지만 단순히 억지로 공주님과 결혼한 건 아니야. 계약이 있었거든.”

“…….”

“왕실과 그이가 계약했을 때, 칼이 내게 당신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말하더라고. 하지만 일 년이 지나면 나를 데리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부탁했지.”

헬레나의 말이 진실이라면 칼리스와 클로에는 정략혼이 되는 셈이다.

단순히 왕실의 강압적인 명령 아래서 하게 된 매춘 같은 결혼이 아니라.

헬레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일개 평민이 꾸며낼 수 있는 내용도 아닐뿐더러 저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얼추 다 맞춰지기 때문이다.

굳이 의문을 제기한다면 배경을 알고 있는 헬레나가 굳이 ‘비운의 신데렐라’ 같은 기사를 쓴 이유 정도.

불현듯 스쳐 지나간 질문의 답은 클로에 스스로 찾을 수 있었다.

왕실과 계약했을 때, 칼리스는 전부 계획한 것이다. 그 계획에 맞춰 추후 차질이 없게끔 계약서를 조정한 것이다.

애초부터 제 옛 연인을 포기한 적 없었고, 이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었다.

‘나는 대체 왜…….’

그렇다면, 클로에를 그리 질책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로 이 결혼을 하고팠던 게 아니라서?

알아보니 칼리스는 왕실로부터 막대한 지참금을 받아왔다. 직위랑 영토도 모두 왕실에게 후원받은 것이다.

원하는 것도 다 얻었고, 원하는 사랑도 전부 쟁취해 이곳으로 끌어왔다.

대체 클로에는 어떤 이유로 지난 일 년간 비난받아와야 했던 것이지?

“푸흡. 충격먹은 꼴을 봐.”

“…….”

“정말 불쌍해서 어떡해. 공주님.”

충격에 빠진 사이 얄미운 음성이 클로에의 귀를 찔렀다.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 상대의 표정 위로 익숙한 감정이 보였다.

일 년. 클로에가 결혼 생활 동안 저택에서 마주해야만 했던 감정이었다.

“불쌍한 건 그대지. 헬레나 양.”

“뭐?”

“일 년간 기다렸음에도 완벽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진 않으니까.”

상대가 보인 명백한 증오 때문이었을까. 클로에는 답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스스로 알고 있듯 그대가 공작부인이 될 일은 없어. 그이의 마음은 가지더라도 그이의 옆을 차지할 일은 없겠지.”

왕국에서의 이혼은 성사되는 게 이례적일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총괄을 맡는 신전에서 칼리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니, 그라면 가능하고도 남았을 터.

굳이 이혼을 계획하지 않고 헬레나를 정부로 들인 걸 보면 클로에와의 생활은 계속 지속하고 싶다는 거겠지.

그녀와의 결혼이 가져오는 혜택이 탐나니까.

“당신은 그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하니까.”

“……너!”

헬레나는 눈을 부릅뜬 채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새하얀 흰자에 있는 붉은 핏줄이 도드라지니, 사랑스럽게만 보이던 그녀의 인상이 표독스러워졌다.

“그래도 그대의 눈엔 여전히 내가 동정받아야 할 사람처럼 보이나?”

이어진 직설적인 질문이 헬레나의 자존심을 마구 짓밟았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뺨을 강하게 내리치고 싶다. 아직도 저가 잘난 줄 아는 여자에게 현실을 가르치고 싶다.

바람과 달리 현실을 배우게 된 쪽은 헬레나였다.

상대는 어쨌든 공작부인이자 왕국의 공주다. 상해를 입히는 지경까지 갔다가는 큰 일이 날지도 모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을 쌕쌕거리며 남은 분노를 덜어내는 것이 전부다.

헬레나의 감정적인 태도에 곳곳에 서 있는 사용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곧 대화가 끝났음을 직감하고는 티스푼을 반대로 뒤집어 소서 위에 올려두었다. 차를 그만 마신다는 신호로 티타임을 마치겠다는 의사를 내포한 의미였다.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티포트를 가져오던 하녀가 이내 군말 없이 되돌아갔다.

“……너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숙인 고개. 하지만 구부러진 목은 제철인 딸기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 사이로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해요. 공주님……!”

두 손으로 얼굴을 막으며 울기 시작하는 헬레나는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었다.

“저는 그저, 흐윽, 공주님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제게 모진 말만 내뱉으시고……!”

거기에 피해자 역할도 도맡고 있었다.

신경전을 시작한 것도 그녀였고, 선 넘은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 것도 그녀였다. 한데 어째서 클로에를 가해자로 지목하는지.

주변 시녀들이 달려와 헬레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유치한 어리광이 먹히자, 그녀는 점점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헬레나의 울음소리가 묻히기 시작했다. 클로에만이 알아챌 수 있는 특유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던 때와 시기가 겹쳤다.

“헬레나!”

잇따라 클로에가 남몰래 연모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제 정인을 보곤 가슴 아파했다.

그는 자신이 상처받기라도 하듯 연거푸 탄식을 내뱉으며 상대를 위로했다.

“헬레나. 울지 마. 괜찮아. 이젠 내가 왔으니, 다 해결될 거야.”

헬레나를 부드럽게 토닥여주던 칼리스가 이번엔 클로에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정했던 눈빛이 금세 가시고 서늘한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

“클로에!”

“…….”

“그대가 먼저 헬레나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했지. 난 그래도 그대를 믿고 청을 허락해주었는데, 단단히 믿음을 깨다니!”

칼리스의 눈썹이 산을 이루었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클로에에게 따졌다.

칼리스의 보호에 마음이 풀렸는지 비로소 헬레나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는 그 틈을 타 헬레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차분하게 서 있는 자신의 부인이 아니라.

“……끄윽. 공주님, 아니, 부인께서…… 저처럼 천한 것과는 친구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또, 또오……. 저는 절대 공작가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도 하셨고……. 흑…….”

덩달아 헬레나의 설명을 귀담아듣던 클로에는 얼이 빠졌다.

저게 아예 거짓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아예 진실 또한 아니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모호한 차이였고, 그를 열심히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칼리스는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헬레나의 말을 들은 칼리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창백하게 식은 안색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던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짝.

그렇게 클로에가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이었다.

입이 달싹이기도 전에 뺨이 뜨거워졌다.

수년간 검을 잡아 온 손이,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머쥔 손이, 이젠 클로에의 손을 무자비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미쳤군. 당신.”

“…….”

“내가 부탁했을 텐데. 사랑하는 여자니 잘 부탁한다고!”

홧홧하던 뺨이 이제는 뻥 뚫린 것처럼 알싸했다. 그 사이로 칼리스의 모욕적인 말들이 지나쳤다.

난생 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저의 전부를 주고도 아깝지 않던 남자에게.

그 순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겨두었던 마음의 조각이 반짝였다. 잇따라 그녀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괜찮은 줄 알았던 그녀의 마음에 재차 금이 갔다.

***

‘나 또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던 적이 한두 번이 아녔어.’

사실 클로에는 결혼을 끝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왕국의 이혼이 어려울 뿐더러, 차마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헬레나의 말을 듣자하니 칼리스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한 적 없었다.

클로에가 지난날 ‘그의 행복을 망친 이기적인 왕실의 딸’이란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단 말이다.

‘이젠 정말로 끝내야겠어.’

모든 것을 안 이상 결혼 생활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

왕국에서 이혼은 어려운 일이다.

책임자의 승인이 없다면, 부부 사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할 수 없다.

왕국에서의 책임자는 오직 두 명이다. 왕실의 책임자인 발론트 국왕과 신전의 책임자인 대신관.

비록 왕실 측에서 주선하여 시작하게 된 결혼이라지만, 그들 또한 저택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면 분개할 것이다.

방으로 돌아간 클로에는 오랜만에 양초를 켰다. 책상에 앉은 다음 수납장을 열어 보니 제 이름으로 온 서신이 수두룩했다.

‘아, 이쪽이 아니었지.’

며칠씩 밀린 답신들. 개중엔 긴급상황을 알리는 서신도 있을 테지만, 읽고 답장할 여유와 의사는 없었다.

반대쪽 서랍을 열자 이번엔 새 서신지가 보였다. 그녀는 그중 가장 평범한 것을 골랐다. 중요한 게 아닌 편지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를 뵈어야겠어.’

누군가 내용을 열어 볼 수 있으니 최대한 간결하게. 그러다가도 긴박하게.

다음으로 하인 하나를 매수해 서신을 부치도록 시켰다. 서신이 도착하기까지는 닷새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해졌으나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 뒤로 닷새 후, 아르헨 공작가 앞으로 마차가 도착했다.

왕실의 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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