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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주제를 알아야지 (22/46)


#22. 주제를 알아야지
2023.05.22.


헬레나는 황궁에 온 김에 쿤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머무르는 방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화원에서 서성이고 있던 것도 실은 황제와의 운명적 만남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가면을 쓰고 다니는 남자를 보면, 그냥 얌전히 굴어.’

‘응? 왜? 그 남자가 누군데?’

‘그 남자가 제국의 황제거든.’

칼리스가 이르기를, 황제는 세계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세상엔 그보다 높은 사람도, 강한 사람도 없다며.

저보다 낮은 사람이 없는 그녀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더불어 헬레나를 제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평민이기 때문에 공작 부인이 될 수 없는 거라면, 다른 귀족들과 어울려 지낼 수 없는 거라면……. 그 격에 맞게 되면 되는 거잖아.’

평민 출신에 불과한 헬레나에게 황제와의 인연은 그야말로 신분 상승이 될 터.

이 소중한 기회를 헬레나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을 더 보고 싶은데, 이렇게 좋은 곳은 또 처음인지라 길을 찾는 데 서툴러서요. 폐하께서 도와주신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은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헬레나가 여타 귀족 여자들처럼 고고하게 굴어보았자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할 테다.

그렇다면 그가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을 연기해 관심을 끌면 된다. 무릇 사람이란 새로운 것에 마음이 동하는 종족이니까.

물론 황제가 평민 여자와 친분을 쌓을 일은 없을 테지만, 헬레나가 신분은 천할지언정 갖고있는 미모와 분위기는 귀족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핍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는 자신이 가진 장점을 활용할 줄 알았다.

“그래.”

헬레나가 긴장할 즈음 상대의 고갯짓이 이어졌다. 결국, 그녀가 황제를 꼬드기는 데 성공한 거다.

“감사해요!”

뿌듯함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헬레나의 해맑은 웃음은 한여름의 햇살보다도 따스하고 어여쁘댔으니, 일부러 더 활짝 웃었다.

“폐하께서는 정원에 오기 전까지 뭘 하고 계셨나요?”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물었다.

“글쎄. 네가 알 필요가 있나?”

“궁금해서요. 폐하처럼 대단하신 분들은 무얼 하시나 늘 궁금했거든요!”

싸늘한 대답에도 헬레나는 굴하지 않고 상대의 비위를 맞췄다.

“대단한 손님을 맞이했지.”

어렵게 들은 대답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헬레나는 벽을 허물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계속 대화를 이끌었다.

“정말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대단한 손님은 보통 누구실까요. 으음, 제국의 귀족? 타국의 왕?”

“동맹국의 공주.”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헬레나가 보기 좋게 입을 닫았다.

어김없이 돌아온 짧은 대답이었지만, 대답의 길이보다는 내용이 헬레나의 신경을 거슬렀다.

동맹국의 공주라면 클로에를 지칭하는 게 아니던가!

“고, 공주님과 보내는 시간은 재밌으셨나요?”

“더할 나위 없이 즐겁더군.”

“……저, 저도 폐하를 재밌게 해드릴 수 있어요! 어쩌면 공주님보다도 더요!”

공주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니! 꼭 클로에가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상했다.

그녀는 지고 싶지 않아 일부러 말을 과장되게 했다. 그러자 황제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의 눈을 가리는 감은빛 가면 때문에 표정을 정확히 관측하기는 어려우나, 헬레나는 미소이니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날 어찌 재밌게 한다는 거지?”

“재밌는 얘기를 들려드릴게요! 원하신다면, 제가 공주님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공주를 잘 안다는 듯한 태도군.”

“잘 알고요! 저랑 가까운 분이시거든요!”

헬레나의 자신 있는 대답에 황제가 눈길을 주었다. 일말의 관심이 동했다는 뜻이었다.

“으음, 공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성격은 무척이나 딱딱하시고 사무적이세요. 귀족이란 글자를 가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누구든 공주님을 가리킬 정도로 귀족의 표본이랄까요. 지나칠 정도로 밴 귀족 예법이 가끔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감정이 없어 재미도 없으시고, 향기 없는 꽃 같아요.”

헬레나가 해줄 이야기는 그다지 좋은 얘기가 아니었다.

얼핏 들으면 외람되고 무례한 이야기겠지만, 오늘 클로에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황제 또한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가 있을 테다.

칼리스가 말하기를, 클로에는 답답할 정도로 귀족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괜히 헬레나와 비교가 된다고 했던가. 그녀의 꾸밈 없는 태도가 상대를 더욱 편하게 만들어준다고.

귀족과 늘상 교류해야 하는 황제에게 클로에는 진부할 테다. 그러니 자신의 말에 공감해주길 바랐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눈앞의 헬레나를 그녀와 비교하게 될 테니까.

“향기 없는 꽃이라…….”

헬레나의 말을 잠자코 듣던 쿤이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한결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에 그녀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상대의 의도도 모르고 한껏 신난 탓이었을까. 헬레나는 차마 가면 너머의 시선은 확인하지 못했다.

“언젠간 폐하도 그분과 대화하는 게 질리실 거예요. 그땐 저를 찾아와 주세요! 제가 둘도 없는 재밌는 친우가 되어드릴게요!”

***

정녕 헬레나의 작전이 성공한 것인지, 쿤은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자신을 안내시켰다.

둘이 함께 있는 광경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헬레나는 일부러 길을 헤매는 척 궁 안을 빙빙 돌았다.

그렇게 장차 몇십 여분을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헬레나 혼자 허공을 향해 떠드는 게 대부분이었으나, 그 또한 일종의 호의라 믿었다.

평민 따위가 주절거리는 말을 전부 들어주는 인내심 좋은 황제는 없을 테니까.

“저……. 여기에요. 폐하!”

더 걸을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미아인 척을 하는 것도 어느덧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방문 앞에 도착한 헬레나가 멈추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쿤을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감정이 없는 누구와 달리 헬레나는 생기있게 굴어야 확실히 비교될 것이었다.

“폐하, 오늘 감사했어요! 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가 않았어요.”

두 사람은 화원에서 방까지 돌아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헨 가문이 왕궁에 방문한 시기와 겹친다며, 가문의 사람이냐 묻는 쿤에겐 ‘공작가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라고 둘러댔다.

황제가 후원이란 단어에 관심을 가졌을 땐, 묻지도 않은 불행 서사를 잔뜩 열거해 주었다.

늘 부유한 귀족들만 보아왔을 황제에게 애처로움이란 감정 또한 새로울 것이었다.

“저는 항상 그 정원에 있을게요. 폐하께서 무료해지실 때 저를 찾아주세요! 그 공주님보다는 제가 더 재밌고, 편안하실 거예요!”

“글쎄.”

“네?”

“네 후원자가 허락한다면 말이지.”

심상치 않은 말에 헬레나가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칼리스가 제 방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칼리스와 헬레나가 한 방에 묵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가 공작의 정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언젠가 알려질 일이긴 하나, 알려지는 시기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아직 두 사람이 친해지기 전인 지금 알게 될 시, 황제는 헬레나가 떠벌린 말을 전부 편협한 이야기라 믿을 테다.

그뿐이랴, 정실부인을 욕한 못된 정부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한심하게 여길 게 뻔했다.

황제에게 점수를 따 친구가 될 요량이었는데, 오히려 밉보이다니.

“아, 생각해 보니 옆방…….”

“저런, 기억력이 안 좋은가 보군. 이 방이 맞지. 왜냐면 공작의 편의를 위해 다른 방은 내어주지 않도록 되어 있었거든.”

“그, 그게 말이죠. 사실은……!”

서둘러 다른 변명을 만들려던 무렵, 칼리스가 눈치 없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헬레나, 거기서 무얼……. 폐하? 폐하께선 제 방에 어찌……?”

이내 헬레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칼리스 또한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표정이 굳어진 채였다.

“이 여자가 공작의 새로운 여자가 맞나?”

“예? 아, 예. 맞습니다만…….”

“아무래도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군. 빠르게 교육시키는 게 좋을 거야.”

“예?”

“내가 초대한 손님을 한없이 욕하더군. 원치도 않는 이야기를 계속 듣느라 진절머리가 났거든.”

“……예?”

“공주가 내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더라면, 모처럼 가진 만남이 얼룩질 뻔했어. 그 향기 없는 꽃에게 고마워하는 게 좋을 거야. 헬레나.”

비로소 쿤의 시선이 선명해졌다.

헬레나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결단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싸늘했고, 지독하게 잔혹했다.

부러 헬레나의 말을 반복하며 비아냥대던 쿤은 한 치의 주저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뛰쳐 갔다.

“폐, 폐하! 폐하께서 무언가 오해하고 계신 게 있으세요!”

이렇게 끝이 나서는 안 됐다.

그녀의 찬란한 부흥을 도울 수 있는 황제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니. 그보다 절망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

“폐, 폐하. 오해예요! 저는 단지 폐하와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서…….”

“친밀하게 지내?”

차가운 목소리에 의해 헬레나의 말은 반 토막이 났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이 그대로 혀 안을 배회했다.

대신, 헬레나의 입에선 딸꾹질이 나기 시작했다.

“주제를 알아야지. 헬레나.”

쿤이 오늘 헬레나와 함께하는 동안 뱉은 가장 긴 말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헬레나의 귀에 가장 오래간 맴돌았다.

딸꾹질이 나는 바람에 뒷말이 나오지 않은 건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천운이었다.

헬레나는 멀찍이 떨어지는 황제를 바라보다, 쿤의 인영이 사라질 즈음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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