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공작 부부의 은밀한 밀회
(14/46)
14. 공작 부부의 은밀한 밀회
(14/46)
#14. 공작 부부의 은밀한 밀회
2023.05.14.
오늘의 클로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너무나도 비협조적인 태도가, 칼리스를 배려하는 마음 따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연회에 부부가 동반할 때는 남편이 아내의 손을 살짝 쥔 채로 연회장에 들어서는 게 일반적이었다.
예의를 중시하는 클로에가 그를 잊을 리도 없는데, 그녀는 칼리스를 제치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하필 초대장도 클로에가 갖고 있어, 칼리스는 경비병에게 클로에를 가리킨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참으로 모양이 빠지는 일이었다.
클로에의 질 낮은 장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가문에 인사를 갈 때마다 칼리스를 쏙 빼놓고 갔다. 그가 슬그머니 클로에의 옆에 붙어도 아는 체 한 번 하질 않고 내내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게다가 슬로우 댄스를 추는 시간에도 칼리스는 완벽하게 배제되었다.
“클로에, 다음 춤은 같이 추지 않겠어?”
보다 못한 칼리스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물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클로에가 곧 고개를 돌렸다. 칼리스는 그녀의 시선이 황송하다는 듯 냉큼 손을 뻗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 마음이 풀리겠지.’
천하의 칼리스가 원수에게 자존심까지 굽혔다. 그것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지만 그의 손에 포개진 것은 아내의 손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손에는 차가운 샴페인 잔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춤을 추고 싶다면, 다른 여자와 추지 그래요.”
“……뭐?”
“아니면 지금이라도 헬레나 양을 불러오시든가요.”
클로에의 말에 칼리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손과 다리가 달달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공작가가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하던 대로 그녀에게 소리쳤다가는 외려 망신을 살 테다.
간신히 화를 누그러뜨린 그가 클로에를 이끌고 테라스로 나갔다.
“클로에. 당신 대체 왜 이래? 요즘 왜 이렇게 막무가내냐고.”
클로에가 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의사를 내비쳤건만, 자꾸 징징대 가주었더니.
다짜고짜 내던진 질문이 저따위였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입장인가요?”
“아닐 입장은 대체 뭐지? 헬레나는 내…….”
이어지는 칼리스의 말에 클로에가 피곤하다는 양 입을 열었다. 그의 뒷말은 철저히 무시한 채로.
“예. 전하의 첫사랑이었죠. 그래서 결혼 후에도 포기하지 못해 꿋꿋이 데려오신 거고요. 참, 대단한 사랑을 하고 계시는군요.”
“뭐?”
클로에의 비아냥대는 말에 칼리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요즘 그녀의 상태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자신에게까지 저렇게 싫은 감정을 내비친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그의 계획대로라면, 그녀는 잊고 있던 죄책감을 다시 상기하며 제게 굴복해야만 했다. 지난 반년간 그랬듯이.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나선 여느 때처럼 칼리스를 챙겨주기 바빠야 한다. 고위층 귀족들을 제게 주선시켜주고, 세간에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자비하게 칼리스를 두고 떠났다. 무안하게 그를 외면한 채, 친분이 있는 귀족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서 마음이 맞는 귀족을 찾아 사업을 투자받아야 했다.
하다못해 사업을 배운다거나, 자신이 생각한 아이템의 진가를 평가받기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칼리스가 원하는 사람들은 전부 클로에의 곁에 머물러 있다. 공작가에서 철저하게 배제당하는 여자가 이곳에서는 쏟아지는 관심이 벅찰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정작 칼리스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졸지에 혼자가 된 그는 쓸쓸히 연회장을 배회했다.
그를 반겨주는 무리를 찾았으나 무리에 속한 자들은 칼리스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와 처지가 비슷한 졸부. 엄청난 선물 공세를 펼쳐 간신히 참석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시골 귀족. 명성이 추락해 몰락해 가는 귀족.
그는 형편 없는 무리에 둘러싸인 채로 영웅담을 들려줄 뿐이었다.
***
“……무슨 이런 신문이 다 있는 거지?”
클로에는 다음 날 아침, 제인에게 전달받은 신문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르헨 공작 부부의 은밀한 밀회」
제목부터 제법 자극적이었다. 대문짝한 헤드라인에 두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이 테라스에서 함께 있을 때인 듯했다.
언성을 높이느라 가까이 붙은 것이었는데, 상황을 모르면 진한 애정행각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드디어 사랑을 시작한다느니. 곤경을 헤쳐내고 시작하는 관계가 멋있다느니…….
기사를 쓰랬더니, 제멋대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 한 신문사더니, 삼류 신문사가 분명했다.
화가 나 다음 장으로 넘겼건만, 그다음 장도 두 사람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오죽 쓸 거리가 없으면 1면과 2면을 전부 공작 부부의 이야기로 채우는 건지.
클로에는 자신이 익명인 척 기삿거리를 제보해야 하는 걸까 심히 고민했다.
‘그래도 아직 헬레나의 소문이 새어 나가진 않은 듯하네.’
두 사람의 로맨틱한 장면이 기사화된 걸 보니, 아르헨 공작가에 새로운 여자가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나 보았다.
제 주인들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이 대단했다. 입이 간질거릴 텐데도 애써 본능을 억누르고 있다니.
다시 생각해보니, 꼭 제 주인을 위해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왕족인 클로에를 괴롭히고, 방관한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 입을 닫고 있을 수도 있다.
‘그냥 모른 척 뿌리를 뽑는 게 맞았을까?’
그리 생각하니 괘씸했다.
발론트가 헬레나를 내친다고 했을 때 수긍하면 상황이 나아졌을까?
그때는 칼리스에게 죄책감이 있던 반면, 지금은 일말의 관심조차 안 남지 않았던가.
지금이라도 모른 체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건…….
‘그렇게 된다면, 칼리스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겠지.’
역시 멍청한 짓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와의 이혼이니까.’
그의 바닥을 마주한 이상 같은 집에서 살 수 없었다.
물론 이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던 가족이 가차 없이 그녀를 내쳐버리고 말았으니.
게다가 방명록을 남기고 가면 따로 연락을 준다던 신전은 어쩐 일인지 소식이 없었다.
플랜 비도 희망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니 이젠 플랜 씨로 넘어가야 했다.
그들이 클로에의 거짓을 알아채기 전에.
“그냥 고소하시는 건 어떠세요?”
먹먹한 귓속으로 제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클로에가 눈썹을 치켜뜨자, 제인이 조심스레 신문을 가리켰다. 그녀가 인상을 쓴 채로 신문만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의미로 오해한 듯했다.
“괜찮단다.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도 아니고.”
“……정말 괜찮으세요?”
제인이 그녀의 대답을 빈말이라 치부하며 되물었다.
“아무렴. 괜찮고말고. 정작 괜찮지 않은 사람은 따로 있으니.”
걱정이 무색하게 클로에는 정말 괜찮았다.
칼리스와 함께 있는 장면이 대문짝하게 그려져 있는 건 꺼려지나,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연회에 참여한 귀족들은 진실을 아니 추후 헛소문이 퍼질 일도 없다.
클로에의 예상대로라면 이 기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자에게 더 타격이 크리라.
***
“아, 아, 악!”
방을 가득 메꾸는 울부짖음이 연신 반복되었다. 헬레나의 목소리였다.
힘껏 소리치는 그녀의 밑으론 신문지가 나뒹굴었다.
헬레나는 자신의 두피가 벗겨질 정도로 힘차게 머리를 뜯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고통이 치솟았지만, 난도 당한 마음만큼은 아니었다.
기어코 자신 대신 클로에와 함께 연회에 가더니, 몹쓸 짓을 저질렀을 줄이야.
“셰인!”
고함 소리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셰인이 뛰어나왔다.
“네, 네!”
헬레나의 옆으로 다가온 셰인은 갈기갈기 찢긴 사진을 발견했다.
밀회를 나누는 것처럼 찍혀 있는 공작 부부. 열받아 있는 공작가의 실세. 쉽게 사태파악이 되었다.
“어젯밤, 칼이 무슨 연회에 간 거야?”
“몰란트 후작 부부가 주최한 연회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이런 것도 하니?”
“예……?”
“원래 모든 부부가 이런 밀페된 곳에서 대화를 나누냔 말이야!”
앙칼진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한 번 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당장 셰인에게 험한 짓을 벌일 기세였다.
진실을 고백하자니 칼리스가 걱정되었고, 거짓을 고백하자니 눈앞의 헬레나가 공포스러웠다.
‘어, 어쩌지…….’
세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헬레나. 무슨 일이야!”
때마침 칼리스가 방에 도착했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냅다 헬레나부터 품에 안았다. 이후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기도 하고, 머리를 쓰담아주기도 했다.
그녀가 눈이 안 보이는 사이 재빠르게 셰인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시녀가 방을 나선 후에 칼리스가 몸을 뗐다.
“칼.”
헬레나는 더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이슬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고 있었다. 가련한 그녀의 모습이 칼리스의 심금을 울렸다.
“응. 헬레나.”
“너, 날 버릴 거니? 결국, 그 여자랑 붙어먹을 셈인 거야?”
“……무슨 소리야.”
이윽고 헬레나가 바닥을 뒹굴고 있던 신문 조각을 집었다.
사진을 확인한 칼리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해명해. 해명하라고! 대체 어제 뭘 한 거냐고. 둘이!”
“그게…….”
칼리스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두 사람은 어제 너무나도 건전했다. 손도 잡지 않았으며, 춤도 추지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짧은 대화조차 없었다.
연회장에서 외톨이처럼 떠돌던 칼리스가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데리고 간 게 전부였다.
“공주가 아직도 널 사랑한대?”
“그게…….”
“널 못 놓겠대? 내가 옆에 있어도, 여전히 네 생각만 난대? 그래서 요즘 우리한테 그렇게 까칠하게 군 거래?”
하지만 그 사실을 어찌 고백하겠는가!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하늘처럼 우러러보고 있는 사람에게. 백마 탄 왕자님처럼 생각해주는 순진한 연인에게!
“……맞아.”
그래서 칼리스는 거짓을 고했다.
여느 때처럼 클로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