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제인과의 말로 (18/46)


#18. 제인과의 말로
2023.05.18.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시녀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 클로에가 소리질렀다. 눈앞의 광경을 담은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점심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웃고 떠들던 제인이 지금은 의자에서 기절한 채였다.

의자에 묶여 있는 몸뚱어리와 흥건히 남은 주변의 물을 보아하니 물고문을 당한 모양새였다.

클로에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재빠르게 제인의 곁에 다가갔다. 몸에 둘둘 둘린 밧줄을 푸니, 유약한 살에 벌겋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클로에가 제인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에도 상대는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짓이라뇨. 주인으로서 할 도리를 했을 뿐이죠.”

상대의 처연함이 헬레나에겐 꼴값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죽거리며 목청을 높였다.

“도리?”

“주인의 명을 어겼으니, 혼나야 마땅한 게 아니겠어요?”

클로에가 우려했던 상황이 기어코 일어난 것이다.

제인에게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라곤 예상했으나, 너무 심한 처사였다. 죄라고 하더라도, 고작 다른 이의 시중을 든 게 다가 아닌가.

노여움을 견디지 못한 클로에의 몸이 휘청였다. 쇠약한 몸이 마구 요동치자, 꼭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 바스라기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의 부모까지 벌하고 싶기도 하고.”

헬레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대를 꾸준히 약 올렸다.

“죄 없는 아이까지 모자라, 아이의 부모까지 건드리는 건 지나치지 않나?”

“죗값을 무는 건 나의 선택이죠.”

곧이어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뭐, 처음 한 실수 가지고 너무 모질게 군 것 같기도 하고.”

“…….”

“공주께서 어떻게 하냐에 따라 노여움이 좀 풀어질 것 같기도 하네요.”

넌지시 흘리는 말과 달리 의도는 명백했다.

상대를 힐끔 바라보는 시선과 숨소리에 맞추어 까딱거리는 다리. 건방진 태도들은 헬레나가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역시 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민 거로구나.’

클로에는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조금 전, 자신의 방에 방문했던 제인이 갈아입으라며 손수 골라주었던 검은색 드레스였다.

그녀는 제 품에 안겨 누워 있는 제인과 헬레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종내에 시선이 머문 곳은 제인의 얼굴 위였다. 추워 입술이 파래진 아이는 정신을 까무룩 잃은 와중에도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무서웠겠지.’

저를 반드시 지켜 주겠다던 아이는 정작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나 때문이야.’

안 된다고 말했어야만 했다. 제인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그녀를 매몰차게 몰아붙였어야 했다.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제인을 받아들인 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저가 살고자 죄 없는 이를 다치게 했다.

“내 잘못입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비굴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미미했다. 문득 바라본 헬레나의 눈썹이 위아래로 물결치고 있었다.

이 정도 사과로는 택도 없다는 뜻이었다.

치아에 힘을 주다 보니 입술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턱 밑으로 흐르던 핏방울이 제인의 뺨 위로 떨어졌다.

“……내 죄를 부디 용서해줘요. 헬레나 양.”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 두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인을 감싸느라 꿇고 있던 무릎은 어느새 헬레나의 앞을 향했다.

고결해야만 했던,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그녀의 긍지는 값싼 폐품 따위가 되어있었다.

***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굴복하고 싶지 않던 이에게 끝내 패배했기 때문일까.

클로에는 그날 이후 크게 열병을 앓았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몇 날 밤을 보내다,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었을 즈음 눈을 떴다.

“……마님.”

깨어난 그녀의 옆을 제인이 지키고 있었다.

“제인!”

클로에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도 깜빡 잊은 채로 일어났다.

올바른 절차대로라면 상대의 상태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이례적으로 본능을 따른 클로에는 무작정 상대부터 안아버렸다.

강제로 안기게 된 제인은 클로에의 작아진 품을 느꼈다. 그러잖아도 작고 왜소했던 몸이 더욱 작아져 있었다.

“나, 나는……. 네가 어찌 되는 줄만 알고…….”

늘 수려하게 말하던 그녀가 지금은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한참이나 말을 더듬거리던 클로에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로 제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윽고 품 안에 가둬진 얼굴이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무서웠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의 목숨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이. 또, 제 선택이 다른 이의 목숨을 가르는 갈림길이 된다는 것이.

차라리 위협을 받는 게 그녀 자신이었더라면 이렇게 두렵진 않았을 테다.

“내가 미안해…….”

처음으로 클로에가 말을 완성시켰다. 다름 아닌 사과였다.

잇따라 제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참기 위해 꼬집었던 허벅지가 퉁퉁 불어 있었다.

“마님이…….”

제인이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잠시 후, 푸른 눈에 서린 푸른 눈을 발견하고는 도로 입을 닫았다.

벌어진 제인의 입술 사이로 정체 모를 액체가 마구 들어왔다. 짠맛이 계속 돌았다.

제인 또한 클로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죽을 만큼 두려웠으며, 죽을 만큼 후회했다. 소금이 섞인 물에 연거푸 얼굴이 담길 때는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를 곁에 두지 말 것을. 불쌍하다는 이유로 위험한 것을 껴안고 살지 말 것을…….

몽롱함에 두 눈이 감기던 무렵에 클로에가 도착했다. 그녀는 제인을 등진 채로 무릎을 꿇었다.

그간 쌓아왔던 클로에의 공든 탑이 고작 제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너졌다.

“울긴 왜 울어. 그나저나 몸은 괜찮고?”

“네.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님.”

“어떻게 그래. 필, 필요한 건 없고? 전부 준비해 줄 테니…….”

빡빡하리만큼 올곧던 목소리가 저토록 망가진 것도 자신 때문이겠지. 어여뻤던 얼굴이 한순간에 반쪽이 된 것도 자신 때문이겠지.

제인은 기뻤다. 아주 잠시.

자신이 아주 올곧은 사람을 섬겼구나 싶어서. 보답받을 수 있는 사랑을 했구나 싶어서.

“정말 괜찮아요.”

그녀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클로에를 잠시 떼어냈다.

“널 신경 쓰지 말라니…….”

“전 이제 마님의 사람이 아니에요.”

무심코 내뱉은 작별 인사.

쌀쌀한 제인의 대답에 무어라 말하려던 상대의 입이 즉금 닫혔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닿지 못한 작은 틈새로 그녀의 가냘픈 숨결이 흘러나왔다.

제인이 불상사를 당한 이상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다.

이번 일 이후로 두 사람을 단속할 감시자가 생길 것이다.

설령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서로가 약점인 만큼 언젠간 오늘 같은 일을 되풀이할 것이다. 다시금 인질로 붙잡혀 불상사를 야기하겠지.

이번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떨어져야만 했다.

“제가 마님을 찾아왔던 건…… 마님이 불쌍해서였어요. 정말 그게 다예요.”

제인은 부러 마음에 없는 말을 마구 지껄여 댔다. 더, 더 모질게 굴어야 했다. 클로에가 자신에게 실망할 만큼.

“공주님일 때부터 쭉 선망받던, 반짝반짝 빛나던 마님이 한순간에 사라져서. 그게 안타까워서 도운 것뿐이에요. 마님과 엮였다는 이유로 이렇게 다칠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관뒀을 거예요.”

제인은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며칠간 외운 말을 하나둘씩 쏟아붓는 사이 스스로가 죽어가고 있었다.

“……제가 이제 마님을…….”

어느덧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다. 가장 쉽고 강한 문장. 이것만 되뇌면 비로소 대화에 종지부가 찍힌다.

그러나 지금껏 걸어온 길을 무시하듯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입안이 너무 헐었기 때문일까. 그럼 침을 삼키면 조금 나아질 테다.

그러나 제인의 목에선 비릿한 피 맛이 아닌, 짭조름한 콧물 맛이 났다.

이상하다. 분명 그만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연기를 위해 감정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제 마님을 찾아올 일은 없을 거예요…….”

당황한 제인이 마침내 앞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직면한 것은 빛바랜 푸른 눈이었다.

희미한 초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 제인의 거짓을 샅샅이 꿰뚫고 있는 듯한 눈.

저 아름다운 눈은 이미 알고 있다.

제인이 거짓말을 하느라 상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선에서 바닥을 툭툭 치고 있다는 걸.

문장이 끝날 때마다 괴롭다는 양 입술을 넌지시 깨물고 있다는 걸.

클로에는 모른 체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

“수고 많았단다. 제인.”

“…….”

“즐거운 여행을 하고 오렴. 난 언제든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고요.

끝없이 이어져야 했을 고요는 여자의 쉰 목소리 하나에 끝이 났다. 쇳소리나 비음이 이따금 섞여 어색했지만, 누군가의 귀에는 천사의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클로에는 제인의 거짓말을 눈치챘음에도 아는 척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인사했다.

그마저도 꼬박 미소는 잊지 않은 채로.

“보, 보고 싶을 거예요. 마님! 진, 흐윽, 짜로, 흐윽. 엄청요…….”

추잡하게 우는 소리보다도 제인의 다짐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어언간 제인은 클로에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었다. 홀로 간직하고 있던 눈물이 폭발해 멈추질 않았다.

“그래.”

“제가, 흐윽, 꼭, 흐윽, 다시 찾아올 테니까아……. 꼭 반겨,어, 주셔야 해요오…….”

제인은 사실 저를 붙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자기는 협박을 당해도, 상해를 입어도 괜찮으니까 부디 클로에의 옆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언젠가는……. 저희가 다시, 흡, 만날, 수, 흐윽, 있겠죠?”

그렇지만 그 순간이 지금이 될 필요는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괜찮았기에, 제인은 꾹 참았다.

훗날 클로에가 행복해졌을 때, 칼리스가 그러했듯 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때, 제인을 찾아주길 바랐다.

“그럼.”

“…….”

“노력할게. 네게 다시 닿을 수 있도록, 이것보다 훨씬 노력하마.”

그럭저럭 아름다운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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