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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빌어먹을 감정 (26/46)


#26. 빌어먹을 감정
2023.05.26.


며칠 뒤, 그는 클로에가 머무는 막사로 다시 향했다.

이번에도 임무에 실패한다면 부하들을 볼 면목이 사라지므로 오늘은 꼭 공주를 볼모로 납치해와야 했다.

쿤은 저번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밀한 계획을 짰다. 그는 병사들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막사에서 치료받을 수 없다며, 클로에를 인적 드문 곳으로 안내할 예정이었다.

여자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지니 빨리 해치우는 게 낫겠지.

그는 막사로 들어가자마자 소리쳤다.

“간호사님, 저쪽 기사들이…….”

목소리를 내자마자 클로에와 보기 좋게 마주하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는 약초를 찧던 볼을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하고는 달려왔다.

“에녹, 에녹 경 맞죠?”

수많은 환자를 돌봐왔을 그녀는 용케도 쿤을 기억했다. 그가 아무렇게나 지었던 가짜 이름조차도.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은 자신의 옷깃을 부여잡는 여자의 손에 머물렀다.

자잘한 상처가 많은, 공주의 것치고는 굉장히 거칠어진 손. 하얗고 길게 뻗은 손가락은 아름다우나 기사의 것들처럼 미천하기 그지없다.

한데 본능은 그것을 멋대로 만지고 싶어 했다. 제 손아귀에 넣어 마구 쥐고 싶었다.

“다친 몸으로 하루 만에 돌아가셔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오늘은 다리도 다치셨군요. 어서 누우세요. 상처를 봐 드릴게요.”

상대는 정녕 쿤의 다짐을 무마시킬 속셈인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현혹했다.

쿤은 자신의 계획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로 멍하니 밑을 내려다보았다.

여타 불순물 따위는 섞이지도 않은 새파란 눈. 호수처럼 투명한 눈동자 너머로 그의 얼굴이 투영되고 있었다.

맑은 눈이 희미하게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걱정.

그녀는 뭣도 모르는 주제에 쿤을 걱정하고 있었다.

우습기도 하지. 쿤은 저 가소로운 감정을 무시해야만 했다. 괜찮다며, 부디 다른 기사들을 먼저 살펴달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녀를 인적 없는 숲으로 유인한 후 자신의 막사로 데려가야만 하질 않은가.

기사들의 원성을 낮춰줄 인질. 불필요한 전쟁의 끝을 알려줄 중요한 여자.

“……그래 주시겠습니까?”

빌어먹게도 쿤은 이 여자 앞에서만 나약해졌다.

***

이 퀴퀴한 막사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덧 사흘이 흘렀다.

어젯밤, 쿤은 기사단이 있는 막사로 서신을 보냈다. 예기치 못하게 오래 머무르게 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몸조심하라는 걱정과 함께 확인 답변이 날라왔다.

작전을 지체해도 된다는 사실에 부끄럽긴커녕 기뻤다.

수많은 기사의 동경을 받고 사는 몸. 그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몸이 이까짓 걸로 작전에 실패했다고 하면 창피한 줄 알아야 하는데.

‘……미쳤군. 방금 정신 차리노라 다짐해놓고선.’

그러나 그 감정과는 별개로 본인의 임무는 반드시 완수해야 했다.

그가 한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휘둘릴지라도, 또한 그게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 하잘것없는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대와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아침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그녀에게 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밤마다 그녀가 붕대를 갈아주러 오곤 했지만, 이젠 스스로 하겠다며 그녀를 쳐내기도 했다.

자기 전마다 클로에의 얼굴이 이따금 아른거리긴 했지만. 또 그녀가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하는 게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세워지긴 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듯 열병이 점점 잦아드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이른 시일 내에 불필요한 감정을 털고, 작전을 재차 시행할 수 있을 터.

처음으로 사춘기 소년의 마음이 되어버린 남자는 사랑을 쉽게 치부해버렸다.

쿤이 클로에를 무시하게 된 지 어언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늘 밤도 그 혼자 상처를 치료하고 병상에 누웠다.

항상 바쁘게 살아왔던 몸에 휴식을 주어서일까. 피로는커녕 몸이 가뿐했다.

이대로라면 날밤을 새울 것이 분명하므로 그는 막사 밖을 나가 보기로 했다.

황제의 용안을 아는 자도 없겠다, 연기를 위해 머리카락도 염색해놓았겠다, 그를 알아볼 자는 없을 테다.

막사의 뒤쪽에 가까이 다가갈 무렵,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한창인 새벽 중 대화가 오갈 일은 대개 하나다.

병사들이 은밀한 작전을 짜거나, 주제도 모르고 밀회를 하는 것.

이런 곳에선 후자에 가깝겠거니.

가십거리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쿤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자꾸 이러시면 소리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고작 목소리 따위로 쿤의 심장을 간지럽혔던 여자의 것이다.

음성에 담긴 감정을 읽는 데 원체 능한 쿤은 저것이 곤경에 처했을 때나 나오는 기색이란 걸 쉬이 눈치챘다.

“왜, 그러면 다친 병사들이 아가씨를 보호해줄 줄 알고?”

그가 얼어 있는 사이 상대가 대답했다. 비아냥대는 음성과 말투가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생존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여 있기 때문일까, 기사들의 번식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수컷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서 클로에의 존재는 자극적일 터.

어여쁜 여자가 친절히 저들을 보살피니 은혜도 까마득히 잊은 채로 짐승처럼 구는 것이겠지.

물론 쿤은 그런 작자들을 역겨워했다. 기사로서 제일 중요한 기사도 정신을 잊은 자는 기사로 불릴 자격이 없으니.

마찬가지로 기사도 정신에 따르면 쿤은 그녀를 구해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인간이라고,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말았다.

여기서 저 여자와 다시 엮이게 되어 좋을 것이 없을 걸 알고 있었기에.

겨우 짓누른 감정을 다시금 풀어준다면, 그땐 저조차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불어 있을 것만 같아서.

“병상에 누워 있는 병신들이 널 구해줄 것 같나? 그럴 리가.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

조국의 기사들을 구하는 것과 한낱 여자를 구하는 것.

그중 어떤 것이 정말 기사다운 것인지 미처 계산할 틈도 없었다.

남자의 더러운 손이 클로에의 가슴께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을 때, 쿤은 이미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여기 있네.”

“…….”

“네가 말하는 병X.”

그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거리를 두어야 마땅한 여자는 이미 쿤의 품 안에 갇혀 있었고, 그녀를 희롱한 기사는 발로 차여 정신을 잃은 채였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손에 결박되어 있던 몸이 꿈틀거린다. 쿤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뻗은 것이다.

쿤은 본능적으로 클로에를 주시했다. 운 것인지 촉촉한 눈망울. 더욱이 투명해진 눈동자 너머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영락없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것이다.

***

어찌 잠자리에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클로에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기상하자마자 그녀를 좇던 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 후, 클로에는 먹을거리를 들고 쿤의 병상으로 다가왔다.

“어젠 감사했어요. 에녹 경.”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비록 변수가 생겼다지만, 초반의 다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러 클로에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선을 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에는 제가 하고픈 대로 과일을 깎고 있었지만 말이다.

“보니까 다리는 나으셨던 것 같은데.”

그녀는 쿤의 다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제 그 일이 있었는데도 쿤의 다리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역시 클로에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새 쿤이 사용한 다리를 본 듯했다.

‘떠나야 하는군.’

거짓말이 들통난 이상 막사를 떠나야만 했다.

그에 쿤은 좌절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작전의 실패를 알려야 하기 때문인지. 눈앞의 여자와 같은 곳에서 머물지 못하기 때문인지.

쿤은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외면했다.

“저 때문에 팔을 다치셔서 어떡해요.”

클로에가 무어라 외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 안에 갇힌 듯 먹먹한 소리만 들려올 무렵, 유독 선명하게 들린 문장이 있었다.

팔?

쿤이 의아한 듯 제 팔을 바라보았다. 옷에 피가 짙게 묻어 있었다.

정확히는 모발 염색을 위한 색소였다. 이틀 전, 염색이 서서히 빠지자 소목을 끓여 머리에 덧바른 바 있었다. 아마도 그때 튄 거겠거니.

피치고는 많이 묽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정황상 피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 잔 상처는 곧 나을 겁니다.”

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연기했다.

“그때까진 여기 머물러 주시겠어요? 제가 상처를 봐드리고 싶어서요.”

그에 쿤은 반색했다. 왜인지 안도하기도 했다.

작전이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클로에와 더 머물러도 되기 때문인지.

쿤은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외면했다.

클로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을 돌보다가도 볼일이 끝나면 그의 자리가 제집인 것처럼 곧장 돌아왔다.

그녀 또한 그게 목숨에 지장이 가는 상처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원체 상처가 많은 쿤의 팔 중 아무거나 지목하고 둘러대기도 편했다.

그녀는 직접 빻은 약초를 쿤의 팔에 문댄 후 정성스레 붕대를 감아 주었다. 칭칭 감은 게 흡사 미라의 팔 같았다.

“부디 평안한 밤 되세요. 에녹 경.”

이윽고 클로에가 그의 붕대 위로 입을 맞추었다.

간호사의 입맞춤은 회복을 촉진한다는 가설이 있다. 아마 클로에 또한 그 의미로 입을 맞댄 것일 터.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러나 그녀의 의도가 어떠하든 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심장이 마구잡이로 두근대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가 혹여 상대에게 들릴까, 쿤은 한참이나 숨을 참았다.

‘적의 칼에 심장이 관통될 뻔했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뛴 적은 없었지.’

제국의 통치자도, 세기의 기사도, 잔혹함의 대명사도, 본질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그 또한 사랑이란 본능 앞에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느 멍청한 남자 중 하나였음을.

나약함을 인정한 남자가 다음으로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제 과오를 받아들이고 작전을 포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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