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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낯선 남자 (7/46)


#7. 낯선 남자
2023.05.07.


클로에는 살짝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케이크 집을 나왔다.

저곳, 보통 맛집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이 몰리는 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니라.

길거리로 나온 클로에는 이윽고 가게에서 건네받은 지도를 열었다.

수도의 마을이니만큼 볼거리와 할 거리가 참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씩 전부 해보고 싶으나, 시간이 촉박한 게 흠이었다.

‘우선은 마차부터 잡아놓을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마차를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클로에는 그런 불상사에 대비해 마차부터 예약하기로 했다.

지도가 안내해준 대로 길을 따라갈 즈음 비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꿉꿉한 물비린내 냄새가 섞여서 나는 것이 도착지에 다다른 듯했다.

마구간에 들어선 클로에는 울타리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지푸라기를 씹고 있던 남자가 입에서 잔여물을 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마차를 잡으려고요.”

“어디로 가시는데?”

“북부요.”

“우리는 그렇게 멀리 까진 힘든데. 대체로 관광용이오.”

남자는 손을 절레 흔들며 거부했다.

북부까지 가려면 며칠은 걸릴 터. 그 개고생을 할 바에는 여기 있는 관광객들을 노리는 게 더 효율적이다.

클로에는 잠시 뒤쪽을 훑었다. 크기가 제법 큰 마차와 건강해 보이는 젊은 말이 몇 보였다.

“삯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얼마나 주시게?”

이내 남자가 클로에의 행색을 뜯어보더니, 심드렁히 물었다.

얼굴이나 몸짓에 기품이 자자하나 차림새가 영 아니었다. 기껏해야 본래 값에다가 동화 몇 개를 더 쥐여주겠지.

“금화 열 닢이면 될까요?”

“열, 열 닢이라 했소?”

클로에는 깜짝 놀라 되묻는 남자에게 고개를 주억였다. 곧이어 남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환하게 폈다.

“당연히 되고 말고요. 어떤 마차로 준비해드릴까요? 아니, 제일 좋은 마차와 말로 대령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아, 값은 먼저 치르셔야 합니다. 요즘 워낙 값을 안 치르고 도망가는 무뢰배들이 많아져서요. 아가씨가 그럴 거라는 건 물론 아니지만! 혹시나 하고 부탁드리는 겁니다요.”

남자가 실실 웃으며 굽신거렸다.

클로에는 걱정하지 말라는 양 바로 드레스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

그런데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다. 반대쪽 주머니와 가방도 확인해보았지만, 지갑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클로에는 지갑을 썼던 경위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부에게 돈을 주었고, 그 뒤엔 케이크집에서 돈을 지불했었다. 그게 전부였는데…….

‘설마!’

일찰나 테라스에서 그녀와 부딪혔던 소년이 떠올랐다.

사과 한마디도 없이 허겁지겁 도망가던 조그마한 소년!

수도에선 소매치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데, 클로에도 그 희생양이 된 모양이었다.

“뭐요?”

좀처럼 지불이 이뤄지지 않자 남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굽신거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길거리의 불량배처럼 사나워져 있었다.

“그, 그게…….”

“왜, 막상 지갑을 열어 보니 돈이 없소?”

정확히 말하자면 지갑이 없는 것이다.

저를 흘겨보는 남자의 시선이 퍽 무서웠다. 삯을 내지 않고 도망가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남자는 그런 눈빛으로 클로에를 보고 있었다.

“도착하고 나면 꼭 값을 드릴게요. 금화 두 닢으로요.”

“지금도 돈이 있다는 듯 군 마당에, 대체 당신 말을 어떻게 믿으란 게요?”

남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에 클로에는 이만 설득을 포기했다. 이러다가 경비병에게 붙잡히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계획이 엉망이 되겠어.’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돈이 없다면 마차를 타지 못하는 것은 물론, 마을을 관광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했다.

“큼큼.”

그때 남자가 연거푸 헛기침했다. 마치 자신을 보아달라는 듯한 행동에 클로에가 시선을 옮겼다.

“마차가 급하오?”

지금이라도 자신의 말을 믿어보려는 것일까? 클로에가 슬그머니 고개를 주억였다.

“위기에 처한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 내 이번 한 번만 마차를 내어주도록 하지. 대신…….”

게슴츠레 눈을 뜬 남자가 클로에를 빤히 응시했다.

평범한 옷을 입었을지언정 얼굴은 꽤 반반했다. 사내를 여럿 울리게 생긴 미모가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돈이야 언제든지 벌 수 있으나, 저런 미모의 여자는 언제든지 만날 수 없는 법.

“가는 동안 심심치 않도록 말동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데.”

“……말동무요?”

“다른 것으로 재미있게 해주어도 무척이나 영광이고.”

남자는 클로에의 팔을 당겨 제 쪽으로 바짝 붙였다. 그녀를 팔에 가두다시피 한 뒤엔 자그마한 귀에 속삭였다.

다른 것.

모호한 주어였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쉬이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무슨!”

기겁한 클로에가 양쪽으로 고갯짓했다. 서둘러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녀의 품을 결박한 팔이 훨씬 단단했다.

“이거 놓거라!”

“왜 그래. 급한 거잖아. 때론 이렇게라도 해결해야지.”

귓속을 파고드는 뜨거운 숨결이 역겨웠다. 저를 탐하려 드는 남자의 욕정 어린 손길이 너무나도 더러웠다.

“아, 클로에.”

그때였다. 누군가가 클로에의 이름을 불렀다.

겨우 모습을 확인했을 땐, 정체를 모르는 남자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남자의 정체를 헤아리기도 전이었다. 그는 클로에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 쪽으로 당겼다.

결단코 풀리지 않을 것처럼 거센 마부의 팔이 맥없이 풀렸다. 졸지에 클로에는 새로운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대체 누구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와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남자는 자신을 꽤 잘 아는 듯이 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저 무뢰한과 달리 남자는 클로에를 존중하고 있었다. 그녀를 쥔 단단한 팔에 힘이 빠져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여기 있었구나. 한창 찾고 있었잖아. 클로에.”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을락 말락 했다. 덕분에 그의 숨결과 목소리가 귓속을 노골적으로 파고들었다.

“마차의 값은 내가 지불하도록 하지.”

마부를 대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마부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금화를 던지다시피 건넸다.

“옙. 옙……! 몇 시쯤 모시면 될까요?”

“해가 온전히 지고 난 후, 시계탑 앞에서. 네놈 말고, 다른 놈으로 데리고 와.”

남자는 마부와 대화조차 섞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건성으로 대답한 그는 곧바로 클로에를 이끈 채로 자리를 나섰다.

마차값을 아무렇지 않게 내 어 주는 걸 보아 하면, 아주 깊은 인연이라도 되는 듯한데.

‘그래서……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클로에는 남자의 정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

“맞아요. 제 지갑이네요.”

남자의 손엔 잃어버린 클로에의 지갑이 들려 있었다.

지갑을 돌려받은 클로에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에 그가 슬그머니 웃었다.

“길에서 주웠답니다. 사진까지 있는 거 보면 중요한 것 같길래. 주인을 찾아드리려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남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길가에 버려진 지갑을 발견했다고 한다.

길가에 나뒹굴고 있었음에도 아직 헤지진 않은 것이, 금방 버려진 것 같았다면서.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라스트 네임도 없는 이름과 헤진 사진으로 클로에를 찾은 것이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엄청난 친절에 클로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과 체력을 사서 낭비하다니.

“갚다니요. 괜찮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래도…….”

생각해 보니 클로에의 마차 값도 남자가 내주지 않았던가.

그녀는 서둘러 지갑을 열어 보았다. 지갑도 찾은 마당에 돈을 되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아.’

텅 빈 지갑이 클로에를 반기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빌어먹을 소매치기가 돈을 다 털어간 뒤에 버려진 지갑이었다. 돈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맞은편에 있던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굳어버린 클로에를 보며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행 중이신 것 같은데.”

“맞아요. 기분도 전환할 겸 수도를 잠시 둘러보고 있었거든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봉변을 당하셔서 관광도 제대로 못 하실 텐데.”

“네?”

“그렇게 해드려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배려를 베푸는 것은 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자가 애원하는 쪽이 되었다.

“그건…….”

클로에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자니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그 또한 아까의 마부처럼 불순한 목적이 있으면 어찌하는가.

“알겠어요. 그 전에, 적어도 고마운 분의 성함은 알고 싶은데.”

그렇지만 무슨 일탈인지, 클로에의 마음이 거침없이 긍정을 내비쳤다.

호의적인 질문에 남자가 재차 웃음을 보였다.

“쿤.”

“…….”

“쿤입니다. 레이디 클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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