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의 친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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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의 친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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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의 친우에게
2023.05.11.
간단한 에피타이저를 즐길 즈음 바로 메인 요리가 나왔다. 아침 식사부터 노릇한 고기 냄새가 났다.
클로에의 앞에는 겉이 살짝 익은 램 스테이크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당신이 양고기를 좋아한다길래 갓 잡은 어린 양을 구해보았소. 육즙이 흘러넘치니 맛이 일품이야.”
칼리스는 특별히 그녀를 위한 메뉴로 준비했다며 슬쩍 윙크했다.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어슷썰기 한 스테이크를 음미한 뒤엔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요리의 맛을 칭찬했다.
클로에가 작게 떨어져 나온 스테이크 조각을 집다가 놓았다. 잇따라 손에 들려 있던 포크가 접시 위로 떨어지다시피 내려졌다.
충돌과 함께 나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접시로 향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클로쪽으로 옮겨졌다.
“전하.”
우아함이 깃든 얼굴과 달리 시선이 냉랭함을 담아냈다.
칼리스를 부르는 목소리도 음정에 변화가 없어 쌀쌀맞았다.
“외람되오나 저는 양고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주방장이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을 땐…….”
이어지는 변명에 클로에가 반대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놓았다. 접시 위에 맥없이 부딪힌 식기에 시끄러운 금속음 소리가 났다.
“그건.”
입을 연 클로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전하께서 양고기를 좋아하시니, 가능한 취향에 맞추어 식사가 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리 답했던 거지요.”
뒤따른 대답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무안을 얻은 칼리스는 와인만 홀짝였다.
“계속 식사할까요?”
칭찬을 요구하는 칼리스 때문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는데, 잠잠해지니 살 것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가니시 위주로 골라 먹었다. 요리 실력이 워낙 출중해 그런지 채식도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저…….”
식사가 적막으로 치달을 즈음이었다. 가냘픈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들어왔다.
“부, 부인…….”
낯선 호칭을 담은 목소리는 놀랍게도 헬레나의 것이었다.
큰 눈망울이 클로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녀의 인형 같은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위선 따위에 헛되이 쓰는 여자가 안타깝다.
“말하도록.”
“그, 왕궁에선 뭘 하셨나요?”
“그게 왜 궁금하지?”
“공주님들은 대체로 뭘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헬레나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수줍음이 아닌, 창피함에서 비롯된 변색이었다.
창피한 와중에도 꿋꿋이 연기를 이어나가는 여자의 집념이 가히 대단하다.
“나라고 뭐 대단한 게 있을까. 그저 가족의 일상을 보냈지.”
유달리 강조된 ‘가족’이란 단어.
곧이어 두 쌍의 눈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식사 예법을 배우지 않은 헬레나는 초조함에 다리까지 떨고 있었다.
‘진실을 밝히는 게 좋을까. 아니면…….’
역겨움이 끓어 넘친다. 클로에는 저들이야말로 쿤이 말한 ‘쥐새끼’들이라고 생각했다.
정녕 거북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들의 장단에 맞춰주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거짓된 호의일지언정 그들을 받아들일까.
클로에는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결단코 저들의 호의가 고파서는 아니었다.
이혼을 거부당하며 버려진 클로에에게 남은 길이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못 본 사이 생긴 고민을 털어놓고.”
고민.
이번엔 다른 단어에 힘주어 발음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어깨가 서슴없이 움찔거렸다.
“내 말에 경청한 가족들은 이후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지.”
씁쓸한 기억을 미화시키려니 퍽 잔인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잔인한 건 클로에가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부, 부인께선 어떤 고민이 있으시길래요?”
“글쎄.”
“…….”
“우리가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만큼 살가운 사이였던가?”
싸늘한 반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헬레나의 입이 꾹 닫혔다.
헬레나의 입이 몇 번씩 더 벙끗거리다가, 이내 음식물을 입에 구겨 넣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어색하게 끝난 대화의 여파인지 나머지 식사는 빠르게 끝이 났다.
싹싹 비워진 칼리스의 접시와 달리 클로에의 접시는 거의 새것이었다.
거의 손대지 않은 스테이크를 본 칼리스의 표정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클로에는 될 수만 있다면 그 얼굴을 저장해, 우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 보고 싶었다.
디저트로는 무화과가 올라간 타르트가 나왔다.
한번 된통 당한 칼리스는 말이 없었다.
세상이 도운 일이었다. 무화과 타르트 또한 클로에가 칼리스의 입맛에 맞추느라 종종 내놓으라 부탁한 메뉴였으니까.
이쯤 되니 그는 회로를 틀었다. 아예 다른 방법으로 점수를 딸 속셈인 것이다.
클로에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거나, 냅킨을 건네주기도 했다. 아예 냅킨으로 접은 장미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때마다 클로에는 칼리스의 행동을 모방해 헬레나에게 갚아주었다.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고, 냅킨을 주고, 칼리스가 건넨 종이꽃을 선물해주었다.
점점 뒤틀리는 헬레나의 표정 또한 제법 볼만했다.
만찬 시각이 끝을 알리고 있었다. 어색함이 가득한 침묵 속 클로에가 헬레나를 불렀다.
“헬레나 양, 그대는 내게 고민이 무엇이냐 물었지.”
“예? 아, 예…….”
“곧 봄이 오니 화원을 꾸미고 싶은데 어떤 꽃이 어여쁠까, 가족들과 논하고 왔다.”
“예?”
“작년과 똑같은 꽃으로 구상하는 건 다소 지루할 것 같아서.”
헬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린 채로 눈을 끔뻑였다. 눈꺼풀이 몇 번씩 덮였다가 뜨이기를 반복할 무렵, 그녀가 사색했다.
반대로 클로에는 고아한 미소를 지었다.
“디저트도 그다지 입에 맞지는 않은지라 먼저 떠나보겠습니다.”
클로에는 디저트 접시 또한 새것으로 돌려보냈다.
먼저 작별 인사를 고한 그녀가 벙찐 두 사람을 두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마 칼리스는 클로에가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가 왕실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다고 생각하겠지.
왕실과 사이도 안 좋으니 대놓고 질문할 수도 없을 터. 혼자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이건 시간 한계가 있는 임시방편이다.
왕실이 그녀를 외면한 이상 공작가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는 없으니, 언젠간 칼리스 또한 의심할 것이었다.
그 전까지 무언가라도 해야 했다.
***
잠을 자는 클로에의 귓속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산스러운 소리에 그녀의 수면을 깨웠다.
‘……무슨 소리지?’
비비적대며 일어난 그녀가 새까만 방을 밝히기 위해 커튼을 쳤다.
은은히 내려오는 달빛이 방 안을 비추었다. 그사이 방 안을 둘러본 클로에가 의아함을 느꼈다.
‘잘못 들었나?’
달리 바뀐 게 없었다. 오히려 변화가 없는 것이 수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잠꼬대를 착각한 것일지도.’
클로에가 도로 침대로 돌아가려던 무렵이었다.
침대 옆, 조그마한 사이드 테이블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달빛이 약한 채라 대상의 정체까지 정확히 파악하긴 어려웠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그녀는 달빛 아래로 물건을 가져다 댔다. 차츰 선명해진 물건이 정체를 드러냈다.
‘편지?’
얇은 종이봉투. 딱딱하게 굳은 실링 왁스. 옆으로 보나 뒤로 보나 편지다.
‘나한테 갑자기 무슨 편지가…….’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에의 귓속으로 다정한 음성이 퍼져나갔다.
‘그대의 집으로 조만간 서신할게요. 우리, 이제 그래도 되는 사이잖아요.’
쿤. 며칠 전 그녀의 친구를 자처한 정체 모를 남자.
클로에가 실링 왁스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흔히들 가문의 문양을 새겨놓곤 하지만, 이 편지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역시나 쿤뿐인데…….
‘하지만 헤어진 지 이틀뿐이 되지 않았는데.’
편지를 부친 후, 수신인에게 도착하기까지는 사흘에서 열흘까지 걸린다.
이례적으로 빨리 보낼 수는 있으나 비용이 만만치 않은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일반적인 방법을 쓰곤 했다.
쿤이 고작 친우와 서신을 주고받겠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비용을 내진 않았을 텐데,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정체를 쉬이 밝히지 않더니,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클로에와 쿤의 첫 만남이 모순된다.
클로에가 도맡은 막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곳으로, 잘난 집 자제가 방문할 일은 없었다.
아니면 타국 사람이었으니 왕실에서 따로 지원해주는 막사에 대해 몰랐던 걸까.
‘뭐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클로에가 생각해 나오는 답은 없다.
그녀는 추리를 포기하곤 편지를 뜯었다. 이내 살짝 뜯긴 편지지 틈 사이로 상큼한 레몬 향이 배어 나왔다.
쓸데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 클로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의 친우에게.」
그녀를 가장 처음 반긴 첫 문장. 오직 한 사람만이 부를 특별한 호칭.
정말 새삼스럽지만, 놀랍게도 그였다.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도착하지 않았던 편지가 어찌 그녀의 방까지 전달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클로에의 방에 발길을 끊다시피 한 시종들이 친절하게 가져다 두었을 리도 없는데.
‘제인이려나?’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녀가 없는 새에 제인이 몰래 들여놓았다는 가정.
‘고맙네. 편지까지 일일이 신경도 써주고.’
클로에는 내일 제인을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한 아름 가지고 오리라 다짐했다.
열기구처럼 들뜬 마음이 서둘러 편지를 확인해라 보챘다. 그녀는 달빛이 더 잘 드는 곳으로 고쳐 앉은 채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날이 밝은 뒤에 읽는 것이 편할 테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아예 처음이라 조금 쑥스럽습니다. 말투가 어색해도 봐주십시오.」
푸르른 조명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오묘해졌다. 수려한 그의 글씨체가 감성적인 조명과 제법 잘 어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