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누구의 편지이길래?
(12/46)
12. 누구의 편지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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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누구의 편지이길래?
2023.05.12.
쿤의 편지는 간결했다.
그가 기억하는 클로에와의 첫 만남으로 시작해, 전쟁이 끝난 후 어떻게 살았는지. 처음 대화 때 미처 설명해주지 못했던 그의 배경에 대해서였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 그의 인적사항은 나와있지 않았다. 내심 그의 정보를 기대하던 클로에가 실망했다.
클로에의 정체는 진작 다 밝혀진 마당에 무얼 그리 숨기려 하는 것인지.
저토록 정체를 숨기는 자는 보통 셋 중 하나일 텐데. 나쁜 놈이거나, 너무 잘난 놈. 혹은 둘 다.
편지를 보낸 값을 생각하면 너무 잘난 놈이 될 테다.
쿤이란 이름에 너무 잘난 놈이라면 한 사람이 생각난다.
제국의 현 황제.
하지만 클로에는 자신의 친우가 황제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황제가 허름한 차림새를 한 채로 마을에 돌아다닐 일도 없을뿐더러, 지갑을 찾아주러 돌아다니지도 않을 테다.
게다가 쿤과 황제는 너무 달랐다.
클로에가 직접 마주했던 황제나, 소문에 들려오는 황제나, 모두 냉철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으니까.
‘조금 더 친해지고 난 뒤엔 정체를 알려주시겠지.’
클로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편지를 마저 읽었다. 어느덧 마지막 장이었다.
「아마 그대는 우리가 언제 만날지 궁금해하겠죠. 저 또한 그래요.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감히 단언해보겠습니다. 우리는 곧 만날 거예요. 클로에.
그때까지 그대의 안녕을 빌게요.」
고작 활자로 된 이야기일 뿐인데, 그 어떤 서적보다도 짧은 내용인데, 이렇게 흥미로울 수가 있던가.
「답변을 써준다면 무척이나 영광일 거예요. 클로에.」
마침 편지 끝장 맨 밑부분에 추신이 쓰여 있었다.
수려함을 완전히 떼어놓을 순 없었지만, 약간의 장난스러움이 배어있는 글씨체였다.
클로에는 답신의 첫인사로는 꼭 「영광의 답장을 시작하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그 뒤로는 편지를 발송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었다.
「답신은 편지가 올라가 있던 그 자리에 두면 됩니다. 딱히 보내야 하는 시기까진 정해져 있지 않으니, 편하실 때 써 주세요.」
클로에 쪽에서 편지를 발송하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하는 쿤 측에서 직접 편지를 수거해가는 것이었다.
주소지를 밝히지 않기 위해 이런 번거로운 절차까지 감수하다니. 이쯤 되니 클로에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던 그의 정체마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현상 수배범?’
돈이 너무 많지만,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상태. 어째 누군가가 떠오른다.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리라.
클로에는 답신을 보낼 때 조심스럽게 그의 신원을 묻기로 했다.
다음 날, 클로에는 일어나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편지를 보내야 하는 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면 언제든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답신을 보내 그 답신의 답신을 받고 싶었다.
그간 사무적인 편지만 써 왔던 클로에에게 친우와의 편지 놀음은 이색적이었다.
클로에는 중간중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쿤의 이야기를 들은 소감도 써 내렸다.
이것저것 쓰다 보니 편지의 내용이 꽤 길어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혼자만 들뜬 것 같아 클로에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래서 편지 봉투 안에 넣기 전에 편지지 몇 장을 빼돌렸다. 기회가 된다면 이 내용은 다음번에 부치기로 하면서.
편지를 다 쓴 뒤엔 일 층으로 내려가 조찬을 즐겼다. 식사의 질은 어제보다 현저하게 낮았으나, 만족감은 그 언제보다도 높았다.
편지의 발송 여부가 궁금했던 클로에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돌아왔다.
‘갔다!’
쿤의 지침을 따라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편지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혹, 제인이 이 편지 놀음에 가담하고 있는 걸까? 대체 누가 편지를 가져간 것일까?
호기심이 일었으나, 가만히 두기로 했다.
마술이 그러하듯, 비밀을 파헤치지 않은 채로 두는 것도 하나의 묘미였다.
***
“웬일로 폐하 앞으로 온 서신을 읽고 계십니까?”
군주의 집무실로 들어온 딜런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남자의 의연한 모습도 놀라운데, 무려 그의 손에 편지까지 들려 있었다.
읽기 귀찮다며 딜런에게 편지 무더기를 꼬박꼬박 바치던 주군이 맞나 싶었다.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이어지는 말에 딜런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흥분과 기쁨, 그리고 대견함이 잔잔하게 피어올랐다.
드디어 저 남자가 외교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구나!
감격해버린 딜런은 오는 길 동안 생각해두었던 잔소리 꾸러미를 풀지 않았다.
그건 딜런이 생에 한 업적 중 세 번째로 잘한 일이 되었다.
편지에 집중하다 못해 몰두해버린 쿤의 집중력을 깼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겨났을 테니까.
‘사랑하는 친우에게라…….’
쿤은 종이가 닳도록 정독했던 편지를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제일 맨 윗줄, 발신자를 적는 곳. 그곳에서 그녀는 저를 ‘사랑하는 친우’라 일컬었다.
적는 와중에도 여러 번 고민했는지 글자의 획이 뚝뚝 끊겨 있었다. 쿤만 발견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증거였다.
밑으로는 편지의 답장과 새롭게 시작하는 클로에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마지막엔 은근슬쩍 쿤의 정보를 묻기도 했다. 정말 그가 답을 알려주리라 생각하는 건지. 순진하기도, 또 무모하기도 했다.
「그럼 답장을 기대해도 될까요? 아니, 기다릴게요.」
발랄하게 시작한 편지와 달리 마지막 인사는 어딘가 긴장한 느낌이었다.
쿤과의 관계를 달가워하지 않던 여자가 이제는 그와의 관계를 반기고 있다.
순식간에 뒤집힌 우위가 달가운 것도 한순간이었다. 불현듯 쿤의 감정이 빠르게 들끓었다.
‘이리 쉽게 정을 주어서는 안 될 텐데.’
수많은 관계를 겪어와 무던해졌을 그녀는 의외로 정에 약했다.
다른 이에게도 이렇게나 쉽게 마음을 주진 않을까.
그 쥐새끼들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말투를 쓰는 게 아닐까.
그럴 하잘것없는 고민으로부터 쿤의 불쾌함이 시작되었다.
“딜런.”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부정적인 감정이 오랫동안 쿤을 쫓아다녔다.
그는 끝내 자신의 전담 해결사를 불렀다.
“예. 폐하.”
엄숙해 보이는 군주의 부름에 딜런이 즉답했다. 솔직하게는, 약간 긴장해버리기도 했다,
“나를 경계하던 자가 돌연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예?”
“나를 달가워하지 않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날 필요로 하는군.”
딜런은 혼란스러웠다.
편지를 읽은 뒤 물은 것이라면, 편지에 관련된 질문이 아니겠던가?
하지만 저 질문은 외교 문제와 전혀 관련이 있어 보이질 않았다.
“어……. 사람을 잘 믿는 분이신가 보죠.”
어쨌거나 답은 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딜런이 대답했다.
통상적인 대답에 상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의 대답이 원하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딜런이 놀라 금방 정정했다.
“……정정하겠습니다. 처음엔 아니었을지언정 이제는 폐하를 믿을 수밖에 없는 거겠죠.”
“나를?”
“예. 폐하의 진가를 알아버린 이상 폐하를 놓는 건 곧 그 사람의 손해니까요. 물질적인 손해뿐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손해도 포함으로.”
짧은 시간 내에 수려한 대답을 내놓은 딜런은 재차 긴장했다. 과연 이번에는 그의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을까?
곧 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납득한 표정은 대답이 만족스러웠노라 표현하고 있었다.
역시 저가 잘나 상대가 이끌린 거라는 소리가 듣고 싶은 거였다. 이미 정해진 답을 딜런이 말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겠지.
“뭘 그런 것을 걱정하십니까. 진실이나 상대의 생각이 어떻든, 어차피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상황은 흘러갈 텐데.”
혹여나 쿤이 또 쓸모없는 질문을 할까 염려한 딜런이 쐐기를 박았다. 반쯤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아첨이었고,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다.
그 어떤 고난이 생겨도 쿤은 원하는 것을 얻을 테다. 그것이 쥐기 어려운 거라면, 더더욱 치밀하고도 능란하게.
원하는 건 모두 다 손에 얻은 사람. 그 어떤 성대한 계획도 모두 성공한 사람.
능력도 훌륭한데, 서 있는 자리조차 훌륭한 저 남자는 이미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저런 사람이 해내지 못할 게 무엇이 있던가.
‘아, 맞다. 전쟁은 실패하셨었지.’
속으로 쿤을 숭배하던 딜런이 번뜩 정신 차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실수라기도 뭣할 정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던 발론트 왕국과의 전쟁이 남아 있었다.
쿤의 훌륭한 업적 사이 유일하게 남은 업적. 제가 한 게 아닌데도 딜런은 난데없이 억울해졌다.
“……근데 폐하, 이번엔 제가 뭐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발론트 왕국은 대체 왜 포기하신 겁니까?”
그 찰나, 테이블을 두들기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편지를 바라보고 있던 쿤의 시선이 딜런에게 닿았다.
아차.
서늘한 붉은 눈을 마주친 딜런이 식은땀을 흘렸다.
주제넘은 질문을 당당하게 전시해 버리다니.
쿤의 옆을 오랫동안 지켜온 저라도 살아남지 못할 행동이었다. 딜런은 도를 넘은 자신에게 어떤 처사가 날아올지 바짝 긴장했다.
“포기한 적 없어.”
생각과 달리 쿤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뜻밖의 상냥함에 딜런은 급기야 무서워졌다.
폐하께서 뭘 잘못 드신 게 아닐까.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뿐.”
“그게 무슨…….”
“난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보지 못한 적이 없어. 시간과 노력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목표물은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지.”
“…….”
“이번에도 마찬가지란 뜻이란다. 딜런.”
상냥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강압적인 분위기.
‘진짜 무슨 소리인질 모르겠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정말로 한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닥쳤다.
“딜런.”
이후 멍하니 서 있는 딜런을 쿤이 불렀다.
“……예. 예.”
“양피지.”
양피지를 가져오라는 쿤의 명령에 딜런은 좋다며 방을 나섰다.
‘아니, 근데 갑자기 무슨 양피지?’
천천히 창고로 향하던 딜런은 급 궁금해졌다.
저보다 덜떨어진 자들에게 차릴 예의는 없다며, 답신도 아무 종이에나 휘갈기던 남자가 웬 양피지를 찾는가 싶었다.
대체 누구에게 받은 편지이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