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우리, 친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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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우리, 친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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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우리, 친구할까요?
2023.05.08.
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몇 번씩이고 남자의 이름을 곱씹던 클로에는 곧 이름의 근원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현황제의 이름과 발음이 똑같았다.
나이대를 유추해보아 황제의 이름을 본 딴 건 아닐 테고, 우연에 우연이 겹쳐 탄생한 이름인 듯했다.
“반가워요. 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려요.”
클로에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니 어색했다. 금방이라도 황족모독죄로 잡혀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달까.
“저 또한.”
이번엔 쿤이 인사할 차례였다. 그는 간단한 대답과 그렇지 못한 미소를 공존시켰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라 재밌는 건지, 아니면 그 상대가 쿤이기에 더욱 재밌는 건지. 클로에는 어느 때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쿤은 클로에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쏙쏙 골라 안내해주었다. 마치 그녀의 취향을 전부 파악하기라도 한 것 같아 신기할 정도로.
꽃이 만개한 화원에도 들러보고, 도자기 공방에 가서 자그마한 찻잔도 만들어보았다.
늘 장인의 것을 사용해보기만 했지 스스로 제작해본 건 처음이었다. 서툴렀기에 그들처럼 예쁘게 만들 순 없었으나, 삐뚤빼뚤한 찻잔도 클로에의 마음엔 쏙 들었다.
다음으론 광장에 가서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광대도 구경했다. 클로에는 광대로부터 풍선으로 만든 꽃을 선물 받기도 했다.
놀아달라는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숨바꼭질도 해보고, 보물찾기도 했다.
행복할 땐 시간이 한없이 빠르게 흐르는 법.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지막 만찬은 무엇으로 할까요?”
그의 질문에 클로에가 지도를 열었다.
인기가 많다고 표시된 레스토랑 중 샌드위치 가게에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직원이 추천해준 튜나 샌드위치와 베이컨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두툼한 참치의 향이 아주 고소했다. 게다가 껍질을 살짝 그을리니 기름기가 풍부하게 올라왔으며, 물릴 때쯤이면 아삭한 채소들이 끝 맛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배고프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샌드위치 두 쪽을 다 해치웠다.
원래 클로에는 배가 부른 걸 선호하지 않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서 그런지 만족스러웠다.
“갓 구운 와플입니다. 상큼한 스트로베리 아이스크림과 함께 드셔보세요.”
슬슬 나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다가온 직원이 디저트 접시를 내밀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 눈빛을 교환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두 사람 다 디저트를 시킨 적이 없었다.
곧이어 직원이 나섰다.
“그러니까……. 두 분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부디 맛있게 드셔주세요.”
“친절하셔라. 맛있게 먹을게요.”
보통 이런 일은 쿤이 먼저 나서곤 했는데, 이번엔 잠잠하다 못해 고요했다.
이번엔 클로에가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감사 인사를 건넸다.
“네, 넵! 좋, 좋은 하루 되십시오!”
그녀와 마주친 직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제자리에서 쭈뼛거리던 그는 한참 뒤에야 도망치듯 물러갔다.
클로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직원이 선물해준 디저트에 사심이 잔뜩 묻어나온다는 걸.
타인의 관심이 배어 있는 디저트를 먹는 것을, 누군가에겐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디저트 집은 따로 알아봤었으니 그쪽으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포크를 쥔 하얀 손이 접시에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줄곧 가만히 있던 쿤이 난데없이 장소 이동을 권했다.
“으음……. 이것도 꽤 맛있어 보이는걸요.”
“이곳에서 모든 걸 다 끝내긴 퍽 아쉽잖습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아까는 분명 마지막 만찬이라고 하셨으면서.”
“디저트는 별개니까요.”
그 정도로 자신을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 걸까?
의아했던 클로에는 끝내 가이드가 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알겠어요. 그럼 일어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곧바로 출구로 다가갔다.
클로에를 먼저 배웅해준 뒤 저 또한 밖으로 나서려던 참이었다. 쿤은 그대로 남은 디저트를 보고 아쉬워하는 직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짙은 살기 때문이었을까. 직원은 자연스럽게 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그가 마주한 것은 사람 하나 정도야 거뜬하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사납게 생긴 얼굴이었다.
이윽고 상대는 저를 향해 환히 웃었다. 그것은 포식자가 사냥감 따위에게나 보이는 명백한 조소였다.
***
“솜사탕?”
두 사람은 광장에 있는 디저트 트럭에 도착했다. 상인은 커다란 솜사탕을 팔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솜사탕은 마치 노을 녘의 구름 같았다. 또 어찌나 거대하던지, 솜사탕이 그녀의 얼굴보다도 컸다.
한 입 베어 무니, 맛마저도 재질과 비스름했다. 입안에서 바로 사라지는 달콤한 사탕이 마치 장난감 같았다.
뭉텅이로 입에 넣어 굴려보기도 하고, 실뭉치처럼 얇게 쪼개 먹어보기도 했다.
“먹을 만합니까? 꽤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식감도, 맛도 재밌어서 마음에 드네요.”
클로에는 그날 인체의 신비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배가 부른데도 자꾸만 음식이 들어가는 게 신기했다.
열심히 음미하다 보니 솜사탕이 끝을 보였다.
“아, 한 입 크게 먹으려 했는데…….”
클로에가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입 가득 채워 먹으려던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니.
앞으로 솜사탕을 먹을 일이 없을 만큼 딱 하나만 더 음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남의 돈으로 필요 이상의 사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클로에가 자리를 떠나려던 무렵이었다.
“한 입 크게 드시고 싶으신 거라면 하나 더 맛보시겠어요?”
상인은 아까보단 조금 더 작은 솜사탕을 클로에에게 건넸다. 색깔은 훨씬 화려해져 무지갯빛을 띠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그래요. 하나 더 드셔주시면 오히려 제가 감사할 것 같습니다! 하하.”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말투가 클로에를 현혹하고 있었다.
“실로 고맙군.”
자신이 뱉으려던 말은 ‘이런 걸 그냥 받아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맛있게 잘 먹겠다’라는 친절한 감사 인사였다.
하지만 막상 수중에 나온 것은 짧은 인사였다. 그마저도 어쩐지 삐딱한 목소리의.
그녀의 차례가 오기도 전에 쿤이 미리 선수를 쳐 버린 것이었다.
쿤은 상인의 손 위로 동화를 던지다시피 놓았다. 가식적인 낯을 띠는 것조차 잊었는지 표정엔 불쾌함이 드러나 있었다.
또, 종일 다정하고 느른했던 그의 말투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잘것없거나, 경멸하는 자들을 대할 때나 쓸 법한 교만한 말투였다.
“감……. 감사해요…….”
조그만 입술 사이로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싶어 일부러 솜사탕을 배어 물기도 했다.
그래도 분위기가 누그러지지 않자 급히 인사하고서는 쿤을 데리고 나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클로에가 그의 손을 잡기 무섭게 좀처럼 삭지 않던 화가 풀린 듯 보였다.
두 사람은 시계탑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조금 남은 솜사탕을 먹던 그녀가 슬쩍 옆을 훔쳐보았다. 다행히 쿤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는 왜 그랬어요?”
분위기를 읽은 클로에가 냉큼 질문했다.
그와 동시에 함께 맞춰가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클로에.”
꾸밈없이 날것 그대로 불린 클로에의 이름.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습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유가 있기에 무언가를 베푸는 겁니다.”
처음엔 무엇을 말하는가 싶었다.
상대의 말을 천천히 곱씹은 후에야 클로에는 그것이 오늘 받은 호의들을 일컫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 좋은 쪽이라면 걱정할 것도 없겠지마는. 세상엔 쥐새끼들이 넘쳐나서.”
……무슨 새끼?
처음 들어보는 욕지거리에 클로에는 적잖게 놀랐다. 몰래 쿤을 훔쳐보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대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강압감에 클로에가 얼떨결에 고개를 주억였다.
‘모든 호의엔 이유가 있다…….’
말뜻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동감하기도 했다.
자신을 환대하던 가족과 연회 때만 상냥하게 굴던 칼리스가 좋은 예시들이었으니까.
정녕 그녀를 혼란케 하는 것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 화자였다.
“당신은요?”
“…….”
“당신도 내게 호의를 베푼 사람 중 하나잖아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가던 입이 멈추었다.
깜빡. 깜빡. 다시 깜빡. 슬그머니 깜빡이던 눈이 마지막엔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클로에의 질문이 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수십 년간 배운 언어를 말끔히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큰 자극이 다가왔다.
다른 이에겐 주지 않은 의심과 호기심을 제게는 적나라하게 내비치고 있다니. 그 아름다운 사실이 쿤을 격양시켰다.
“예. 저도 이유 있는 호의죠. 저도 그들처럼…….”
능청스레 말을 잇던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할 때와 같은 순간에.
그는 남몰래 옆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여자는 그 무엇보다 신비로웠다.
시선을 느끼고선 상대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마저도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저도 그들처럼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나타난 거예요. 클로에.”
“그럼…….”
그럼, 당신도 조심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게 물으려던 클로에는 곧장 입을 닫았다. 불현듯 바뀐 그의 분위기가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내내 다정한 시선을 담았던 눈이 서늘해져 있었다. 호수처럼 푸르렀던 눈이 언뜻 붉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치 그녀의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우리, 친구할까요?”
하지만 아주 잠깐뿐.
재차 질문하는 쿤은 클로에가 알고 있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친구라면…….”
“가끔씩 편지도 주고받고, 서로의 집에 초대해 시간도 보내는, 아주 가까운 사이 말이에요.”
“…….”
“우리, 오늘만의 인연으로 끝내긴 퍽 아쉽잖아요.”
달콤한 제안을 내뱉는 그는 어느새 클로에의 앞까지 다다랐다.
부적절할 정도로 너무나도 가깝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