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갖고 싶어<
(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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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갖고 싶어
2023.05.09.
긴장한 클로에가 숨을 조금씩 끊어 쉬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람에 새로운 향이 섞여 들어왔다. 시원함에 가까운 씁쓰름한 향이었다.
“그렇죠. 클로에?”
향은 다시금 클로에를 덮쳤다.
나지막한 목소리, 기분 좋은 향, 전부 이 남자의 것이었다.
긴 부연 설명 없는 아주 간단한 질문.
예, 아니오로만 의사를 표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대답. 이토록 쉬운 조건에도 클로에는 머뭇거렸다.
‘친구.’
쿤의 음성이 그녀의 머릿속을 연신 맴돌았다.
그녀 또한 쿤을 하룻날 인연으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족으로부터, 또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순간. 클로에는 누구라도 필요했다.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건 ‘친구’일 터. 때마침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사람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때마침 나타난 쿤이 의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이것이 우연을 빙자한 계략적 만남이라면?
눈앞의 남자가 위험한 사람인지, 안전한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는 증거가 있던가?
저 남자가 다른 이들처럼 원하는 게 있어 다가온 자라면?
“당신.”
항상 친절했던 그녀의 음성이 딱딱해졌다. 버젓이 있는 이름을 두고 건조한 호칭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요?”
상대의 초조한 변화에 쿤이 잠시 긴장하고 말았다. 뒤따른 질문 덕에 난생처음 겪은 듯한 초조함이 금방 잠적했다.
내가 원하는 것.
쿤은 자신의 욕망을 눈동자에 담았다.
타오르는 태양을 투영한 금빛 머리칼. 그보다도 밝은 투명한 피부. 장인이 빚은 듯한 이목구비와 보석을 담은 듯한 푸른 눈.
“말하면, 그다음엔 들어주시렵니까?”
큼지막한 손이 새하얀 목덜미를 지분댔다.
뜨거운 열기에 클로에가 움찔거리면, 그는 웃는 낯으로 자신이 주운 머리칼을 흔들어댔다.
“알아야 제가 이 관계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서예요.”
“의도가 불결하면 차라리 숨기는 것이 나을까요?”
“그걸 제게 묻는 전제 자체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내 친우에게 최대한 맞춰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벌써 클로에를 포섭한 것만 같은 너스레.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그간 클로에가 받아온 대접과는 확연히 달랐다. 눈앞의 남자는 교만을 떠는 것 같다가도 저를 위하고 있었다.
그의 능청스러움은 배려를 감추기 위한 가면 같달까.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말씀해주세요.”
그런 신비로움에 이끌린 걸까. 클로에가 평소라면 의식하지도 않고 지나쳤을 말이 궁금해졌다.
“클로에, 당신.”
“…….”
“―의 편지를 갖고 싶습니다.”
기침이라도 나오려는지, 쿤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클로에를 갖고 싶다고 말한 꼴이 되었다.
막상 클로에는 아무렇지 않은데, 쿤이 놀라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그래요?”
사람들이 클로에에게 바라는 것들은 다양했다.
왕족인 그녀와 친해지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적극적으로 친분을 쌓으려던 자들. 그녀의 돈과 명예를 착취하던 남편.
그에 반해 편지는 이용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고작 그런 것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가 우스워질 정도로.
“그럼, 마차가 오기 전까지 날 설득하셔야겠군요.”
상대의 말에 날카로웠던 신경이 차츰 진정되었다.
“기회라도 주시니 영광입니다.”
쿤 또한 미묘하게 달라진 클로에의 반응을 알아채곤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시계탑 근처 산책로를 걸었다.
그들은 방금까지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까무룩 잊은 사람처럼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주고 받았다.
“아, 칼리스 아르헨이네요.”
“예?”
그녀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사람의 이름. 느닷없이 들려오는 남편의 이름에 클로에가 놀랐다.
쿤의 어깨너머로 칼리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치고는 지극히 평범한 걸 보니, 마을 사람들이 직접 세운 듯했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도 그의 동상이 있지.’
칼리스는 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설치하고 싶어 했다.
위치는 수도에서 가장 큰 마을의 광장으로. 재료는 순금과 갖가지 보석으로만.
당연히 동상은 클로에의 사비로 제작되었다.
동상이 설립된 날 칼리스는 그녀에게 환히 미소를 지어주었다.
짧지만 강렬한 웃음. 상대는 노력하지도 않고 내보였을 단 한 번의 미소가 클로에를 다시금 나락으로 빠트렸다. 우습게도 그 미소 따위에 클로에의 부서져 가던 마음이 치유되었기에.
“칼리스 아르헨이,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로 대단한 위인이었던가요?”
“왕국을 구하신 분이니까요. 저희의 행복과 평화는 그분의 노력 덕분에 이어지고 있는 거잖아요.”
왕국 사람이라면 칼리스의 업적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들의 자유와 평화는 그로 인해 얻은 것이니까.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쿤이 타지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클로에는 내색하지 않고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도 쿤은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전쟁을 끝낸 사람일 뿐, 그가 모든 걸 해낸 건 아니잖습니까. 조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자들은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설령 그 덕분에 전쟁이 끝난 것이라고 할지언정, 그만 노력했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클로에. 그중 당신도 포함이고요.”
이어지는 말이 클로에를 거론하고 있었다.
“저도 포함이라뇨?”
“클로에도 그곳에서 제 노력을 다했었잖아요. 밤낮없이 다친 병사들을 돌보고.”
“…….”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새김질시켜주고.”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부연설명들.
‘설마.’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양 쿤을 바라보았다. 이후 무언의 신호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대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대가 전쟁에서 날 치료해주었었습니다.”
상대는 자신이 클로에가 치료해주었던 기사 중 한 명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클로에의 손은 어느새 쿤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치료해주었던 신성한 두 손을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감싼 후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나는 여전히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간지러운 걸까.
그보다는 조금 더 천박하고, 진득한 촉감인 것같기도 하다. 처음 느껴보는 것이므로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었다.
“……네. 쿤.”
***
이후 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실토했다.
지갑 속 사진을 보자마자 클로에가 저를 치료해준 간호사임을 직감했다고.
그래서 평소라면 무관심으로 대응했을 일에 오지랖을 부렸다고 한다.
“클로에. 나는 당신 덕분에 생을 이어나가고 있는 거겠죠. 아마 오늘 같은 호의로는 그 빚을 다 갚지 못할 겁니다.”
“…….”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설령 친구가 아니더라도 괜찮고, 나 혼자 그대의 그림자를 좇아도 좋으니까.”
“…….”
“이래도, 여전히……. 나를 친우로 두기는 싫습니까?”
재차 떨어진 질문.
클로에가 상대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진한 푸른 홍채가 눈에 띄었다.
편지가 필요하다 주장하는 남자. 클로에의 과거를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유일한 사람.
지금껏 그녀가 믿어왔던, 친분을 만들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번에도 하는 수 없는 척 그를 믿어볼 순 없는 걸까.
“좋아요. 편지 친구. 재밌겠네요.”
새로운 관계도 맺었겠다, 클로에는 자신을 소개했다.
편지를 주고 받기 위해서는 주소를 밝혀야 했다. 고로 자연스레 정체를 알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 외로 쿤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무덤덤한 반응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타국에서 온 그는 종종 왕국으로 여행을 온다고 한다. 전쟁 때 지원군을 자진한 후로 발론트 왕국을 좋아하게 되었다며.
그 뒤로도 이것저것 과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차는 딱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오른 클로에가 작별 인사의 시작점을 끊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곁을 떠난 손이 아쉬웠는지, 쿤은 클로에의 손을 고즈넉이 응시했다.
“클로에.”
마차의 문이 닫히기 전이었다.
쿤은 제 친우가 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늘 그녀를 상냥하게 불러주더니만, 이번엔 자못 엄숙한 목소리였다.
클로에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땐, 마침 산들 바람이 두 사람을 지나쳤다.
곱슬거리는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마구 나부끼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이어 클로에가 다급히 머리칼을 정리하곤 귀 뒤에 꽂았다.
흐려졌던 초점이 차츰 선명해졌다.
“행복합니까?”
잇따라 시야 속의 쿤 또한 뚜렷해졌다.
남자가 타오르는 노을을 등졌기 때문일까. 클로에의 것과 비스름한 색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언뜻 붉게 일렁였다.
‘……행복?’
클로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친우가 분명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클로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쿤의 질문이 꼭 자신의 불행을 궤뚫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클로에의 설움이 낯선 친우는 알아챈 것 같아서.
“여전히 행복합니까?”
잠시 후 쿤이 덧붙였다. 대답을 보채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제야 클로에는 질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현재의 클로에가 삼 년 전의 그녀처럼 행복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삼 년.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반년간 전쟁을 치렀고, 종전 후 나머지 반년간 왕국은 회복에 주력했다.
이듬해에 클로에는 칼리스와 결혼하게 되었고,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은 고작 반년만에 진실이 밝혀지며 무너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 비운의 신데렐라가 모습을 비쳤다. 두 사람의 계획대로.
“저는…….”
“…….”
“행복해지려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 불운이 연속되는 삶에서 가증스럽게 나는 행복하노라 외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잃어버렸던 그것을 되찾고 싶었다.
클로에의 대답에 쿤은 묘한 표정이었다. 질문했을 때와 변함없이 같은 표정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고뇌하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감히 보필해드리겠습니다.”
“…….”
“그러니, 행복해지십시오.”
그러다가 마지막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