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제국으로
(20/46)
20. 제국으로
(20/46)
#20. 제국으로
2023.05.20.
짤막한 질문 하나가 클로에를 무너뜨렸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걱정 하나가 잡념을 모두 물렀다.
“나, 무슨 일 있어요…….”
듣는 이도 없는데, 클로에는 편지를 쥔 채로 한참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전혀 괜찮지 않아요…….”
항상 그녀의 사랑은 실패한다.
클로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도, 가족도, 친구도 전부 잃어버렸다.
「나의 친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자신을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이 남자뿐이다.
「네. 있습니다.」
클로에는 여전히 저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현상 수배범인지, 돈 많은 타국의 귀족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평범한 여행자인지.
이름은 정말로 쿤이 맞는지도, 친우의 정확한 나이도, 주소도 모른다.
또한, 그가 편지를 보내는 방법도, 자신의 편지가 그에게 발송되는 방법도 모른다.
그런 출처 없는 남자에게 클로에는 감히 저를 기댔다. 설령 쿤이 그녀를 돕고 싶다고 할지언정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클로에가 원하는 걸 가져올 수 있는 건 제국의 황제뿐이었으니까.
친우가 그 빌어먹을 황제와 이름이 같기 때문일까. 클로에는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줄래요.
제발.」
남자에게 클로에는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가족에게도 구걸한 적 없는 도움을 이 남자에게 청하고 있었다.
먼동이 트려는 무렵, 하늘은 아직도 새까맸다.
조심스레 문을 연 여자가 방 안의 상태를 확인하고선 내부로 들어왔다.
방 안에선 곤히 자고 있는 상대의 숨결 소리로 가득했다. 여자는 발소리를 죽인 채로 상대의 옆에 다다간 뒤, 목표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침대 옆, 사이브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야 할 편지가 며칠 만에 생겨나 비로소 여자의 품에 들어왔다.
발신인은 편지 봉투를 봉합하지 않은 채였다. 여자는 내키진 않았으나 대신 왁스를 굳히기로 했다.
오늘마저도 편지가 없으면 목덜미를 부여잡은 채로 쓰러질 사람이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편지의 내용을 보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의 일이었다. 결단코 두 사람이 나누는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폐하께서 보시면 제국을 뒤집으시겠군.”
편지를 들고 왕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귀찮은 일이 발생하겠구나.
미래를 예견한 여자가 다가올 두통을 호소했다.
***
아침부터 공작가는 부산했다.
아르헨 공작 부부가 제국으로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프리히드 제국의 황제가 두 사람을 초청했다. 제국과 왕국이 동맹을 맺는 데에 기여한 칼리스는 종종 황궁으로 초청되었기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이토록 촉박하게 잡힌 건 처음이었다. 보통 제국에서 초청이 이뤄질 때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인데, 이번엔 고작 며칠 간의 공백을 두고 일어났다.
그 덕에 아주 급하게 채비해야만 했다. 황제를 위한 조공을 구하는 데도 용을 썼다.
당일날, 허드렛일을 도맡은 하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저곳 돌아다녔으며, 시녀들은 온갖 장신구를 든 채로 거울 앞을 서성였다.
“이게 마음에 드세요?”
“흐음…….”
제국에 가는 일원으론 헬레나가 더 추가되었다.
헬레나는 거울 너머의 자신을 응시했다. 시원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꾸며줄 목걸이가 마땅치 않았다.
신경질적인 신음에 시녀는 서둘러 다른 목걸이를 가져왔다. 이 역시 헬레나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저거.”
쭉 뻗은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그녀의 옆에 앉은 공작부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홀로 준비해야 했지만, 중요한 일정을 앞두었으므로 특별히 파우더 룸에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았다.
“저걸로 할래.”
헬레나가 말하는 ‘저것’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클로에의 목에 꽂혔다. 클로에만이 담담하게 거울 너머의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시녀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작가에서 홀대받을지라도 공주는 공주였다. 왕족의 목에 있던 목걸이를 뺏어오는 건 무리였다.
“저게 예뻐 보이네. 빨리 가져와.”
그런 마음도 모르는지, 헬레나가 독촉했다.
“이게 그리 탐난다면 기꺼이 양보하지.”
챙.
시녀들이 엉거주춤 움직이려던 참이었다. 클로에가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허!”
기가 막혔던 헬레나가 날숨을 뱉었다.
그때, 헬레나를 전담하던 시녀가 목걸이의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너, 지금 그딴 쓰레기를 나한테 걸치려는 거니?”
“네? 아, 아니요……. 죄, 죄송합니다!”
“빨리 옆에 붙어서 다른 목걸이나 준비해오란 말이야. 답답해 죽겠네.”
기분이 상해버린 헬레나는 애꿎은 상대에게 화를 풀었다. 아닌 척 옆을 바라보니 클로에는 금세 다른 목걸이를 고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여자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싶었다.
‘오늘만 참아야지.’
하지만 황궁에서 부른다니까 이번만 유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괘씸하지만, 저 여자는 공작부인으로서 방문하는 거니까.
칼리스가 말하기를, 이번 방문에서 황제에게 헬레나와의 결혼을 허락 맡겠다고 했다.
신에게 맹세한 것을 거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두 번째 결혼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와의 결혼식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절대적인 것도 황제 앞에선 바뀐단다. 황제가 허락할 시 신전도 따를 것이란다.
칼리스가 허가를 받아온다면 그녀는 공식적으로 공작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헬레나의 머릿속에선 온갖 호화로운 장면이 지나갔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그녀는 비싼 웨딩 마차에 탄 채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온갖 매스컴에선 그녀에 대해 떠들어 댔으며, 저를 무시하던 자들이 자신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해!’
***
클로에와 칼리스는 황제의 알현실 앞에서 멈추었다. 경비병이 물러서기 매섭게 칼리스가 낮게 속삭였다.
“클로에. 오늘은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무려 황제의 앞이니, 너도 허튼짓은 안 하겠지만 말이야.”
그가 일전의 연회를 염두에 두며 속삭였다.
클로에가 칼리스를 무시한다거나, 두 사람의 사이가 소원해진 것을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클로에는 누구처럼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몰리안 후작가의 연회 때야 제 편이 많았으니 멋대로 행동할 수 있던 것이었다. 감히 황제의 앞에서 무례한 짓을 할 수는 없다.
“공작이야말로 허튼짓은 삼가세요.”
불안해하는 칼리스를 바라보던 클로에가 곧이어 코웃음 쳤다.
너나 잘하세요.
그리 말한 적은 없었으나, 클로에의 말을 단축하면 딱 저런 의미였다.
되레 당한 칼리스는 성질도 부리지 못하고 이만 악물었다.
‘나야말로 여기서 무언갈 해야 해.’
그와 이혼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
최적의 순간에 가장 필요한 인물을 만났다. 클로에는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려준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다.
황실에선 길어봤자 일주일 정도 머물 것이었다. 그 안에 이혼 승인을 받는 건 불가능할 테니, 적어도 황제를 제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황제만큼은 대신관처럼 칼리스에게 넘어가선 안 됐다.
긴장한 클로에가 깊게 숨을 내쉼과 동시에 문을 두들겼다.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만 같은 우아한 노크 뒤엔 곧바로 문이 열렸다.
길게 깔린 레드 카펫, 그 위에 촘촘히 뿌려져 있는 장미잎.
클로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리는 최대한 죽인 채로. 발의 보폭이 너무 넓어서도, 좁아서도 안 되었다.
긴장감을 품은 채로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에게 끝이 다가왔다. 클로에와 칼리스는 카펫의 끝부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갑작스러운 부름에 와주어 고맙구나.”
제국의 지휘자이자 세계의 통솔자, 황제가 이어서 인사했다.
“몇 달 후 두 국가의 종전기념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를 기념할 축제를 열 예정이다. 그때 그대들이 필요할 것 같군.”
몇 달 뒤 황제를 한 번 더 볼 기회가 생겼다. 축제를 잘만 이용한다면 그 전에 몇 번씩 더 제국을 더 왕래할 수도 있었다.
“저희를 필요로 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폐하.”
“그리 말해 주니 내가 영광이야. 이만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하거라.”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황좌에 앉아 있는 쿤과 마주했다. 황제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는 삐딱한 자세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쓴다던 황제는 오늘도 어김없었다.
감추고 있는 얼굴이 훤칠하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가면을 쓴 상태로도 특출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그대들도 여상하구나. 안색이 좋아 보여 다행이야. 준비 기간은 열흘 정도로 생각해두었는데, 그대들의 의견을 말해봐.”
“폐하께서 저희를 필요로 하신다면, 몇 날이 걸리더라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말뿐이라도 고맙군. 그대들을 위한 방을 준비했으니, 오늘은 푹 쉬도록.”
곧이어 신하 두 명이 두 사람의 옆으로 다가왔다. 간단한 인사를 끝마치고 황제가 배정해준 방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아, 참.”
그때였다.
프리히드 제국의 황제, 쿤이 깜빡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공작부인과는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잠시 남아주었으면 하는군.”
황제의 부탁에 클로에가 고개를 들었다. 매사가 귀찮다는 양 눈을 감고 있던 쿤 또한 이번만큼은 두 눈을 뜬 채였다.
이윽고 마주한 가면 너머의 심연.
‘……쿤?’
핏빛으로 물든 눈을 확인한 그녀는 돌연 다른 인물을 떠올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