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삼 년 전 (25/46)


#25. 삼 년 전
2023.05.25.


쿤은 그날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보석이 사라지니, 한없이 강인했던 얼굴이 한결 아름다워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미모였으나, 이는 클로에의 안중 밖이었다.

그녀의 눈과 귀는 오로지 상대의 입술에만 집중한 채였다. 조그마한 귀가 극도로 예민해져 홧홧해질 정도였다.

이따금 쿤이 숨을 쉬노라면, 그녀도 그제야 호흡을 들이켰다.

“……왕국에선 전쟁을 종전시키기 위해 날 설득할 기사를 꾸준히 보내왔다. 하물며 내가 종전을 결심한 그 전날까지도.”

뒷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칼리스가 그 운 좋은 기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일 터.

“……아르헨 공작이 폐하를 설득했다고 들었는데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클로에의 것이었다.

“설득이라. 두려움이란 감정에 뒤덮여 있던 그 멍청한 기사는 설득은커녕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것으로 기억되는군.”

수많은 기사를 만났음에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비단 그가 제 의사를 전달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매개체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조국을 구하러 온 기사치고는 제일 약하고, 미련했던 놈이었기에.

“사, 살려주세요.”

“마치 내가 널 죽일 것처럼 말하는군.”

“사, 살려주세요. 전, 전쟁을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전쟁을 끝내 달라는 다소 직접적인 부탁. 혹은 평화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감정적인 호소.

그 무엇만 되었더라도 덜 우스웠을 테다.

하지만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며 다가온 기사는 무릎을 꿇은 채로 같을 말만 되뇌었다.

동정을 살 심산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그랬던 기사는 어느새 왕국에서 세기의 영웅이 되어 있더군.”

딱히 과거의 칼리스를 비난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도 한 명의 기사로서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런 추태를 한 주제에 왕국으로 돌아가 영웅 행세를 한 것이 우스울 뿐.

“…….”

모든 이야기를 들은 클로에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잇따라 굳어버린 몸짓으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깬 것 같아 미안하군. 함께 어울릴 기분이 아니라면 그만 방으로 돌아가도 된다.”

그제야 클로에의 눈빛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녀는 쿤을 나지막이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아서라도 꿋꿋이 자리를 지킬 그녀가 냉큼 자리를 벗어난다.

그녀는 좋은 밤을 보내라는 황제의 인사에도 건조하게 대꾸했다. 감히 황제에게 그래서는 안 되지만, 지금마저도 실없이 웃을 여유가 없었다.

쿤은 그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클로에의 쓸쓸한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두통이 일었다. 무언가가 제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쿤은 두통의 정체를 깨달았다.

잊고 싶은 나머지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기억의 조각이었다.

***

그것은, 찰나의 결정처럼 보일지언정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쿤 프리히드는 모든 것을 통달한 남자라고 일컬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국의 꼭대기에 서 있는 그 남자.

비록 이기적인 출생이 자리를 만들었을지라도 추후엔 모두가 쿤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즉위한 그는 지난 폭군들과 다를 바 없는 잔혹함을 가졌으나 정치력만큼은 뛰어났다. 고고한 탄생에 걸맞은 능력이었다.

황제가 즉위한 지 어언 팔 년째 되던 해, 무훈과 인망을 두루 갖춘 그는 본인조차 이루기 힘든 성대한 목표를 하나 세운다.

바로 약소국들과 제국을 통합하는 것.

첫 번째 희생양으로는 제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강대국에 속하는 발론트 왕국이 되었다.

또한, 발론트 왕국은 어느 정도 군력이 센 편이라 본보기로 삼기 최적화된 곳이었다.

처음엔 발론트 국왕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매번 결렬되었다. 이는 그의 예상 범주 내에 있었기에 쿤은 곧바로 다음 플랜을 이행한다.

두 국가의 전쟁.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두 국가의 국경을 가르는 리안 강에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발론트 왕국의 군사력이 뛰어나다는 건 다른 약소국과 비교했을 때였다. 제국의 무력에는 견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약했으니. 쿤의 예상대로 제국이 승기를 대부분 쥐게 되었다.

그나 그의 기사가 미치지 않고서야 웬만해선 본래의 뜻대로 흘러가게 될 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크게 다치고 돌아왔다.

‘상황이 이상하군.’

그의 고전은 쿤은 물론 기사단 내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라, 모두가 공황에 빠졌다.

부단장의 부재가 승기에 큰 여파를 끼치는 건 아니었으므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생각보다 거센 적국의 저항에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졌다.

그간 입은 군사와 재정 피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전쟁을 빠르게 끝낸다.”

주력 중 한 명이었던 부단장까지 다친 이상,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발론트 왕국과의 전쟁 때문에 병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타국이 돌연 침공해올 수도 있는 노릇이므로, 제국에 남은 전력을 보충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다음부턴 나도 함께하지.”

황제가 나서 참전하겠다는 말에 기사단장이 화들짝 놀라 그를 말렸다.

“아직 그리 급한 건 아닙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대는 내가 이런 전쟁에서 교전 중 운할 정도로 나약해 보이나?”

“그럴 리 있습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조금이라도 다치게 된다면…….”

분주하게 소리치던 단장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보급을 담당하며 소식통 노릇을 하는 간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 소문에 의하면 적군의 막사를 공주가 돌보고 있답니다. 정체를 숨기고 병상을 책임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공주의 신변을 보호해줄 기사는 없다는 뜻이겠군.”

“예, 맞습니다.”

“혹시 공주가 담당하고 있는 막사 내 기사의 수가 몇인지도 파악되었나?”

“그 얘기까진 들은 바가 없어 아직 모르겠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간부의 말에 쿤이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느닷없는 간부의 등장에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단장이 곧 부르짖었다.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적국의 공주를 납치할 거다.”

“예?”

벌써 계획이라도 세운 듯한 단호한 한 마디는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부단장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충분했다.

“적국의 공주와 함께 공주가 도맡은 기사를 인질로 붙잡을 거다.”

불리한 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볼모로 여럿이 잡혀버리면, 발론트 왕국도 어쩔 수 없을 터였다.

그때, 제국의 남부를 관리하던 사령관이 걱정을 내비쳤다.

“외람되오나, 공주와 기사가 볼모로 잡혔다고 적국이 항복을 선언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부터 저들에게 불리한 전쟁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의견 고맙군. 다행히도 나 또한 그대와 의견이 같아. 적국이 볼모를 구하는 대신 물러선다면 좋은 시나리오가 되겠지만, 그럴 확률은 현저하게 적지.”

“그렇다면……?”

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전쟁을 빠르게 끝낼 생각인 황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더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 싶은 단장. 뜻이 같으나 세부사항을 염려하는 사령관.

그들 또한 이토록 의견이 분분한데, 볼모의 희생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 대화를 거쳐야 할까.

결단코 적지 않은 생명이 걸려 있는 만큼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이고, 생명의 가치를 논하게 되며 내부에는 균열이 생길 것이다.

“볼모를 구하는가, 버리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갈 테지. 우리는 그 혼란을 타서 침략한다.”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작전 수행은 누가 합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황제의 계획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야 할 때다. 저리 중대한 계획을 누가 떠맡을 것인지.

긴장감과 어우러지는 적막 속.

“내가 한다.”

책임자가 마침내 정해졌다.

***

‘이 막사라고 했지.’

쿤은 지도에 그려진 ‘X’ 표시와 앞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간부가 그려준 지도가 정확하다면, 앞에 있는 막사가 공주가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공주가 적국의 막사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니, 쿤은 다친 병사를 연기해 그녀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이라고 했던가.’

과연, 공주님다운 모습이다.

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얼굴을 덮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동물의 것은 역하다 못해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그는 서둘러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절뚝거리며 들어오니 제법 주목이 된다.

작은 체구로 발발 뛰어다니던 한 여자가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다가온다.

“기사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나……!”

여자는 들고 있던 것도 바닥에 내팽개친 후 쿤의 팔을 들어 제 어깨에 올린다.

체구 차이가 심해 부축이 되는 건가 싶지만, 그는 대충 끌려가 주는 시늉을 해주었다.

이윽고 쿤은 말끔히 치워져 있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잠시 후 축축한 물수건이 얼굴 위에 올라왔다. 얼굴을 뒤덮은 피가 지워질 때쯤 여자는 가만히 누워 있으라 지시했다.

분부대로 가만히 드러누워 있으니 조그마한 여자가 약을 한 아름 가져온 채로 달려온다.

“어디를 다치신 건지. 아, 말은 하실 수 없을 테니 힘 안 써주셔도 돼요. 힘을 뺀 채로 가만히 누워 계세요. 잠이 오더라도 정신은 가능한 붙잡고 계시고…….”

종알종알.

쉬지 않고 떠드는 여자는 꼭 쿤이 키우는 한 새를 닮았다. 목소리도 듣기 좋은 것이, 정말 그 새가 인간이 되어 돌아온 게 아닐는지.

여자는 천으로 머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쿤의 상처에 고정되어 있다시피 한 눈도 심해처럼 푸르른 색이었다.

클로에 아르헨.

빌어먹게도 저 여자가 쿤이 찾는 적국의 공주가 맞는 듯했다.

‘대충 아픈 체하다가, 밤이 되면…….’

쿤이 고개만 살짝 돌린 채로 막사를 둘러보았다. 병상 위에 누워 있는 기사의 수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굳이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납치극을 벌일 필요는 없다. 그는 인적이 드물어지는 새벽까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딱 그때까지만 저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거다. 딱 그때까지만 제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을 거다.

“폐하, 적국의 공주는?”

그랬는데!

정작 새벽이 되어보니 쿤은 홀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더란다.

“생각보다 강하더군.”

“……! 경계심이 엄청난가 봅니다!”

“……그래. 그러니 다음에 다시 가보도록 하지.”

완벽하게 틀어진 계획에 쿤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임무를 실패한 적이 있던가?

일국의 공주가 생각 없이 신변을 노출한다 싶었더니. 다 계략이 있던 것일까.

다음번엔 기필코 계획을 성사시키리.

그렇게 쿤은 다짐했었다.

16850164495843.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