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제인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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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인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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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인의 말로
2023.05.19.
“괜찮아요. 진짜로.”
“이것도…….”
“저 그러다가 가방 터져요. 마님!”
제인의 가방은 입이 벌려져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에서 돈이 되는 물건들을 찾아와 무작정 짐가방에 넣은 클로에 때문이었다. 짐이 없어 홀쭉했던 가방이 이젠 지퍼가 잠기지 않을 정도로 빵빵해졌다.
“저 이러다가 심문소 가요. 이거 누구한테 받았냐고 하면, 뭐라고 해요!”
“내가 주었다고 해. 믿지 않으면 날 부르고. 언제든지 달려갈 테니까.”
“마님도 참!”
농담에도 단호하게 받아치는 클로에가 귀여웠다. 제인은 폭소하며 마구 손사래를 쳤다.
제인은 짐을 최대한 늦게 싸기 위해 갖가지 핑계를 대며 가방 속의 귀중품을 뺐다. 처음엔 입을 삐쭉대던 클로에도 나중엔 그 놀이에 동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배정된 마차 시간까지 뒤로 미룰 순 없는 법. 결국엔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클로에는 제인의 손에 팔찌를 끼워주었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성인이 된 생일날 맞추었던 값비싼 팔찌였다.
“……가고 나서 꼭 내게 서신을 부쳐줘. 읽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나중이 되어서라도 꼭 읽을게.”
두 사람은 방문 앞에서 진한 포옹을 했다. 언젠가 이 온기를 다시금 느낄 수 있길 바라면서.
제인의 집은 영지에서 조금 더 떨어진 외곽 마을에 있었다. 마차론 적어도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마차에서 제인은 많은 것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녀가 아르헨 공작가에 온 계기는 간단했다.
높은 봉급, 하녀들에게 제공되는 숙식. 홀로서기에 도전해야 하는 제인에게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간단한 마음가짐을 비웃듯 고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장은 늘 그녀를 나무랐고, 동료들도 처음엔 일이 서툰 그녀를 싫어했다.
돈을 벌기 위해 먼 곳을 여행해 여기까지 도착했건만 자꾸만 포기하고 싶어졌다. 가족은 또 어찌나 그립던지, 매일이 서러워 눈을 뜨기가 싫어졌다.
‘많이 힘들면 쉬어도 된단다.’
‘……네?’
‘간식이라도 같이 먹을까?’
그날도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하녀장에게 어김없이 혼나고 온 제인은 풀이 죽은 채로 이불 빨래를 했다.
앳된 소녀가 울먹이며 일을 하는 게 걱정이 되었는지, 저택의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간식거리가 담긴 바스켓을 들이미는 클로에를 처음엔 사양했다. 하지만 어느새 제인은 나무 그늘 밑에서 그녀와 함께 휴식을 청하고 있었다.
하녀장이 화난 얼굴로 제인을 찾아왔을 땐 무서웠다.
당장은 클로에 덕분에 넘어가겠지만, 그녀가 없는 저녁 식사 때는 창피를 당할 게 뻔했다.
‘베니아츠. 이 아이의 이름이 뭐지?’
‘제인입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이야기하는 것이 재밌어 마음에 들어. 될 수만 있다면 계속 말동무로 쓰고 싶구나. 혹 내 쪽으로 옮겨줄 수 있겠니?’
그러나 제인이 하녀장에게 혼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 클로에의 부탁에 따라 제인의 근무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클로에의 마음을 샀다고 하니, 하녀장이 제인을 마구 꾸짖는 일도 드물어졌다.
클로에는 혼자 있는 제인을 몇 번 지켜보았다고 한다. 뒤처지는 조그만 아이가 퍽 마음에 걸렸다고.
원래 저렇게 작은 아이에겐 비교적 쉬운 허드렛일을 맡기는데, 급하게 사용인들을 모집해서인지 힘든 일을 도맡게 되었다고.
그를 안쓰럽게 여긴 클로에가 나서 제인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동료들을 만난 제인은 얕은 사명감과 함께 클로에를 돌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여기서 일하지 않아도 되니 가봐.’
제인이 원래의 근무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력을 줄이겠다는 공작의 말에 공작부인을 따르던 하녀는 물론 시녀들까지 전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그렇게 며칠 뒤 공작가에 ‘그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때는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말걸. 그때부터 마님을 지켜드릴걸.’
제인은 아쉬움에 손톱을 튕겨댔다. 괜히 목이 말라, 마차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물을 마셨다.
‘갑자기…….’
머지 않아 피로가 몰려왔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잠이 들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눈이 자꾸만 감겼다.
‘잠이 너무 온다…….’
졸음과 사투하던 그녀가 끝내 쓰러졌다.
“헉!”
제인이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지난 느낌이 들었다.
부랴부랴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이 이상했다. 그녀가 출발한 시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설마 하루가 지난 건가?’
제아무리 요즘 피곤한 일이 많았다고 할지라도 하루를 꼬박 잘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불편한 마차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깊게 수면하지 못한다.
마차는 역시 멈춰 있었다. 마부는 어디에 간 것인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커튼을 걷고 주위를 둘러보니 암흑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시계를 확인해보니 역시 해가 없을 시간대는 아니었다.
제인은 무서움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숲?”
마을 외곽을 갈 때 숲을 지나치는 경로는 없었다. 그녀는 이상함을 감지하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아, 헙!”
몇 발짝 걷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입을 막은 채로 끌고 나갔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질질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낭떠러지 위였다.
“저런, 불쌍한 제인.”
귀여운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높은 음성에 가려진 섬뜩함을 발견한 제인이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헬레나였다.
그녀는 발버둥 치는 제인이 가소롭다는 양 일부러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이제 제인의 발은 허공을 뒹굴고 있었다.
“나를 선택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헬레나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윽고 섬뜩한 웃음소리가 덧붙었다.
‘얘, 뭐 하나 거래할까? 이곳에서 계속 일하며 공주의 스파이를 자처해. 그럼 네게 시녀 자리를 약속할게. 그거, 너 같은 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얻는 자리인 거 알지?’
클로에가 깨어나기 전, 헬레나는 제인을 불러 은밀한 제의를 했다. 스파이 역할을 한다면 일개 평민이 지원할 수 없는 시녀 자리를 주겠다는 엄청난 제안과 함께.
그러나 제인은 한 치의 고민 없이 그를 거절했다.
‘거절? 멍청한 거 아냐? 대체 왜! 뭘 더 원하는 건데!’
‘전 반짝반짝 빛나는, 모두에게 선망받는 공주님이 좋아요. 전 그분 외에 다른 분을 섬길 생각이 없어요.’
별 같잖은 이유를 가져다 대면서.
아무 이유만 붙였어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을 텐데. 감히 하녀 주제에 헬레나와 클로에를 비교하는 것은 도를 넘은 일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공주님은 바보같이 방에서 울고 계실 거란다. 널 기다린다면서, 널 구하진 못하겠지.”
잘 가렴. 의미심장한 인사를 뱉은 헬레나가 손을 놓았다.
몸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던 손아귀가 사라지자, 제인은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떨어졌다.
“흥. 바보 같기는.”
제인이 사라진 낭떠러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레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멍청한 것들은 단명한다.
***
제인이 떠난 밤, 클로에는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멍하니 침대에 누운 그녀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시트에 널브러진 머리칼부터, 힘없이 파닥거리는 제 팔다리가 보였다.
장황히 움직이던 동공이 돌연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서신이 잔뜩 왔었어요.’
제인은 클로에가 쓰러진 동안 수많은 서신이 도착했다고 전해주었다. 늘 저녁만 되면 소리소문없이 정해진 위치에 놓여 있다며.
중요한 편지일지도 몰라 서랍 안에 모아두었다고 일렀다.
더디게 일어선 클로에가 책상 앞에 멈추었다. 서랍을 열자 제인이 귀띔했던 것처럼 새로운 편지가 쌓여 있었다.
전부 그녀의 친우가 보낸 것들이었다.
클로에는 총 사흘간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서랍에 있는 편지 또한 총 세 통이었다.
클로에는 그중 가장 밑에 있는 것을 들었다. 종이에선 퀴퀴한 나무 냄새가 났다.
「추신: 화나지 않았습니다. 걱정은 마세요. 하나뿐인 친우에게 어찌 화가 나겠습니까.
그냥 단지, 조금 심술이 났던 것뿐이에요. 정말 그뿐.」
쿤의 글씨체는 평소보다 더 반듯했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편지의 말투보다는 부드러웠고, 평소보다는 살짝 퉁명스러웠다.
클로에는 이번 편지에서 그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추신을 읽던 클로에의 입꼬리가 경련하며 올라갔다. 발끝서부터 무언가 움찔거렸으나 그녀는 애써 모른 체했다.
서둘러 다음 편지를 열었다. 이번엔 아주 희미하게 허브 향이 배어 있었다. 제일 밑에 있던 것보다는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
「답장이 없으신 건 바쁜 탓이시겠지요? 혹여나 제 장난이 화를 불러일으켰다면,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부디 아량을 베풀어 답신을 보내주십시오. 욕만 담은 편지도 영광스럽게 받겠습니다. 그마저도 귀찮으면 점 하나만 찍어주십시오.
……나, 클로에가 없으면 친구가 없습니다.」
이번 편지의 글씨체는 복잡했다.
예쁘게 쓰려는 노력은 보였지만, 정작 결과물은 엉망이었다. 어느 획은 반듯했고, 어느 획은 삐뚤빼뚤했다. 어느 것은 맞춤법을 틀렸고, 어느 것은 문법을 틀렸다.
정말 급하게 보낸 사람의 것처럼.
클로에는 그것이 조바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늘 짓궂던 남자의 말투가 이토록 온순해질 수 있었다니. 역시 친구란 존재는 누구에게나 위대하고 대단한가 보았다.
콧물에 막혀 코를 훌쩍일 수도 없었다. 이젠 콧방울이 찌릿찌릿 따끔거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왔다던 편지가 클로에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몇 번씩이고 편지 뜯는 것에 실패하던 클로에는 무려 열 번째의 시도 끝에 봉투를 꺼냈다.
편지를 열자마자 쿤의 향이 났다. 못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되어가는데도 편지 덕분에 그의 향만은 기억이 난다.
편지는 지금까지 받았던 것중 가장 짧았다. 두 줄 채 되지 않는 편지 위로 꾸며내지 않은 감정이 드러났다.
「클로에.
당신, 무슨 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