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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행의 시작 (17/46)


#17. 불행의 시작
2023.05.17.


‘괜찮아. 클로에.’

지난 반년, 칼리스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클로에는 꿋꿋했다.

지금도 다를 것 없다. 과거에 그러했듯 잘 버티면 되는 일이다.

떠난 상대가 남기고 간 발자취가 지저분했다. 미처 치울 여유는 없던 클로에는 조용히 침대로 몸을 옮겼다.

더딘 몸을 눕힌 후엔 텅 빈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잘됐을지도 몰라.’

어차피 원점으로 돌아온 게 전부다. 그들이 제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질 낮은 괴롭힘이 끝이니까.

아쉬운 게 있다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들켰다는 점.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그들에게 타격을 가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마냥 슬퍼할 건 아니다.

‘이혼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왕국 내에서 이혼이 성립되는 방법은 총 두 가지다.

왕국의 관할자인 발론트 국왕이나, 종교의 관할자인 대신관이 이혼을 허락하는 것.

전자도 실패. 후자 또한 승산이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장대했던 계획 전부 수포가 된 것이다.

‘정말 이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클로에에게 탈출구가 없다는 걸 안 칼리스는 더욱 대담해질 테다.

같잖은 괴롭힘에서 그치지 않으며, 머지않아 헬레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도 하겠지.

‘어떻게든 찾아야 해.’

그러니 클로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혼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관할자, 관할자…….’

국왕과 대신관을 제외하고서도 이혼을 가능케 할 관할자가 더 없을까?

‘황제?’

순간 기발한 생각이 클로에의 뇌리를 스쳤다.

모든 것을 제친, 세상의 관할자가 있질 않던가.

제국의 황제는 세상의 군림자다. 게다가 제국은 발론트 왕국과 연합을 맺었으니 왕국의 일에 마음껏 관여할 수 있다.

‘일단 마지막 길 자체는 남은 거야.’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황제뿐인데.

‘……그를 설득한 자와, 일면식도 없다시피 한 아내 중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는 뻔하지만.’

황제도 대신관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애초에 칼리스는 그를 설득해 종전까지 이뤄낸 바 있었으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칼리스를 등지면서까지 클로에를 도와줄 리가 없다.

하지만 도전해야만 했다. 뭐가 되었든 지금보다도, 그리고 최후의 보루로 남긴 망명보다는 나았으니까.

클로에가 생각한 최후의 보루. 이대로 잠적해 사라져버리는 것.

왕국에서는 실종자가 이 년간 보이지 않으면 알아서 사망 신고를 해준다. 아내와 사별하게 된 남편은 자연스레 이혼 신고를 하게 되는 셈이다.

번거롭지 않은 대신 신분이 아예 사라지는 위험한 방법이다.

신분이 없어지면 일을 구하지도, 다른 영지의 주민이 될 수도 없으므로, 왕국 내에서 의식주를 위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인 거다.

***

다음 날, 클로에의 예상대로 그녀의 채비를 도우러 오는 시녀는 없었다.

그들의 거짓 호의를 일일이 거절해야 하는 수고를 던 것은 좋았다. 어느덧 혼자 치장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클로에는 능숙하게 옷을 갈아입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클로에는 멸시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소문이 빠른 이곳에서 금세 주방장에까지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녀봤자 좋을 게 없었다. 클로에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가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가 쉬고 있자, 늦은 하녀들의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보안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제인이 클로에의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여기서 쉬고 계셨군요.”

제인은 클로에를 도왔던 첫날처럼 긴장한 채였다. 공허한 주변을 잔뜩 두리번대던 그녀가 농도 짙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요 며칠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았는데, 갑자기 뒤바뀌어서는! 아니죠. 오히려 더 나빠진 셈이 됐어요. 이제 어쩌면 좋아.”

그러고는 속사포로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제인은 장황하게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축약하자면, 칼리스와 헬레나가 저택의 모든 고용인을 불러 클로에를 돕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제인은 이러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니냐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게. 하루아침에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왔구나.”

“……마님, 마님은 괜찮으세요?”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자칫하면 너마저도 다칠 수 있으니 당분간은 내 방에 들르지 말렴.”

클로에는 제인에게 잠시 물러서 있을 것을 권했다. 혹시라도 제인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싫어요.”

“제인?”

방금까지 초조함을 못 이기던 제인이 맞나?

그녀는 금세 단호해져 클로에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가 어떻게 마님을 두고 가요? 잠깐뿐일지라도 정말 싫어요.”

짧은 시간일지라도 제인은 이미 클로에와 정이 든 뒤였다.

그녀에게 클로에 아르헨은 낯설고 먼 존재였다. 같은 하늘, 같은 곳에서 머물더라도 존재 자체가 달랐으니 말이다.

비록 그녀가 공작가의 낙동강 오리알로 남을지언정 두 사람은 명백한 주종 관계다. 하지만 그녀는 제인에게 비밀 친구 같았다.

두 사람은 몇 날 며칠 함께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밀 친구라는 말이 어울리게끔 특정한 시간에만 함께했으며, 저택에 둘만 남은 것처럼 서로만을 의지했다.

“전 계속 마님의 편 할래요. 그러니까 서운한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은 제 걱정보다도 마님 스스로를 걱정하시고요!”

허드렛일을 자처하며 주급을 받는 제인에게 오늘의 소식은 두려움을 안겼다. 잘못 걸렸다가는 쫓겨나는 것으로 그치긴커녕 매질까지 맞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클로에를 혼자 둘 순 없었다.

누군가는 알량한 호의라며 호통칠지라도, 수준에 맞는 동정을 하라며 비웃을지라도, 제인의 마음은 변치 않는다.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제인.”

제인의 우렁찬 포부에 클로에가 넌지시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에 홀린 듯 다가가던 제인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내 그녀의 앞에 보이는 것은 앙상한 어깨와 초췌한 얼굴을 지닌 클로에였다.

제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안았다. 이불 빨래를 하느라 덕지덕지 묻은 먼지를 걱정하는 건 다음이 되었다.

“힘내셔야 해요. 제가 필요할 땐 언제든 불러주셔야 하고요. 저, 마님을 돕는 낙으로 살고 있어요.”

놀란 듯 경직했던 몸이 차츰 제인을 감싼다. 살가죽만 간신히 두른 뼈가 등에 닿노라면, 제인은 작게 속삭였다.

“나도 요즘 널 보는 낙으로 살고 있단다. 덕분에 힘이 나.”

“헤헤. 뿌듯하네요.”

낯간지러운 인사. 제인은 이 감정이 하염없이 낯설었다. 그간 그녀가 느꼈던 감정 중 가장 신비롭고 매혹적이었기에.

“이런, 곧 소집 시간이 다가오겠네요. 가봐야겠어요.”

눈치 없이 시간은 째깍째깍 빠르게 지나간다. 문득 확인한 시계의 분침이 어느새 약속 시각까지 다다라 있었다.

“나 때문에 소중한 휴식 시간을 다 써서 어째. 얼른 조심히 들어가렴.”

아쉬운 소리를 남기고 제인이 방을 나섰다.

‘빨리 저녁이 왔으면 좋겠다. 식사를 소홀히 하실 텐데, 빵을 준비해서 가져가야겠다.’

제인은 클로에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울 겸 저녁 시간에도 방문하기로 했다.

역시 쉬는 시간이라 그런지 사용인 대부분은 아래층에 머물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제인이 잽싸게 달릴 때였다.

“제인?”

계단을 내려갈 즈음 제인의 어깨가 단단히 붙잡혔다.

“네가 왜 공주의 방에서 나오는 거지?”

***

“그래. 이 건방진 하녀가 기어코 공주의 방에 들어갔다고.”

헬레나가 기가 막힌다는 양 부르댔다. 이어 차가운 눈빛이 허공을 쓸었다.

셰인이 데려온 하녀는 그녀의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얘.”

“네, 네……!”

“왜 내 명령을 거스른 거니? 오늘 아침에 분명하게 말했을 텐데.”

그녀를 고립시키려고 아침부터 사용인들을 모아 기강을 잡아놓았더니, 웬 미꾸라지 한 마리가 계획을 망쳤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찬양하던 헬레나의 분홍색 홍채에 분노가 서렸다.

“혹시 내가 우습니?”

헬레나가 고개를 비뚜름히 젖힌 상태로 질문했다.

“그, 그럴 리가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인은 열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수치심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불현듯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던 클로에의 충고가 뇌리를 스쳤다.

괜찮다고 뇌까릴 땐 언제고, 지금 제인은 모든 게 무서웠다. 막대한 겁에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제, 제가 머리가 나빠 깜빡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허, 감히 나와 공작의 명을 잊었다고?”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변명도 그럴싸하게 둘러대야 내가 넘어가 주지. 날 얼마나 멍청이로 보는 거니? 그 자리에 너 말고 아무도 없었을 텐데, 아무 의심도 없이 공주를 도왔다고?”

헬레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런데 잘못을 저지른 주제에 거짓말까지 떠벌리다니. 저를 무시하는 것을 넘어 기만하는 행위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잘못한 것은 아는지 손이 닳도록 비는 상대를 보니 분노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명령을 어기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로 삼았으니 이쯤 해도 충분했다.

“저 하녀와 친분이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때 헬레나의 옆으로 셰인이 다가와 귀엣말했다.

듣자 하니 예전부터 클로에의 방을 들락날락했단다. 명을 어긴 게 이번만이 아니란 소리였다.

겨우 진정했던 열이 다시 들끓는다.

“예전부터 공주와 붙어먹었구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쟤네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구나? 내가 저들의 목을 전부 치면 될까?”

헬레나가 허튼 변명은 하지 말라는 양 정보의 제보자를 콕 집어 가리켰다. 손끝에 놓인 자들은 제인과 늘 함께하던 동료들이었다.

“그건…….”

배신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생존 여부가 더 급급했다. 이상 변명을 했다가는 죄가 가중될 것이었으므로 제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벌로는 충분하지 않겠어. 셰인! 저 아이를 끌고 지하에 가둬.”

뒤따른 명령에 셰인이 놀란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헬레나는 말을 정정하기는커녕 태연스레 제인을 턱짓했다.

머뭇거리던 셰인이 제인의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주변 하녀 한 명을 불러 반대쪽 팔을 잡게 명령하고는 걸어 나갔다.

제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헬레나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저걸 건방진 공주에게 들려주었더라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텐데.

‘그새 또 제 편을 만들다니. 여러모로 짜증 나게 해.’

헬레나는 무너져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는 클로에를 떠올렸다. 흠집 없이 사기를 되찾는 그녀가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본인에게 해를 가해봤자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갚아줄 방법을 수색하던 헬레나의 앞으로 불현듯 비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셰인, 잠시만. 생각해 보니 추방은 너무 얕은 죄 같아서.”

헬레나는 문을 당기려는 셰인을 불러세웠다.

“얘. 양동이에 물을 퍼 오렴. 최대한 많이. 거기에 소금도 잔뜩 뿌려오고.”

아직도 자신이 우아한 백조인 줄 아는 기분 나쁜 여자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무너뜨리기로 했다.

자신을 건드리는 것으로 아무렇지 않다면, 제 주변 사람을 망가트리며 주제를 파악하게 만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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