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이혼하고 싶습니다 (5/46)


#5. 이혼하고 싶습니다
2023.05.05.


제 몸집보다 몇 배는 커다란 공간. 그 속에서 클로에는 덩그러니 앉아 있다.

유년 시절엔 자주 탔던 마차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생소하다.

그러나 창문 너머의 풍경들은 더없이 익숙하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광경인데도 불구하고.

자그맣게 들려오는 말의 울음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바퀴와 마찰하며 일어난 모래바람이 유리 너머를 가득 채웠다.

마차의 속도가 더뎌졌다는 증거였다.

“도착했습니다. 마님.”

클로에의 예상대로 마차는 금방 멈추었다.

신선한 바람이 고향의 땅을 밟은 클로에를 반겼다. 따스하고, 싱그러운 수도의 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클로에!”

저만치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드리웠다. 자연에 마음이 빼앗겨져 있던 클로에가 번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이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버지!”

시선의 끝에는 클로에의 하나뿐인 아버지이자 왕국의 지휘자, 발론트가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왕실에 남아 있는 클로에의 형제들이 보였다.

들뜬 그녀는 영혼처럼 배어 있던 예법조차 까마득히 잊은 채로 한걸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과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저를 괴롭히던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클로에를 환영하기 위한 왕실의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외국에서 사절단이 왔을 때도 이렇게 접대하진 않았을 정도로 클로에를 환대해주었다.

클로에는 행복한 마음으로 식사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던 식사가 오늘만큼은 의미가 깊었다.

오늘의 발론트 일가는 시끌벅적했다. 평소보다 긴 식사시간에도 웃음과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자주 들러, 클로에. 동생들이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과연 동생만일까요, 어머니. 저도 늘 클로에가 그리운걸요.”

클로에를 향한 한 마디에 은근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래도 애정으로 만들어진 가시였기에 전혀 따끔하지 않았다.

“그러도록 할게요.”

“또 말만이지? 내가 편지했을 때도 곧 오기로 해놓고서, 그게 어느덧 일 년이 되었단다.”

“정말이야. 자주 올게, 언니. 약속.”

공작부인이 된 이래로 클로에는 왕실의 공주로서 방문한 적 없었다.

간단한 용무나 사교 모임 참석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늘 칼리스와 동반하느라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늘 아쉬운 얼굴로 저를 배웅해주는 가족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이토록 자신을 그리워하는 줄은 몰랐는데.

“생선이 맛있구나. 클로에. 내 몫을 좀 먹으렴.”

“앗. 그럼 난 언니한테 이따가 나올 디저트 줄래!”

가족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클로에의 앞으로 왕의 손이 오갔다. 그녀의 그릇엔 정갈하게 잘린 생선구이가 놓였다.

소금에 절인 후 촉촉하게 구운 연어구이는 클로에가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가니쉬로 나온 아스파라거스와 방울토마토도. 버터와 잔뜩 섞은 매쉬드 포테이토도.

예쁜 잔에 담긴 상큼한 자몽주스도. 디저트로 나올, 브라우니와 바닐라 아이스크림도.

전부 클로에가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

“……응. 다 맛있게 먹을게요.”

공작가에선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던,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온기.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무척이나 좋았다. 영영 잃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추억이었다.

식사 이후, 클로에는 손님방으로 안내받았다.

“최대한 빠르게 꾸며봤는데……. 아주 네 방 같지는 않구나. 그렇지?”

예쁘게 꾸며진 방은 옛날 클로에의 방을 똑 닮아 있었다.

공작과 결혼하게 된 클로에는 자신의 방을 허물어달라 부탁했었다. 돌아올 곳을 완전히 봉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고, 멍청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클로에는 과거의 향수를 평생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무얼요. 제 방과 똑 닮았는걸요. 마음에 들어요.”

클로에가 짐짓 행복한 척 환히 미소를 지었다. 노력이 통했는지 어머니의 근심 어린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오늘은 바이올렛이 직접 클로에의 옷을 입히고 벗겼다. 다 커 버린 여인의 몸을 본 바이올렛은 자못 씁쓸해하는 것도 같았다.

“잘 자렴. 내 딸아.”

마지막으로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준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떠나기 싫다는 듯 아주 나릿나릿.

힘겹게 문 앞까지 다다른 바이올렛은 돌연 몸을 돌렸다. 이윽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클로에를 꼭 안아주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하렴.”

“…….”

“가족이잖아. 우린 널 전적으로 도울 거야.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단 거, 우리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다면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말고 함께 나누자.”

클로에를 안고 있는 팔이 바들바들 요동치고 있었다. 늘 강인하게 퍼져나가던 목소리 또한 지금만큼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네.”

너무나도 받고 싶었던 위로.

막상 받고 나니 아무것도 취할 수 없었다. 외려 정신이 멍해진 클로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떠나고 나서야 클로에는 지친 몸을 옮기고 침대에 누웠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클로에는 오늘의 하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평화롭던 하루가 얼마 만이더라.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던 시간이 얼마 만이더라.

‘진작 찾아올 것을.’

고민하지 말고 한걸음에 달려올 것을. 이것저것 재고 보니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달리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처음 반년간은 새로운 터전을 꾸리고 그곳에 적응하느라 바빠서, 다음 반년간은 제 가족을 원수로 여기는 칼리스 때문에.

거기서 클로에가 가족을 보러 간다면 남편을 볼 면목이 없어지기에.

그 이유로 보고픈 가족도 뒤로하고 아르헨 공작가에 갇혀 살다시피 했다.

미련하게도.

은은한 아로마 향이 바람에 실려오는 것이 문득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바이올렛이 불면증이 심해진 클로에를 위해 놓았던 향유였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작은 테디베어는 동생이 소개해준 동물 친구였다.

곳곳에 가족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래. 이런 것이 가족이었다.

또 이런 것이 클로에가 꾸리고자 했던 진짜 가정이었고.

***

커튼을 뚫고 내려오는 강렬한 햇살.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던 클로에가 기상했다.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본 게 얼마 만인지. 하루를 시작하는 게 절망적이지 않고 희망적이다.

클로에는 시녀의 애정 어린 손길을 받으며 아름답게 단장했다.

단장 중간중간 요즈음 화젯거리라든가, 귀여운 농담을 던지는 시녀들이 참 귀여웠다.

공작가에선 숨 막힐 정도로 정적인 자들 때문에 단장 시간조차 무료하고 긴장되었었는데.

산뜻한 마음으로 참석한 아침 식사마저도 더없이 완벽했다.

화목한 가족들 덕분에 요 며칠 썩어가던 상처가 점차 아무는 느낌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엔 국왕이 그녀를 개인적으로 티타임에 초대했다.

모처럼 부녀간의 시간이었다. 발론트도 그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티타임을 신경 쓴 것이 보였다.

발론트가 먼저 차를 들었다. 클로에가 그를 뒤따랐다. 이국에서 들여왔다는 차는 정말로 색다른 향을 풍기고 있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 그저께 상인에게 매입했다. 마음에 든다면 갈 때 조금 챙겨주마.”

“감사해요.”

조금 감동적인 건, 이국의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비가 클로에를 위해 손수 구입하고 차까지 달였다는 것.

그리고 찻잔에 박힌 보석이 클로에의 탄생석이었다는 정도다.

“그래. 일이 있다고 했지.”

시시콜콜한 안부를 나눴을 무렵 발론트가 먼저 화제를 전환했다. 일전에 클로에가 보내놓았던 서신에 대해서였다.

“……네. 조금 복잡한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굳어 있는 안색과 달리 목소리는 상냥했다. 저를 보듬어주는 아비에 클로에는 홀린 듯 아르헨 공작가의 진실을 밝혀냈다.

“출정을 마친 그이가 사람을 데려왔어요. 그러니까……. 여자 말이에요.”

헬레나. 왕국의 신데렐라이자 칼리스가 사랑하는 여자.

그녀의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이 공작가에서 보이고 있는 파렴치한 행동까지.

경청하고 있는 발론트의 안색이 차츰 분노로 물들었다.

“망할 자식!”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발론트가 뱉은 첫 마디였다. 동그랗게 뜬 눈에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왕실을, 내 딸을 모욕하다니. 도무지 봐줄 수가 없군!”

제 일처럼 분노하는 아버지 덕분에 클로에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실로 다행이었다. 가족이라도 자신을 지지해주어서.

“이 아비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 클로에. 무엇이든 도와줄 테니 말이라도 해보거라.”

깊은 한숨을 쉰 발론트는 클로에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는 여린 뺨을 어루만진 채로 질문했다. 겨우내의 눈도 단번에 녹일 만큼 다정한 어조로.

‘……내가 하고 싶은 것.’

그와의 이혼.

칼리스가 저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클로에가 먼저 놓고 싶었다.

이 이상 그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멍청하고 쉬운 여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 그것이 클로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이리라.

물론 왕국은 이혼에 적대적이었다. 애초에 결혼이란 신에 맹세하며 맺어지는 결실. 그 약속을 깨는 것은 배반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날 지지해주시는데…….’

하지만 왕과 왕비만 허락한다면, 신전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이혼 재판을 진행할 수 있다.

클로에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목울대를 넘어가는 액체가 오늘따라 시큼했다.

“……이혼하고 싶어요.”

수많은 고뇌.

마침내 클로에가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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