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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럴 사이는 아니니까요 (13/46)


#13. 이럴 사이는 아니니까요
2023.05.13.


클로에의 걱정이 무안할 만큼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돌아온 편지엔 쿤의 취미에 대해 적혀 있었다.

「나는 검을 다뤄요. 아마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다룰 겁니다.」

의기양양한 문장에 클로에는 조금 웃었다. 돌연 떠오른 기발한 대답에 답장을 쓸 시간이 기다려졌다.

「내가 이 일을 사랑하게 된 데엔 클로에의 몫도 커요. 나 또한 내 주변인들을 지키고 싶어졌거든요. 그대와는 조금 방식이 다르지만요.」

이야기의 흐름은 검술에서 클로에와의 첫 만남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클로에는 사실 쿤과의 만남이 기억나지 않았다.

병상 위에 오른 수많은 기사를 만났지만, 개중엔 기억에 남는 자들도 많았다. 게다가 저렇게 강렬한 인상의 남자라면 기억에 짙게 남을 법도 한데…….

이것저것 읽다 보니 편지는 어느새 끝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는 사람이랍니다. 물론 시간이 없을 땐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답신을 보낼 거고요. 그러니 쓸데없는 염려는 말아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정이 가득한 마지막 인사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양피지를 지분거리던 그녀는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둔 새 양피지를 꺼냈다. 읽으며 생각해둔 내용이 있어서인지 손이 술술 움직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편지 쓰기는 끝이 났다. 쿤의 편지 옆에 뉜 자신의 편지. 사적인 편지를 양피지로 쓰는 사람은 둘밖에 없으리라.

‘그나저나 양피지?’

두 편지를 번갈아 보던 클로에가 위화감이 들었다.

양피지는 제법 비싼 편이다. 게다가 공적인 편지가 아니라 사적인 편지에 쓰는 일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드물다.

‘타국 귀족들을 좀 알아봐야겠어.’

친우에겐 미안하지만, 클로에는 발론트 왕국과 가까운 국가의 귀족을 좀 알아보기로 했다. 이름은 아니, 추려내기 쉬울 테다.

클로에는 저번처럼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편지를 올려두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저번처럼 편지는 없어진 채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편지가 새롭게 도착했다. 그날 오후 그녀는 곧장 답신을 썼고, 날이 밝자 어김없이 답신이 돌아왔다.

다음 날, 그다음 날, 또 다음 날.

끼니는 거른 적 있어도 편지를 거른 적은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활발히 교류했다. 편지를 모아두는 서랍장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숨을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료했던 인생. 기다릴 것이 생겼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

‘마음에 안 들어!’

시녀들과 함께 저택 구경을 하던 헬레나는 불청객을 발견하고 말았다. 다이닝룸에서 홀로 점심을 만끽하고 있는 클로에였다.

고작 빵과 수프를 먹을 뿐인데 우아하게 보이다니. 헬레나는 한시라도 빨리 저 얄미운 여자를 골려주고 싶었다.

칼리스가 단단히 경고하지만 않았더라도 저 밥상을 엎어버렸을 텐데.

‘짜증 나 죽겠어. 권력을 방패 삼아 죄 없는 우리를 괴롭히기나 하고…….’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난리를 치고 두 사람을 이혼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저택도, 그의 직위도, 헬레나가 입고 있는 이 값비싼 드레스도 전부 저 여자로부터 나왔다고 하니 별수 없었다.

좀만 더 참을 수밖에.

“셰인.”

“네. 마님.”

“공주의 상태는 요즘 어떻지?”

셰인은 헬레나의 눈치를 보다가 우물쭈물 답했다.

“확실히 조금 괜찮아 보이십니다.”

“네가 보기도 그러니? 공주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데?”

“예. 식사도 거르지 않으시고, 정원에서도 종종 보이십니다. 하나 웬만해선 시종들도 대부분 돌려보내시니……. 정확히 무얼 하시는지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감시 목적으로 붙인 시녀나 하녀마저 족족 돌려보내니까 클로에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진짜 싫어! 왜 저러는 거야. 정말!”

즉,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손가락만 쪽쪽 빤 채로 여자의 추태를 지켜보는 게 전부다.

‘아무리 우리가 잘해준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괜찮을 순 없는 거잖아. 그치?’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거나, 믿을 만한 뒷배가 있는 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국왕 폐하라는 확증은 없었다.

그렇다면…….

‘칼리스랑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겠지?’

설마 저 못된 여자가 칼리스를 다시 제게서 빼앗아가려는 건 아닌 건가? 이 틈을 타서 칼리스를 취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쌍한 그는 억지로라도 여자의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을 텐데.

아니, 어쩌면…….

‘그럴 리가 없지. 일 년간 나만 봐온 사람인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고도 했어. 나만 사랑할 거라고도 했다고!’

클로에를 사랑할 거였다면 진작에 붙어먹었을 테지.

칼리스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헬레나만을 바라본 해바라기였다.

게다가 약속대로 헬레나를 구하러 왔다. 지옥 같은 가난에서 자신을 구제해주고, 아름다운 것만 보게 해주었다.

“셰인. 저거 칼이야?”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헬레나의 눈을 의심케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클로에의 옆으로 앉는 한 남자. 익숙한 인영에 헬레나가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예. 그렇게 보입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를 택하느라 머뭇거리던 셰인이 결국 진실을 고했다.

헬레나는 두 사람을 더욱 자세하게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식사하고 있는 클로에의 옆에 앉은 칼리스는 천연덕스럽게 주방장에게 다른 음식을 요구했다. 머지않아 나온 샐러드 볼은 칼리스가 아니라 클로에 쪽으로 놓였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몇 분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클로에가 먼저 자리를 뜬 후에야 칼리스도 자리를 나섰다.

“망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헬레나가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

“칼, 아까 그 여자와 무슨 대화 했어?”

집무실로 들어온 칼리스는 느닷없이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앞을 바라보니 소파에 헬레나가 앉아 있었다. 칼리스를 노려보고 있는 두 눈에 현재 헬레나의 감정이 확연히 드러났다.

또 무슨 일이 있던 거람. 칼리스는 조금 피곤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헬레나, 말은 조심해야지. 그 여자가 뭐야.”

다정한 얼굴을 한 채로 헬레나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니, 금세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공주를 마님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부인?”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공작가의 마님은 너지.”

“……흥.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공주라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늘 고마워. 내 사랑.”

헬레나의 확답에 칼리스는 마음 편히 안심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클로에는 왕국의 공주였으므로 잘못 빌미가 잡힌다면 왕족모독죄를 물을 수도 있다. 큰 벌을 받진 않겠지만,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랑 무슨 이야기 했냐니까?”

“얘기는 무슨. 공주와 내가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정말 별 얘기 안 했어.”

“그니까 그 별 얘기 아닌 내용을 말해봐. 켕기는 거 있어. 칼?”

아차.

칼리스도 나름 다른 트집을 잡아 주제를 넘긴 것이었는데. 헬레나가 보기 좋게 주제를 되돌렸다.

여자의 촉은 무섭다더니. 평소라면 무지하게 넘어갔을 그녀가 오늘은 지독하게 끈질겼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칼리스가 외출하게 된다면 헬레나가 이곳저곳 꼬치꼬치 캐묻고 다닐 게 분명했다. 숨기려 해도 숨기지 못할 이야기라면, 미리 말하는 게 나았다.

“몰리안 후작가에서 디너 샴페인 파티를 주최했어. 공주에게 함께 참석해달란 부탁을 했을 뿐이야.”

“왜?”

“왜냐니. 혼자 가면 이상해 보이니…….”

“내가 가면 되잖아!”

어찌나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던지. 칼리스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네가?”

“응. 칼이 그랬잖아. 공작가의 실질적 안주인은 나라고. 그리고 내가 될 거라고! 그러니까 공식 석상에서도 칼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헬레나는 사교계에 대해 무지해도 너무 무지했다. 기대에 찬 눈빛이 칼리스가 긍정을 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헬레나.”

안타깝지만 칼리스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실망한 기색이 가득한 눈망울이 축 처졌다.

“……왜?”

“아직 법으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걸. 게다가 주최 측이 초대한 건 공주인데, 대신 널 데려가는 건 주최를 욕보이는 것이기도 해.”

“하지만……. 나도 가고 싶은데…….”

헬레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툴툴댔다.

그녀가 지금껏 가본 파티라곤 친우의 생일 파티가 다였다. 그마저도 동네의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연 저녁 식사가 끝이었다.

연극에서 본 것처럼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곳에서 칼리스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랬는데……. 칼리스의 반응을 보니 오늘은 영 힘들 것 같았다.

그 정도야 서운함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한 번쯤이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남편의 입장까지 생각해주어야 진정한 내조였으니까.

그렇지만 헬레나가 누리지 못하는 걸 클로에가 누리는 건 싫었다.

“그럼 공주를 데려가지 마. 혼자 가면 되잖아. 그 사람들이 그 여자를 꼭 데리고 오라고 했어?”

떨리는 목소리가 진실을 요구했다. 물기 어린 음성이 그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더불어 그의 양심 또한.

사실 연회에 클로에를 데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당일에 받은 일정이었으니, 부인은 바쁜 일이 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다만, 칼리스에게 클로에가 필요하기에 데려가려는 것이다.

사교에 박식하지 않은 그를 다잡아주는 건 언제나 클로에였다. 파티의 주요 인물들만 골라 그와 인사를 시켜준다거나, 다리를 놔주곤 했으니까.

이번 파티에도 중요한 자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고위 귀족들은 늘 그렇듯이 칼리스가 이룬 업적보다는 태생 자체를 중시할 게 분명했다.

그럼 칼리스는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태생부터 귀한 클로에를 데려가야만 했다. 자신의 구겨진 체면을 세울 만한 건 그것 뿐이다.

“걱정하지 마. 공주는 그저 장치일 뿐이야. 가문을 더 키우는 데에 쓰일 하찮은 도구.”

“……알았어. 대신 눈길도 주면 안 돼. 손도 붙잡지 마. 춤도 추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뭘 그런 걸 걱정해. 헬레나.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인데.”

칼리스는 앉아 있던 헬레나를 번쩍 들었다. 그녀를 안은 채로 한 바퀴를 도니 금세 해맑은 얼굴을 했다.

“하녀를 붙여줄 테니까 쇼핑이라도 하고 와.”

“칼은 최고야!”

***

두 사람은 몰리안 후작가의 저택 앞에서 내렸다.

아름답게 정돈된 화원과 대문을 화려하게 꾸민 장식은 빠르게 준비한 것치고 흠 없이 완벽했다.

“가자. 클로에. 와 줘서 고마워.”

칼리스는 서둘러 가자며 클로에의 어깨를 쥐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그는 살가로운 척을 했다.

함께 걸어가던 클로에가 돌연 멈추었다. 우뚝 서 가만히 있는 클로에를 보며 칼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어깨를 흘겨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어깨에 올라간 손을 떼어냈다. 마치 벌레를 떼듯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칼리스는 거부당해 쓸쓸히 퇴장당한 손을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운 눈빛이 곧 클로에를 향했다.

“……클로에?”

“불편해서요.”

“…….”

“우리, 이럴 사이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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