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나를 속여? (15/46)


#15. 나를 속여?
2023.05.15.


저녁이 되어서야 쿤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는 몇 주간 같은 시간에 도착했었는데, 답신이 도통 오질 않았다.

특별히 바쁜 일이라도 있던 걸까.

며칠 씩이나 편지가 없으니 클로에는 시무룩해졌다.

오늘도 오후까지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밤이 되니 ‘그 자리’에 익숙한 봉투가 놓여 있었다.

내내 그녀를 맴돌던 우울함이 가셨다. 클로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색을 띠며 봉투를 뜯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바빴는지, 평소의 다정한 인사말도 과감히 생략한 채였다.

편지 내용도 어찌나 짧던지. 분량이 서신지의 반절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 바쁘신 거라면,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의의를 두어야겠지.’

사실 편지가 짧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은 두 사람에게 쓸 거리가 떨어져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클로에가 정말로 신경이 쓰이는 건 미묘하게 바뀐 그의 말투였다.

묘하게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인 그의 어투를 처음 겪어보는 클로에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추신, 신문은 잘 보았습니다. 클로에. 행복한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 친우는 참으로 기쁩니다.

예, 참으로요.」

게다가 비아냥대는 추신까지.

고작 바쁘다는 이유로 이러진 않을 터. 클로에가 실질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건데…….

‘나, 무언갈 잘못했던가?’

이것저것 생각해 보아도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달리 클로에가 멍청해서, 또는 둔감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성과 깊은 교류를 해본 게 처음이었거니와, 이성적 교제도 해본 적 없어 문외한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겪어본 적이 없는 그녀가 여러 가지 추론을 해봤자 정답에 다다를 순 없는 법.

「어딘가 뾰로통한 내 친우에게.

저기, 화난 거 있어요?」

클로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바로 친우에게 정면 돌파하기.

편지를 빠르게 쓰고 내려온 클로에는 이른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달리 배가 고픈 건 아니나, 뭐라도 섭취해야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둘 것 같았다.

항상 일반적인 식사로 배를 채우던 그녀가 오늘은 특별히 주방장에게 다른 메뉴를 부탁했다.

이윽고 주방장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요리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할 즈음 음식이 나왔다. 수프와 빠네로, 게살 크림 수프를 빠네 안에 넣어 먹는 형식이었다.

수프에 잘게 잘려져 나온 빵 속을 떠먹었다. 크림 소스에 적셔져 부드러워진 빵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나저나 답신을 안 주시면 어떡하지. 너무 예의 없어 보인 건 아니려나?’

한눈을 팔려고 부른 배를 움켜쥐고 식사까지 하러 온 건데, 클로에는 아직도 친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와 보니 답신을 너무 장난스럽게 쓴 것 같기도 하다.

상대방은 나름 화를 표출한 걸 수도 있는데, 진지하게 임해야 했던 게 아닐까.

빵 안으로 넣은 숟가락이 열기에 의해 덥혔다. 잇따라 숟가락을 쥔 손가락에 열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놀란 클로에가 다급히 숟가락을 놓을 때였다.

“헬레나?”

비어 있던 자리가 어느새 채워져 있었다. 앉은 자는 다름 아닌 헬레나였다.

덥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안색을 띤 여자의 모습. 헬레나는 꼭 귀신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헬레나의 눈동자에 검은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눈을 뒤집을 정도로 치켜뜬 그녀가 곧 언성을 높였다.

“맛있게 식사하고 있었나 보네요, 공주님?”

그리 말한 헬레나는 벌떡 일어나 클로에의 옆으로 다가왔다.

“뭘 잘했다고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쨍그랑!

그 뒤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따랐다. 조금 전까지 클로에가 음미하고 있던 접시였다.

바닥 위로 유리 파편이 튀고, 빵에 담긴 수프가 이곳저곳 흩뿌려졌다.

헬레나가 분노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마 클로에가 읽은 신문을 본 것이겠지.

당혹스러운 얼굴로 헬레나를 응시하던 클로에가 이내 한숨쉬었다.

“이번 일은 부디 눈감아주지.”

칼리스와의 일로 싸우고픈 마음은 없었으므로 클로에는 기꺼이 넘어갔다.

그러나 헬레나는 더 길길이 날뛰었다.

“닥쳐. 잘난 체하지 마! 남의 것을 탐내려 드는 주제에 어디서 고상한 척이야!”

“탐내다니. 진실되지 않은 말을 크게 떠벌리고 다니지 말도록.”

“칼은 내 거야. 언젠가 당신의 자리도 내 것이 될 거고!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호의나 받아먹으면서 이곳에서 기생하란 말이야!”

“방해했다고 말한다면 무척이나 섭섭하군.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중인걸.”

“말만 번지르르하기는! 칼리스는 네 손도, 춤도 거부했는데! 감히 네가 그이를 꾀었잖아! 사랑한다고, 아직도 잊지 못한다면서!”

사랑해? 잊지 못해?

막장 소설의 대사도 저렇게 터무니없진 않을 테다.

이윽고 클로에가 보기 좋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말의 출처가 궁금하군.”

“왜. 아닌 척하다가 증거가 나오니까 무서워? 어디서긴, 어디야. 내 남편이 말해준 거지!”

“설마 전하, 아니. 칼리스를 말하는 건가?”

“그래!”

대충 이야기가 그려졌다.

두 사람이 왜 함께 있냐며 따지는 연인에게 변명이랍시고 클로에를 재물로 바친 것이겠지.

구실을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내는 칼리스나, 그 말을 신뢰하는 헬레나나.

바보들의 치정 싸움에 클로에만 억울해진 셈이다.

“하…….”

한숨으로 시작된 클로에의 대답이 곧 웃음으로 변질되었다.

“똑바로 들어. 헬레나.”

생각해 보니 칼리스에게만 자신의 입장을 고했을 뿐, 헬레나에겐 표명한 적 없었다.

클로에는 이참에 제 생각을 또박또박 읊어주기로 했다. 그러면 저 시끄러운 여자도 입을 닫겠거니.

“난 그이를 사랑하지 않아.”

“……뭐?”

“내 존재가 그렇게 거슬린다면 앞으로 그대가 공작과 동행해. 첩 따위에 밀려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 따위, 두렵지 않으니까.”

***

외출에서 돌아온 칼리스는 피곤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곤욕을 당했다.

헬레나의 일방적 통보 때문이었다.

앞으로 모든 연회에 클로에 대신 본인이 참여하겠다니.

헬레나의 태생과 질 낮은 품격을 남몰래 무시하고 있던 칼리스로선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는 발 빠른 대처로 클로에를 방패 삼았으나, 이미 두 사람은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거짓말이 샅샅이 들켜버렸다.

덕분에 사랑하는 제 정인에게 된통 혼났더라지.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냐며 엉엉 울던 헬레나가 눈에 선했다.

헬레나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지만, 그의 성공을 도울 발판이 되지 못했다.

‘그 망할 여자가 일부러 내게 엿 먹인 게 틀림없어.’

왕실을 다녀온 이후부터 뻔뻔하게 나오는 클로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그녀가 이제 와 하늘 같은 남편에게 대든다니.

‘정말 국왕 폐하께서 뭔가를 약속한 건가?’

클로에가 믿을 뒷배라곤 제 부모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딸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인 것인가?

금지옥엽 키운 딸이 공작가에서 끔찍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분개한 것일지도 몰랐다.

‘역시 헬레나를 조심시켰어야 했는데!’

칼리스는 저가 저지른 만행은 모조리 잊어버렸는지, 애꿎은 헬레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로 이혼당할지도 몰라.’

고뇌에 빠져 있던 칼리스가 이내 하인 하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하인에게로 주머니를 던졌다. 조심스레 주머니를 확인한 하인은 눈이 동그래져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돈을 들고 왕실에 몰래 침입하거라.”

“예. 예…….”

“공작부인이 왕궁으로 떠났던 날. 가족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내. 알아내서 내게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전부 보고하거라.”

이어 칼리스는 최대한 빠르게 일을 해결하라 명령했다.

곧바로 물러난 하인은 며칠 뒤, 익명의 이름으로 공작에게 편지를 부쳤다.

“하하, 클로에 이 망할 여자!”

‘왕과 왕비가 부인의 이혼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라는 희소식을 가진 채로.

하인은 편지가 도착한 지 사흘 뒤에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곳저곳 뛰어다니느라 고생했는지 핼쑥해진 채였다.

칼리스는 조용히 주머니를 건넸다. 그 안엔 금화 열 닢이 들어 있었다.

삯을 확인한 하인은 수분이 없어 텁텁해진 목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설명했다.

“공작부인께서 가족에게 현 상황을 고백하며, 공작님과의 이혼을 요구했답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와 왕비님 모두 부인의 촉구를 거절했다고…….”

“그러니까, 왕과 왕비 모두 공작가의 일을 알고 있다?”

“예.”

“하지만 이혼은 용납하지 않는다?”

“예. 맞습니다.”

확고한 답을 받은 칼리스가 폭소했다.

고상한 척하던 여자의 기만이 사실 백조의 발버둥일 줄이야. 거슬리던 여자가 불쌍해 보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래. 그 여자는 하나밖에 안 남아 있던 뒷배마저 잃었다고.”

칼리스는 야유가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 남은 그는 말없이 의자를 젖혔다. 벽에 의자가 닿을 즈음이면 도로 앞으로 당겼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소음 삼아 시작된 숙고는 머지않아 끝이 났다.

‘그럼 이제 파렴치한 낯짝이나 구경하러 가 볼까.’

진실을 알아버린 남자가 할 일은 하나였다.

주제도 모르고 발톱을 내보인 여자에게 엄벌을 내리는 것. 앞으로 제게 대들지 않도록 주제 파악을 시켜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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