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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주해버린 정사 (10/46)


#10. 마주해버린 정사
2023.05.10.


“이제는 정말 가야 합니다!”

마부는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아주 깊은 밤에 숲을 건너게 될 것이라 주의했다.

마부의 재촉에 클로에가 서둘러 시트에 앉았다. 쿤 또한 상체 일부분을 마차 안으로 욱여넣었다.

“조심히 가요. 클로에. 나의 친우.”

진짜 작별을 알리던 쿤이 넌지시 손을 내밀었다. 뜻을 헤아린 클로에가 그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특출나게 하얀 손등은 핏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았다. 쿤은 그게 고결한 성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조만간 서신으로 안부를 묻겠습니다.”

친구 사이에선 으레 주고받는 인사. 게다가 왕녀였던 클로에에게는 더더욱 흔하디흔한 입맞춤이었다.

단순 기분 탓인지 쿤의 것은 사뭇 달라 보였다.

짧게 스친 입맞춤이었음에도 유독 길게만 느껴졌으며, 부드러운 끝마침에도 여운이 남을 정도로 진득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다른 이의 입술을 탐해 본 적 없어 모르나, 훗날 입맞춤을 나누게 된다면 꼭 이런 느낌이 들 것 같다는 요상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사무적인 관계가 아닌, 정말 감정으로 시작된 친우.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격정적으로 인사를 하는가 싶었다.

북부로 가기까진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소요되었다. 평소라면 길고 피로했을 여행이 오늘은 유독 짧게만 느껴졌다.

저만치서 공작저의 대문이 드러났다. 화려하고 고아한 저택이 클로에에게 막대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창틀을 쓸어 넘기던 클로에가 창문 쪽으로 머리를 맞댔다.

돌아갈 곳이 지옥밖에 없다는 건 참으로 절망스러운 일이다.

원망스럽게도 마차는 계속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머지않아 저택의 대문 앞까지 다다랐다.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온 클로에가 곧장 이상함을 감지했다.

공작가의 일원 대부분이 대문 앞에서 기립하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클로에의 남편, 칼리스가 서 있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서야 클로에를 환대하기 위한 상황이 분명한데.

뒤편에 엉거주춤 서 있는 헬레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른 시종들도 영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즉, 칼리스의 독단행동이라는 것.

“클로에!”

칼리스가 밝은 표정으로 클로에를 반겼다. 두 팔도 활짝 벌리고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아줄 기세였다.

그 와중에도 제 연인의 눈치가 보였는지, 손에 입을 맞추어주는 것으로 노선을 틀었다.

원하지도 않는 과잉 친절은 피곤할 따름이다. 그러잖아도 피로했던 클로에는 금세 수척해졌다.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몇 배는 나을 것 같군.’

클로에는 그와 떨어지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듯 바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눈치 없는 칼리스는 저택 안에서도 그녀를 계속 쫓아다녔다. 방문 앞에 다다른 후에는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주인이 며칠간 자리를 비운 만큼 방이 더러워져 있어야 정상인데,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말끔하게 정리해놓았어.”

곧 기고만장해진 칼리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깨를 으쓱이는 몸짓이 꼭 칭찬을 바라는 꼴이었다.

“아……. 네. 고마워요.”

“먼 길 오느라 피로가 쌓여 있을 텐데, 어서 식사하러 가지. 오늘은 특별히 그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주방장에게 부탁해놓았어.”

“…….”

“맞다. 식사 후엔 플로럴 샤워도 준비했어. 그대가 좋아하는 라일락 향으로. 노곤을 풀 겸 푹 쉬고 와.”

업적을 읊듯 자랑스럽게 말하던 칼리스는 그 뒤로도 자신이 클로에를 위해 한 것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미미한 클로에의 반응에 저 또한 무안해졌는지 금세 방을 나가버렸지만.

‘뭔가 이상하네.’

확실히 오늘의 칼리스는 이상했다.

사랑해 마지않는 헬레나는 어디에 두고, 홀로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굴지 않는가.

아주 우연히도, 또 역겨운 방법으로, 클로에는 그의 의중을 알게 되었다.

***

왕실을 방문했을 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클로에는 밤 내내 잠을 설쳤다.

새벽 산책이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복도를 거닐던 도중이었다.

‘……불?’

한밤중 불이 켜진 방이 눈에 띄었다.

촛불이 꺼져 어두컴컴한 주변 때문에 그 방이 칼리스의 침실이란 걸 다다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밤 늦게 칼리스의 방 앞에서 서성이는 걸 들킨다면 이상한 의심만 살 터. 클로에는 조용히 몸을 틀었다.

“……아!”

열려 있는 문 틈으로 들어온 비명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다짐이 무너질 일은 없었을 텐데.

클로에는 본능적으로 문 틈새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곳엔 적나라한 살갗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윽고 음탕한 소리가 클로에의 귀를 강타했다.

“칼리스……!”

“헉, 허억, 헬레나.”

클로에가 옛적에 사랑하던 남자의 뒷모습. 그 남자의 밑에 깔린 한 여자.

그 두 사람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떠나자. 떠나야만 해.

역겨운 장면을 계속해서 보고있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그녀의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클로에는 선 채로 얼어붙어 두 사람의 정사를 끝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싫어.’

어릴 적, 그녀의 교육을 담당했던 선생은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 간 나누는 관계는 고귀한 것이라고. 그보다 아름다울 수 없고, 그보다 완벽할 수 없다고.

클로에가 보고 있는 장면은 선생의 가르침과 모순되었다. 저곳에선 짐승 두 마리가 얽혀 울부짖고 있다.

선생, 저것이 정말 고귀한 행위인가.

클로에를 기만한 주제에, 클로에가 만든 저택에서 저들의 그릇된 사랑을 키워가는 짐승들의 사랑이?

‘싫어. 싫어. 싫어!’

클로에는 정녕 눈알을 도려내고 싶었다. 듣고 있는 귀를 뜯어 저 소리를 차단시키고 싶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을 찢어 갈기고 싶었다. 저주를 내려 평생을 괴롭게 만들고 싶었다.

여자의 높은 하이톤 소리. 남자의 거친 숨소리. 살결이 부닥치며 나는 마찰음.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저택이 떠나가랴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칼리스는 여자의 몸 위에 제 몸을 포갰다.

더러운 행위가 드디어 끝을 알린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앉았다.

헬레나는 행복한 얼굴로 남자의 어깨에 제 몸을 가두었다. 칼리스는 그녀를 한 번 꼭 껴안아 주더니, 이내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한 헬레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무 좋았다느니, 며칠째 이러고 있으니 허리가 나가겠다느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된 것처럼 굴던 헬레나는 그러다 갑자기 돌변했다.

“아까 그 여자한테 왜 그랬어?”

부끄러워하던 손짓과 귀여운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앙칼진 표정만이 남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칼리스가 당황해 반문했다.

“누구?”

“누구긴. 공주 말이야.”

클로에의 이야기였다.

내용을 엿듣고 있던 클로에는 대화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과하게 구는 거야? 너무 유난이란 생각 안 들어? 지켜보는 날 좀 생각해줘. 칼!”

돌아온 클로에를 위해 공작가의 사람들이 그녀를 환대해야만 했던 것. 그리고 칼리스가 실없이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려 노력한 것을 이르고 있었다.

클로에도 이상하게 여긴 마당에 헬레나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침대에 앉아 연기를 들이마시던 칼리스가 급하게 파이프를 껐다. 이내 그는 토라진 헬레나를 꽉 안아주었다.

담배 냄새가 싫었는지 코를 찡그리던 헬레나도 금세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미안해. 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줘. 내 사랑.”

칼리스가 헬레나의 토라짐을 풀어주기 위해 변론을 시작했다.

“왕실에서 방문하라는 서신 하나 없이 마차를 보냈잖아. 게다가 클로에만 초대했다니, 되게 찜찜하지 않아? 만약 저 여자가 국왕 폐하에게 모든 걸 불었다면, 그래서 이혼을 추진하기라도 한다면?”

“둘은 이혼하고, 내가 새로운 공작부인이 되는 거지?”

곧이어 헬레나가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의도한 정답과 거리가 먼 답변이었다. 단순하고도 탐욕 어린 답변에 혀를 절로 내두를 듯하지만, 칼리스는 그런 제 연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양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어. 공작위는 물론 물려받은 몇몇 영지까지. 매달 받고 있던 생계비가 사라지는 건 물론, 여태껏 모아둔 돈이 전부 위자료를 내어주는 데 낭비될 수도 있는걸?”

댓 발 나와 있던 입이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간다. 눈을 끔뻑거리던 헬레나가 이해했다는 양 웃었다.

“……그 여자한테 전부 빼앗기는 건 싫어. 난 이 삶을 계속 누리고 싶은 걸.”

“응. 나도 너와 행복하게 지내고 싶으니, 역겹지만 그 여자를 위하는 척하는 거야.”

“알았어! 서운해하지 않을게. 칼이 정말로 사랑하는 건, 나니까.”

칼리스는 연인을 갸륵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마에 입술을 문대고, 헬레나의 갈색 머리칼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이래서.’

저택이 떠나가라 웃는 두 사람과 달리 클로에만 웃지 못했다.

‘이래서 이혼을 허락받아야만 했던 거였는데.’

절망을 극복하게 해주었던 친우와의 만남.

그것이 일시적인 행복이었음을 명시하듯 클로에는 차가운 현실에 재차 부딪힌다.

***

가까스로 방에 도착한 클로에는 기절하다시피 잠을 잤다. 그녀를 깨우는 노크 소리가 없었더라면 점심 쯤에야 일어났을 터였다.

부산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클로에가 들어오라 명령했다.

‘제인일 리는 없을 텐데.’

제인은 다른 시종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를 노려 방에 들렀으므로 이 시각엔 방문하지 않는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님.”

문이 열리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몰려왔다.

헬레나의 등장에 보기 좋게 그녀를 등진 자들이 오늘은 클로에를 돕기 위해 왔다고 한다.

순간 클로에의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상기되었다.

“혼자 준비할 테니 내려가들 있으렴.”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단호한 한마디에 하녀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끝내 혼자가 된 클로에는 나릿나릿 채비해 내려갔다.

다이닝룸으로 향했을 땐 이미 식사 예정 시간보다 한 시진이나 늦은 후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식사가 시작하고도 남았겠지만, 헬레나와 칼리스는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클로에가 지각했음에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집사를 불러 음식을 준비하게 시킨 칼리스가 이윽고 클로에에게 말을 걸었다.

“늦어서 걱정했어. 클로에.”

“일부러 늦은 것이었는데, 굳이 기다리셨군요.”

“함께 식사해야지. 가족인데.”

말 같지도 않은 말에 클로에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헬레나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럼요. 우리는 가족인데요.”

사랑스럽게 접힌 두 눈이 클로에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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