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운명을 바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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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운명을 바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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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운명을 바꾼 기사
2023.05.24.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클로에는 엉겁결에 황제의 침소까지 드나들게 되었다.
약점이라며 겁을 주던 황제는 의외로 대화를 원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사적 대화를 나눈 적은 또 없는 것 같아, 클로에는 흔쾌히 착석했다.
황제는 클로에의 이혼을 도울 마지막 동아줄로, 친분을 미리 쌓아두는 게 필수였다.
황제와의 친분은 필수였다.
두 사람은 침소에 작게 딸린 테라스에 앉았다.
쿤은 그리 높지 않은 도수의 와인을 준비해 꺼냈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밤바람. 그 안으로 들어오는 짙은 풀 내음. 가벼운 술자리에 독특한 분위기가 끼얹어졌다.
“그러고 보니 공주는 이 시간에 어째서 밖에 나와 있던 거지?”
쿤이 아주 원초적인 질문을 했다. 이윽고 클로에가 내내 손에 붙들고 있던 봉투를 가리켰다.
“편지를 부치려고 했습니다.”
“밤중에 난데없이 편지라니. 꽤 중요한 것인가 봐.”
얼핏 들으면 클로에를 나무라는 듯한 어투였다. 고작 그 편지 하나 때문에 위험한 줄도 모르고 싸돌아다녔냐는 질책.
그에 클로에는 서슴없이 긍정을 내비쳤다.
“네. 굉장히 중요한 거였습니다.”
“그렇군. 내게 맡기고 가면, 아침에 신하를 시켜 부치도록 하지.”
“……폐하께요?”
어김없이 내어진 호의.
황제가 내려주는 친절을 어김없이 받아들여야 할 클로에가 이번만큼은 주저했다.
클로에는 가급적 빠르게 편지를 부치고 싶었기에 부탁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맡기려고 했다.
그러니, 아예 안면도 없을 황궁의 고용인보다는 일면식이 있는 황제에게 전하는 게 나을 테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클로에는 머뭇거렸다. 왜인지 선뜻 편지가 내밀어지지 않았다.
황제를 번거롭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해져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찜찜했다. 무엇이 찜찜한지는 모르나, 그녀의 촉이 수차례 경고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침에 채비를 도와줄 시녀에게 부탁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급한 게 아니었던가? 그러니 이 밤중에 거리를 배회한 줄 알았는데.”
그녀는 거절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술잔이 맞부딪혔다. 유리의 충돌로 퍼지는 청아한 소리가 첫 건배의 경축을 알렸다.
클로에가 조심히 술을 들이켰다. 곧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액체가 건조했던 목을 축였다.
“내가 보아서는 안 되는 편지인가 보지?”
건배로 화제를 돌린 줄 알았는데.
쿤은 한 번 문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굴었다.
삐뚜름히 올라간 입꼬리. 얄밉게 빈정대는 목소리. 장난스럽다가도 어딘가 무게가 있어 보이는 태도에 그녀는 오싹해졌다.
생각해 보니 클로에가 편지를 숨기는 게 상대에겐 상당히 이상해 보일 테다. 마치 황궁의 이야기를 다른 곳에 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 다른 이야기를…….”
“내 욕이라도 했나?”
“……예?”
정작 상대에게 다른 것으로 의심을 사버린 듯하지만.
쿤의 황당한 질문에 잔뜩 긴장해있던 그녀의 태세가 느른해졌다.
“……욕까진 아니고, 뒷말을 조금 했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말을 정정했다. 청렴한 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순순히 자백했다.
순수하고도, 우스운 진실성이었다.
“뒷말이라.”
쿤이 우습다는 양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황제의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집념이 참으로 깨끗했다.
“섭섭하네. 난 공주를 좋게 보았는데.”
“……아.”
전혀 섭섭해 보이지 않는 얼굴. 오히려 말의 중점은 뒤에 쏠려 있는 듯했다.
짧은 탄식을 뱉은 클로에가 서둘러 술을 홀짝였다. 왜인지 가슴이 철렁했다.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그 좋음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스레 의식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에게 줄곧 묻고 싶었던 게 있었어.”
“편히 말씀해주세요.”
“요즈음 생활은 어떻지?”
가면 너머 황제의 눈빛이 돌변했다. 짓궂은 장난스러움이 스며들던 붉은 눈동자가 불현듯 진중함을 띠었다.
칼리스가 창피함도 모르고 황제에게 정부의 존재를 알렸을 리 없다. 클로에는 모른 척 자신의 상황을 숨겼다.
“여상합니다.”
이어 그녀는 재차 술을 마셨다. 불편함을 의식할 때마다 나오는 나쁜 습관이었다.
쿤 또한 그녀를 따라 잔을 들이켰다. 이내 말 없는 그녀를 남몰래 주시했다. 과연 이 주제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답게 거북한 표정이었다.
“사실 저녁에 한 여자를 만났어.”
그는 자신이 저녁에 겪었던 일을 고백하기로 했다. 그가 먼저 클로에의 상황을 알고 있노라 표현한다면, 상대 또한 진실을 고백하는 데 드는 주저함이 적어질 테다.
“이름이 헬레나라고 하던가. 그대의 가문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고 말하던데.”
“……아.”
“알고 보니 공작과 같은 방을 쓰더군.”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체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속눈썹을 반쯤 내리깐 채로 시선을 숨겼다. 숙인 고개 또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공주를 몹시 싫어하는 것 같더군. 어느 정부가 안 그러겠냐마는.”
황제의 덧붙인 말이 쐐기를 박으며 이해를 도왔다. 상대의 자세한 상황 설명이 없더라도 지나간 일들이 파악되었다.
“하하.”
슬픈 사람의 자세를 취하고 있던 여자의 입에서 조소가 튀어나왔다.
우아한 웃음소리가 적막에 잠식되었던 내부를 채울 즈음, 그녀가 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로 대단한 아이로군요.”
황제에게 클로에를 이간질하려던 모양이었다. 나쁜 인상을 심어준 뒤, 제 편으로 만든 후엔 함께 적으로 돌리려던 것일까?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교활한 행동엔 도가 튼 여자였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헬레나 양은 저희의 후원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후원자와 수혜자가 아니라, 연인 관계이고요.”
보아하니 쿤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클로에는 추잡스럽게 부정을 할 바엔 시원히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들어보셨을까요. 왕국의 신데렐라라고 불리던……. 그이의 첫사랑이요. 저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 출정에서 돌아온 공작
전하께서는 그녀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말할 필요까진 없을 텐데. 그녀의 입이 거침없이 과거를 쏟아내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세상 꼭대기에 앉아 있는 남자에겐 고고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친우와 같은 이름을 한, 다른 쿤마저도 제 편으로 만들고 싶어서일까.
다른 이에겐 자존심을 지켜내던 클로에가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공작가의 미운 오리였던 그녀가 헬레나가 도착한 후론 완전한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었다는 것.
그나마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이 제인이었으며, 유일한 동반자마저도 떠나게 되었다는 슬픈 사실까지도.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긴 대화를 마친 클로에가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조금씩 손을 댔던 술이 금세 다 떨어져 잔이 비워진 채였다.
쿤은 말없이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가 술을 많이 바란다고 생각한 것일까, 잔 안이 술로 빼곡히 채워지고 있었다.
괜찮다며 그를 제지하려던 무렵, 잔은 넘치고 말았다. 넘친 술이 클로에의 손을 푹 적시며 달콤한 향을 입혔다.
그제야 쿤은 병을 놓았다. 그마저도 미끄러져 바닥으로 놓쳐버렸다.
쨍그랑. 병 안에 남은 술과 함께 유리 파편이 이곳저곳으로 튀었다.
바닥과 쿤을 번갈아 바라보던 클로에의 시선이 마침내 남자에게로 정착했다.
“아…….”
사색하는 듯한 남자의 얼굴. 가면에 가려진 모습 때문에 쿤의 감정을 샅샅이 뒤질 순 없었으나, 클로에는 그가 현재 심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내가…….”
쿤이 입을 연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갈라지는 음성에 여유는 달아난 후였다. 늘 당당하던 쿤이 답지 않게 시무룩해 있었다.
“내가……. 사죄하지.”
사죄라니?
안타까운 이야기에 유감을 표하는 것이면 몰라도 사과는 적합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녀에게 사과해야 할 사람은 쿤이 아니다.
같은 방에 함께 있다던, 누군가의 행복을 좀먹은 대신 자신들의 행복을 부풀려 나가는 칼리스와 헬레나면 몰라도.
“폐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십니다. 어째서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클로에가 의아해하자 쿤이 처량한 목소리로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내 선택이 네게 불행을 불러왔군.”
불행의 시초라 함, 칼리스와 클로에의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계기엔 국가의 종전을 알린 칼리스의 재건이 있었다.
비로소 그의 의중을 이해한 클로에가 급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의도치 않게 그를 질책하게 된 거라면, 진심으로 사죄해야 했다.
자칫하면 오늘의 일이 두 국가 간의 불화로 번져질 수도 있었으니.
“폐하의 올바른 선택 덕에 저희는 모두가 평화로워졌습니다. 폐하의 탓이라니…….”
“난 공작이 아니었더라도 이 전쟁을 끝냈을 거야.”
열심히 쿤을 변호하던 클로에가 입을 앙다물었다.
괴롭다는 듯 내뱉는 황제의 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파격적이었다.
그녀가, 왕국 전체가 수년간 믿고 있던 사실을 순식간에 깨트릴 정도로,
“……그게.”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해 있으니, 대화가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클로에는 애써 진정하며 황제를 향해 거듭 질문했다.
“애초부터 나는 전쟁을 끝내려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정정이 아닌, 변명과도 같은 설명이었다.
“내가 필요한 건 설득이 아닌, 내 의사를 전해줄 기사 한 명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