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되갚은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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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되갚은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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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되갚은 기만
2023.05.16.
그는 지나가는 시종마다 붙잡아 클로에의 위치를 물었다. 원체 시종도 없이 혼자 다녀서인지, 여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허투루 돌아간 포부는 푸르른 하늘이 감은빛으로 물든 즈음에 되찾을 수 있었다.
클로에가 외출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칼리스는 곧장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칼리스의 등장에 그녀가 사색이 되었다. 그런 표정마저도 지금은 흥미로웠다.
고결에 파묻힌 얼굴이 절망으로 뒤덮일 순간이 기다려졌다.
“당신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칼리스가 짐짓 진지한 척 말을 이었다.
“우리, 이만 그만하자.”
“그만하다니요?”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자는 거야.”
이윽고 클로에의 얼굴에 희미한 화색이 돋았다.
“그 말인즉슨……. 전하께서 이혼을 원하신다는 건가요?”
“그래.”
칼리스가 확답하자 클로에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는 입매가 히죽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좋아요. 그럼 어서 절차를…….”
“그 전에 당신이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세요.”
그는 부러 시간을 끌며 여자의 반응을 확인했다.
수많은 감정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쁨과 기대였다. 잠시 후 이어질 말에 의해 감정들이 즉금 잠적 될 것이었다.
“국왕 폐하의 동의를 가져와 주었으면 해.”
칼리스의 예상대로 클로에의 얼굴이 뭉개졌다.
그러나 비상한 머리를 굴려 빠져나갈 틈을 찾아냈다.
“부부의 뜻이 같다면, 관할자의 동의는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야.”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 내 말은…….”
그래도 칼리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지만 말이다.
그는 클로에가 감히 손쓸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을 내밀기로 했다. 바로 그와 발론트 국왕 간의 계약이었다.
칼리스가 오래전부터 설계했던 것이 폭로전에 이어 지금처럼 중요한 때에 빛을 발휘했다.
“국왕 폐하와 내가 한 계약이 있거든. 그대와 이혼한다는 건 엄밀히 말해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것과 같은데, 폐하께서 노하시기라도 한다면 어찌하나.”
“그건 제가 나중에 잘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되지. 안 돼. 그러다가 당신이 날 배신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곳을 나간 제가 전하와 엮일 일은 없을 겁니다. 감히 단언해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 다른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보란 듯 이어지는 변명이 칼리스의 눈에는 고깝기만 했다. 가볍게 코웃음 친 그가 상대의 말을 대번에 끊어냈다.
“왜 그래. 클로에. 그냥 내 조건을 받아들이면 되는 일인데, 그대답지 않게 질질 끄는군. 가장 쉬운 일을 두고 왜 이리 돌아가려 하는 거지?”
“…….”
“아, 혹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나?”
바다를 담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다. 거슬릴 만큼 올곧던 눈동자가 요동치자, 칼리스는 내심 뿌듯했다.
그는 으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슴없이 떼어지는 다리가 금세 두 사람의 폭을 좁혔다.
“예컨대, 국왕 폐하께서 우리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거나.”
그는 부러 상대와 키 높이를 맞추었다. 클로에의 귀에 속삭이기 위함이었다.
서늘한 목소리에 클로에가 잘게 떨었다.
“당신…….”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했다.
칼리스가 실소하며 얼굴을 떼어냈다. 날 것과 같은 그녀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잇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말끝을 흐리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당당하던 목소리마저도 작아져 알아듣기가 어려워졌다.
이 기세를 몰아 칼리스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가까워진 거리에 클로에가 뒤로 물러서면, 그는 가소롭다는 양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끝내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벽에 닿고 말았다.
“클로에!”
거센 힘이 벽을 내리쳤다. 벽은 찬찬히 파동을 일으키며 클로에를 밀어냈다.
“나를 가지고 노니 우스웠나?”
“…….”
“정녕 왕실이 이혼을 허락할 것 같았나 보지? 왕국에서 이혼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주제에. 왕실의 공주가 당당하게 그를 부탁하다니……. 정말 어디 미쳐버린 거 아냐?”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왕실의 마차를 타고 갔던 그녀가 돌아올 땐 다른 마차를 타고 왔다. 허름한 건 아니지만, 왕실의 것이라고 보기엔 볼품없는 마차를.
게다가 국왕이 이혼에 찬성했다면 그녀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테다. 호화롭게 왕실 생활을 즐기다가 공작저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전했겠지.
“알아보니 신전도 들렀다지? 왜, 국왕이 거절하니 대신관에게 구걸이라도 하려고 했나 보지!”
때마침 대신관 또한 방명록에 클로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며 칼리스에게 연락했다. 모든 전말이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온갖 방법이란 방법은 다 찾고 다녔지만 패배하게 되는 것이 저 멍청한 여자의 숙명이리라.
“재잘거려야지. 클로에. 왜 말이 없어. 고작 비밀 하나 들켰다고 이렇게 풀이 죽어버리면, 내가 너무 기뻐지잖아.”
칼리스는 손등으로 클로에의 뺨을 비비적댔다. 불필요한 접촉은 뺨부터 시작해 어깨까지 타고 내려왔다.
“그래. 어찌어찌 이혼했다고 가정해. 수치스러운 당신을 왕궁에 남기긴 싫을 텐데. 그 누가 당신을 데려가? 초야까지 치러 상품성도 없는 당신을.”
혀를 찬 칼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초야.
단어 하나에 클로에가 외면하며 살아온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 공주. 사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초야도 거르고 출정을 떠났던 칼리스. 그가 돌아온 뒤엔 때늦은 초야를 치르기 위해 클로에와 합방했다.
하지만 그날 밤, 칼리스는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단호한 거절을 건넸다.
게다가 그는 창피를 치러 얼굴이 달아오른 그녀를 두고 침대에 맹수의 피를 묻히기 바빴다.
많이 창피했지만, 그가 그렇다니까 클로에는 강요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일을 주도한 당사자가 어찌 그녀에게 초야를 치렀다 논할 수 있던가.
“있잖아, 클로에. 너같이 멍청한 여자는 내 손아귀 안에 있어. 돌아갈 곳 없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여기서 조용히 썩어 있는 거라고! 방랑자보다야, 껍데기뿐인 공작부인이 낫지 않겠어?”
그의 입꼬리도 서서히 올라간다. 절망에 빠진 클로에의 모습을 확인한 후엔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제야 클로에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눈속임하는 수고까지 들여가면서 초야를 성사시켰던 것.
그건 클로에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도, 자신이 나쁜 놈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저 희열감에 빠진 악마는 한참 전부터 이런 날을 염려하며 덫을 설치해 왔던 거다.
***
침상에 누운 그에게로 딜런이 다가왔다.
“폐하, 서신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도착할 편지라면, 필시 그 여자의 것이었다.
쿤은 냉큼 편지를 빼앗았다. 딜런이 나갈 짧은 새도 참지 못하고 곧장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신지의 가장 밑을 향해 있던 시선은 다시금 위로 향했다.
「저기, 화난 거 있어요?」
미묘하게 둥근 필체가 귀여웠다. 몇 번 듣지도 못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쓸데없이 걱정하기는.’
그래도 제게 동요된 것 같아 내심 기뻤다. 결국 미소를 참지 못한 쿤이 진심을 내비쳤다.
“……대체 누구랑 편지를 주고받고 계신 겁니까?”
딜런은 옆에 있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눈치였다. 주군의 해괴한 반응이 가히 놀라웠다.
미소라니, 그 폐하가 미소라니!
적군 수장의 목을 베었다고 전했을 때도 저렇게 아리땁게 웃진 않았는데.
“있어. 망할 쥐새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사람.”
“……무슨 새끼요?”
“친히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기분이 좋긴 좋은 건지 두 번 대답해 주는 성의도 친히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날 도와주어야 할 사람.”
“폐하를 돕는다고요?”
잇따른 대답에 딜런이 반문했다.
세상에, 저 사람이 이 하늘 아래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자신이 환청을 들었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따라오는 주군의 고갯짓에 재차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 왜 편지만 주고받으십니까? 글로 해결될 도움입니까?”
“우선은 친분을 쌓는 중이지.”
“그다음은요?”
“나의 구원자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뻗기만을 기다리는 중.”
쿤이 심드렁하게 답변했다. 딜런의 질문 세례가 차츰 지겨워진다는 듯.
“……왜 폐하께서 먼저 도우러 가지 않으시고요?”
반면 딜런의 호기심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군이 다른 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호기심이 넘쳐 나, 본의 아니게 물음표 살인마를 자처했다.
“내가 먼저 손을 뻗게 된다면 난 그자에게 은혜로운 사람밖에 되지 않겠지.”
쿤이 손에 들린 편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자처해 클로에를 도와보았자 큰 보상을 얻지 못한다. 기껏해야 고마운 사람 칭호, 더 쳐줘 봐야 생명의 은인 정도.
현재에 만족한 공주는 쿤이 추후에 제안할 것에 대해서도 고심하지 않을 테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더 긴밀한 사이가 되고 싶거든.”
하지만 반대는 달라진다.
스스로 해답을 찾은 그녀가 먼저 그를 필요로 한다면, 쿤 프리히드가 클로에의 자유를 찾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면.
그녀는 그를 갖고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겠지.
“그래서 기다리고 있어.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까지.”
쿤은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두려워하고 있다.
클로에가 저를 찾아오는 순간, 제게 손을 뻗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망각할 테다.
그가 지켜왔던 권력, 명예, 힘. 모든 것을 잊은 채로 본능과 껍데기만 남게 될 테다.
그리고 남은 그것들마저도 버리고, 내어주면서까지 그 여자를 돕겠지.
그래. 옛날의 클로에처럼.
오만하디오만한 이 남자도 한없이 미련해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