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폐하와 함께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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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폐하와 함께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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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폐하와 함께해도 될까요?
2023.05.21.
이후 쿤은 칼리스는 물론 제 호위기사를 제외한 다른 신하들까지 전부 물렀다.
덩그러니 혼자가 된 클로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수는 현저히 줄었는데도 긴장감이 외려 진해졌다.
한 사람.
고작 한 사람 몫의 시선이 이토록 부담스러울 수 있던가. 빠져나간 기사들의 것을 합쳐도 눈앞 남자의 것처럼 진득하진 않을 테다.
“고개를 들어. 공주.”
황제의 명에 클로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호칭도 오랜만이었다. 출가한 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왕가가 아닌, 공작가의 사람으로 불렸으니 말이다.
클로에는 으레 부인이라 불리는 자신을 다르게 부르는 황제의 의도가 궁금했다. 저를 조롱하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그러나 도무지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함구하곤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이리 대화를 하게 된 것은 처음이군.”
“영광의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 하녀 하나가 숲에서 크게 다쳐왔는데, 공주에게 귀속된 자 같아 말이지.”
“하녀라니요?”
클로에가 곧바로 반문했다.
쿤의 설명대로라면 정황상 한 사람밖에 없다.
얼마 전 공작가를 떠난 그녀의 하녀, 제인.
‘하지만 제인이 이 부근 숲에서 다치고 올 리가 없는데…….’
제인의 고향은 북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제국과는 상당히 멀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던 그녀가 제국 근처의 숲에서 발견될 이유가 있을까?
“혹시 폐하께선 아이의 이름을 들은 적 있으실까요?”
“며칠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더군. 아직 신원이 밝혀지진 않은 상태야.”
“아…….”
“같은 숲에서 가방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공작가의 이름으로 된 보석들이 들어 있더군. 하여 공주의 하녀가 아닐까 짐작해보았지.”
공작가의 이름으로 된 보석이라니.
배짱 좋은 하녀가 공작이나 안주인의 금고를 털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면, 정말 제인을 일컫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제인의 짐가방에 장신구들을 한 아름 집어넣은 뒤 돌려보냈으니까.
일찰나 클로에의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제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확연한 증거였다.
“……그 하녀가 의식을 되찾지 못할 정도로 다쳤다고요.”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양 중얼거렸다. 잇따라 충격을 받은 눈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보러 갈 텐가?”
그녀의 반응을 내리 살펴보고 있던 쿤이 한마디 거들었다.
“……예?”
“공주가 원한다면 그쪽으로 안내해주지.”
마치 그녀의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한 제안.
클로에는 상대의 눈치를 보다가 종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잡아.”
“…….”
“발에 힘이 풀렸잖아. 공주.”
황좌에서 내려온 그가 클로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시야에 다가온 손을 보다가 이내 다리 쪽을 훑었다.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있던 다리가 어느새 바깥쪽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힘이 풀려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은혜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큼지막한 손을 잡자마자 힘이 실렸다. 그 덕에 힘이 풀린 다리를 가지고도 쉬이 일어날 수 있었다.
쿤과 동행한 클로에는 혼잡한 복도를 배회하다가 안내받은 문 앞에서 멈췄다.
제인이 누워 있다는 방은 굉장히 화려했다. 쓰러진 사람을 구해 돌보는 것치고는 굉장히 후한 대접이었다.
클로에는 환자의 침대로 향하자마자 곧장 얼굴부터 확인했다.
“……제인?”
황제의 말마따나 상처가 많아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체형과 간단한 외양 등을 고려해보았을 때, 병상 위에 앉아 있는 환자는 제인이 확실했다.
게다가 환자의 팔에 새워진 팔찌.
망가진 상태이지만, 팔찌의 원래 주인이었던 클로에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자신이 제인에게 줬던 팔찌였다고.
사태파악을 마친 그녀가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해맑은 웃음 뒤로 슬픔을 감추고 돌아섰던 자신의 하녀가, 어째서 이런 꼴을 하고 있는가.
하녀를 지키기 위해 헤어짐을 택했건만, 어째서 이 아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가.
“……제인.”
힘없이 떨리는 손이 제인의 얼굴 주위를 맴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아파할까 염려되었다.
끝내 손을 거둔 클로에가 조용히 침대에 머리맡을 올려두었다. 한시라도 빨리 제인이 일어나 저를 안아주길 바랐다.
“널 지키기로 했는데, 지키고, 싶었는데…….”
바람과 달리 상대는 관짝에 갇혀 있는 시체처럼 망연히 누워 있을 뿐이다.
전쟁터의 기사들을 간호한 바 있는 클로에는 환자의 상태를 볼 줄 알았다.
저 꼴이라면 제인은 의식을 되찾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이처럼 중상을 입은 경우, 대개 며칠 되지 않아 환자의 숨통이 끊어지곤 했으니.
절망스러운 상황 속, 클로에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다. 부디 제인이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해달라 하늘에 부탁하는 것뿐.
“죄송합니다. 폐하.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방에서 나온 클로에가 쿤을 향해 사과했다.
상대는 그녀의 불그스름한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울음의 여파인지, 시선의 여파인지. 클로에의 눈가가 홧홧하고 따끔해졌다.
“원치 않는 사과이니 내게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지. 공주는 괜찮은가?”
뒤따른 질문에 클로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지 않게 당찬 대답이 의아하게도 상대의 속을 진탕 헤집었다.
쿤은 답답한 상황을 조처하고 싶었다.
하지만 관계도 없는 그가 나서 봤자다. 상대의 의아와 수상만 살 뿐이다.
“우울해 보이는군. 공주.”
분명 안 된다고 일러 놓았건만 본능이 이성적 판단을 무시하고 앞서나갔다.
예상대로 클로에가 눈을 끔뻑였다. 대답을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공주는 그럴 때마다 무얼 하지?”
그렇다고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쿤은 기회를 빌미 삼아 대화를 시도했다.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누워 있는다?”
돌아온 것은 단순한 답변이었다. 의아했던 쿤의 되물음에도 변치 않았다.
클로에는 항상 누워 있었다.
원치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라든지, 또 그 일을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때라든지.
맞서 싸울 힘도, 의지도 없었기에 항상 침대에 누워 시간을 죽였다.
자신이 부당함에 맞서 싸워도 바뀔 건 없다는 걸. 당장은 이겼을지언정 다음 시련이 또 다가올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도 침소에서 멍하니 누워 있을 예정인가?”
처음 클로에는 상대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공작가에서 늘 눈치를 봐야 했던 그녀는 화자의 감정을 읽기 바빴는데, 쿤의 것은 굉장히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질문엔 수많은 감정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언뜻 비아냥대는 것 같다가도 그녀를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보이다가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클로에는 끝내 해답을 찾지 못한 채로 진심을 토로했다.
“아니요. 제 할 일을 할 겁니다.”
“공주의 할 일이라면―.”
“나의 사람을 그렇게 만든 자를 수색해보려 합니다.”
다음, 쿤이 내비친 감정은 무척이나 확연했다.
“마침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미소. 클로에가 보는 황제는 현재 안도하고 있었다.
***
쿤은 그녀에게 제인을 발견했던 기사를 소개해주었다.
클로에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얼굴을 붉힌 사내놈에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죄를 물어 마땅하나, 그녀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니 한 번은 참고 넘어갔다.
그는 클로에를 기다리는 동안 화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주위 기사들을 무른 채로 화원을 거닐던 도중, 누군가 다가와 쿤과 부딪혔다.
“앗…….”
불쾌감을 느낀 쿤이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부딪힌 당사자는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쿤은 짧은 통성명도 없이 상대의 정체를 알아냈다.
‘헬레나라고 했던가.’
밀색의 옅은 갈색 머리칼.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끌어다 주는 분홍색 눈동자. 수많은 남자의 심금을 울렸을 사랑스러운 얼굴.
여자를 엿보고 온 기사는 그리 전했다.
하지만 정작 같은 건 머리와 눈 색뿐. 아름답다느니, 공작의 마음을 훔치는 게 당연하다느니, 구구절절했던 부연 설명은 순 거짓말인 듯했다.
‘그나저나 이 여자가 여긴 왜.’
여자의 정체를 알자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불쾌감이 한층 도드라졌다.
제 과오도 모른 체, 사과 하나 없는 뻔뻔한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제 터전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서 있다는 사실이 화를 치밀게 했다.
될 수만 있다면 땅을 짓밟고 있는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저를 보고 있는 가증스러운 눈을 도려내고 싶었다.
“아!”
그 순간 헬레나가 짧게 신음했다. 무언가 깨달은 듯한 태도였다.
“죄, 죄송해요! 다음부턴 반드시 주의하겠습니다!”
상대의 사과를 받고픈 마음조차 없던 쿤은 용서 대신 질문으로 반응했다.
“이곳엔 무슨 일이지?”
쿤이 묻고자 했던 의도는, 너 따위가 어째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냐는 것이었다.
“아! 꽃이 예뻐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북부는 아직 추워 꽃이 자라지 않았거든요! 성에 예쁜 꽃이 많아 정말 좋네요.”
상대는 미처 깊은 의도까지 헤아리는지 못하는 듯했지만.
상대의 조잘거림에 회의감을 느낀 쿤이 바로 걸음을 옮겼다.
“폐, 폐하!”
그때, 명랑한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폐하께서도 혼자이신 듯한데…….”
그녀는 어느덧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목소리도 살짝 올라가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 또한 폐하와 함께해도 될까요?”
쿤이 저를 훑어보노라면, 그녀는 수줍음이 많은 소녀처럼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