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믿었던 가족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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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믿었던 가족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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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믿었던 가족의 배신
2023.05.06.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것이 긍정을 뜻하는 것인지, 혹은 부정을 뜻하는 것인지 클로에는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다 입을 열었을 땐, 아주 실망스러운 대답과 함께였다.
“……말이 안 된다니요?”
“이혼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마. 클로에.”
거듭 이어지는 거절이 그녀를 절망에 빠트렸다. 전날부터 주욱 가지고 오던 귀중한 감정들이 차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국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다. 칼리스를 비방하고, 홀로 남은 그녀를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전적으로 도와주겠다 약속한 주제에 정작 클로에가 원하는 것은 등한시 여기다니.
“대체 왜……?”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어진 아비의 거절이 그녀를 실망시켰다.
쨍그랑.
충격의 여파가 몸을 얼게 만들었다. 슬슬 힘이 부쳤던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깨진 찻잔은 하찮은 유리 조각이 되었다. 이국에서 들여왔다던 차는 잔디 따위를 적셨고, 탄생석은 똑 떨어져 그 위를 뒹굴었다.
“……그이가.”
국왕이 무언가를 오해한 게 틀림없다.
자신을 저토록 생각해주는 아버지잖나. 이렇게 매몰차게 저를 내칠 리 없다.
“그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클로에는 조금 전, 한탄하듯 뱉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래.”
그리고 이어지는 발론트의 건조한 대답.
그제야 클로에는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자신이 같은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되뇌어도 발론트의 반응은 같을 거란 걸.
클로에의 비극을 제 일처럼 화내주던 국왕이 내릴 처사는 이혼이 아닌, 방치라는 걸.
“내게, 왕실에게 죄책감을 운운하던 그가 끝내 제 첫사랑을 데리고 왔단 말입니다!”
“그래.”
“그리고, 제가 여자와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저의 뺨을 내리치고, 모두의 앞에서 모욕을 안겨주었다고요.”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발론트에게 화를 내면 낼수록 저만 초라해진다.
“그럼 정부를 쫓아주마. 대신, 이혼은 아니 되어.”
“정부를 내쫓겠다고요. 아버지께서는 그 일 이후 우스워진 저를, 얼마나 더 우습게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널 우습게 만들어? 그럼, 그 자식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하려 드는 너 때문에 우리 왕가는 얼마나 우스워져야 하는 거냐!”
발론트의 말에 클로에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의 말을 두어 번 곱씹으니 비로소 제 아비가 던진 돌이 비수에 꽂혔다.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제가 왕가를 우습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클로에의 턱이 달달 떨렸다. 울지 않으려 애를 써보지만, 어느새 시야는 뿌예져 있었다.
‘내게 미안하다고 했던 것도 다 거짓말이었어.’
‘그 일’이 있은 후, 국왕은 클로에에게 장문의 사과 편지를 보냈다.
서신엔 왕실을 위해서였다며,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담겨 있었다.
하여, 이해했다.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도 살아남으려고 노력도 했다.
‘대체 어떻게…….’
이튿날 동안 발론트가 베푼 지나친 호의는 단순 그리웠던 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타이른 뒤 그 지옥 같은 곳에 다시 처넣을 속셈이었다.
‘안 돼.’
이럴 순 없다. 마지막 동아줄마저도 자신을 외면할 순 없는 거다.
클로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함을 지르는 발론트를 뒤로하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형제들과 따로 차를 마시고 있는 바이올렛이 보였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클로에를 발견하곤 재빠르게 달려왔다.
“딸.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토록 울어.”
눈물 흘리는 자신을 안은 채로 어쩔 줄 모르는 바이올렛. 그녀의 품은 어제처럼 따스했다. 바이올렛을 뒤따라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자매들 또한 어제와 같았다.
“그, 그이가 여자를 데리고 왔어요.”
마음 놓고 울던 클로에가 서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마다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는 바이올렛의 손이 너무나도 의지가 되었다.
그래. 이들이라면 다를 테다.
달라야만 했다.
“이혼, 이혼이 하고 싶어서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그러나 그녀가 다음 말을 잇기 매섭게 등을 토닥여주던 손길이 끊겼다.
문득 바라본 바이올렛의 얼굴엔 표정이랄 게 없었다. 상냥하게 웃어주던 웃음이 가시고, 어느새 클로에를 노려보고 있었다.
“왕실의 공주가 이혼이라니. 말을 조심해야지. 클로에.”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어투.
“이혼한 여자가 어떤 인식인지 알면서 그런 말을 잘도 내뱉는구나. 자칫하면 마녀로 몰릴 수도 있는데……. 어쩜 그렇게 생각이 어리니. 왕실의 공주라면 그 정도는 견뎌내야지!”
다음으론 자매들이 기웃거리며 뒤따라왔다.
처음엔 걱정스러운 태도를 내비치던 그들도 지금은 성난 목소리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젠 불법도 아니잖니. 요즘 정부를 들이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는데, 너만 힘든 거 아니니까 참아봐. 왕실의 공주였던 네가 이혼이라니? 불명예는 삼가야지. 다 커서 가문을 부끄럽게 만들진 마.”
“난 혼기도 거의 다 찼는걸.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언니의 이혼 때문에 발론트의 가치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싫어! 나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단 말이야.”
아아.
도망친 곳엔 또 다른 시련이 클로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을 거스른 도망자에겐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클로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곳조차 남지 않았다.
“마차……. 마차를 불러주세요. 어서.”
***
클로에는 마차가 도착할 때까지 두통을 호소했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난리를 치는 바람이었다.
도착지에 내려 찬바람을 쐬니 한결 나아졌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가 마부에게 일렀다.
“고마워요. 이제 가봐도 되어.”
“왕실로 다시 모셔오란 국왕 폐하의 명이 있었사옵니다만…….”
떠나라는 클로에의 지시에도 마부는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계속 주저했다.
공작부인을 감시하란 시답잖은 명령이라도 받은 것이겠지.
“신경 쓰지 말렴. 내가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
그녀는 심드렁하게 금화 한 닢을 건넸다. 이 정도라면 마부에게는 심심치 않은 액수일 테다.
“예. 예! 혹시라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당장 달려오겠습니다!”
허겁지겁 동전을 받은 그는 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마차는 누구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가볼까.”
그녀는 누적된 피로와 불행을 견디고 있던 어깨를 쭉 폈다. 다른 곳도 스트레칭을 해주니 몸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왕궁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로, 여기서 한 시간 정도 마차를 타고 가면 신전을 갈 수 있었다.
클로에는 당장 근처 마차 정거장으로 갔다.
거기선 주변 방문객들을 호객하는 마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건강한 말을 데리고 있는 마부를 택했다.
말을 잘 골라서인지 이르게 도착했다.
‘내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시도조차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책임자 중 한 명인 국왕이 이혼을 승낙해주지 않았으니, 남은 자는 대신관뿐이다.
그들은 왕궁을 구한 칼리스를 두 번째 신인 것처럼 섬겼으니,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칼리스가 데려온 헬레나의 이야기를 꺼내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랑을 응원한다며, 이혼함으로써 그에게 늦게나마 행복을 안겨주고 싶다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런.”
하지만 만남도 있어야 승산도 있는 법.
정녕 신은 불결한 마음을 품는 그녀의 통행조차 막는 것인지 신전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신을 맞이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 전에는 방문객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한 달간이나 쉰다고 한다.
“……하는 수 없군.”
방문객의 이름과 방문 사유를 적고 가면 차례대로 서신을 보낸다고 하니, 그쪽으로 올 상담을 기대해야겠지.
「클로에 아르헨: 대신관 알현」
신전을 내려온 클로에를 반긴 것은 무엇보다 강렬한 햇빛이었다.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던 그녀가 차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녀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마주했다.
“이대로 가기는 아쉽지…….”
예기치 않게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버렸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공작가로 되돌아가야 할 터. 다른 곳이라도 가고 싶지만, 그녀가 갈 곳은 친우의 저택이나 왕실뿐이다.
그러나 일말의 고지 없이 저택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한 친우는 이제 없다. 한때 그녀와 일상을 공유할 정도로 친했던 자들도 결혼 생활 이후부터는 부쩍 멀어져 버렸으니까.
‘그래도 돌아가긴 싫지.’
모처럼 누린 자유를 포기하고 공작가로 돌아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구경이나 할까.”
돌이켜 보니 아까 정차했던 마을의 풍경이 참으로 어여뻤다.
언덕을 내리자, 다행히 그녀를 데려다주었던 마부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삯을 치러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마을에 도착한 클로에는 제일 먼저 기성복점을 들렀다.
그녀는 그나마 마음에 드는 갈색 드레스를 구매했다. 치마 밑단이 종아리에 닿으니 활동하기도 편해 보였다.
다음으론 울적한 기분을 전환해줄 디저트를 찾아 헤맸다. 어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사람이 많은 카페로 향했다.
몇십 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케이크를 주문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테라스에 자리 잡았다.
“……앗!”
그때, 누군가가 클로에의 테이블 앞으로 달려왔다. 전투적인 태세로 달려오던 소년은 끝내 클로에와 부딪히고 말았다.
다행히 뒤에 있던 행인이 클로에를 잡아주어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을 구를 뻔했다.
사고로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음에도 소년은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진 채였다.
***
“조심하라고 당부했을 텐데.”
남자의 붉은 눈이 소년을 스쳤다. 목소리 또한 눈동자만큼이나 서늘했다.
지레 겁을 먹어버린 소년이 잇따라 고개를 수그렸다.
“약속한 것은?”
“……여, 여기요오…….”
고사리 같은 손이 지갑 하나를 건넸다. 그와 대비되는 큼지막한 손이 물건을 받아 들었다.
남자는 지갑 안에 새겨진 이름과 주머니에 꽂힌 사진을 확인했다.
안쪽 주머니를 살펴 보니 대략 백 골드 정도가 나왔다.
이는 평범한 가족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 큰돈이었으나, 남자는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무미건조하게 동전을 턴 남자가 소년에게로 돈을 건넸다. 액수를 확인한 소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수고했다. 약속한 대로 돈은 다 가져라.”
“가, 감사합니다아!”
어서 가보란 남자의 턱짓에 소년은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보다 잠잠해진 주위에 남자가 앞쪽으로 걸어나갔다. 클로에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입꼬리가 재차 올라갔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