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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사랑에 미쳤어 (27/46)


#27. 사랑에 미쳤어
2023.05.27.


애초부터 가짜였지만 다리도 나았겠다, 쿤은 마음대로 막사를 돌아다녔다.

우연을 가장해 클로에를 맞닥뜨린 후엔 아예 그녀를 돕기도 했다.

처음에는 괜찮다며 사양하던 그녀도 나중이 되어서는 쿤을 혹사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클로에가 말하는 오늘의 일정은 이러했다.

막사를 청소한 뒤 병사들의 피와 땀을 닦을 천을 빨래한다, 해가 저물 즈음 식사 재료를 손질하고, 죽을 끓이면 된다.

말이야 쉽지, 막사에 머무는 병사의 수를 생각하면 일찍이 시작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좁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넓군.’

클로에가 약초를 구별하는 동안 쿤은 막사를 청소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쓰레기를 줍는, 아주 간단하지만 쿤이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일들.

빗자루를 든 채로 막사를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이 광경을 부하들에게 들킨다면 놀림거리가 되는 것에 모자라 평생의 술안주가 될 테다.

바깥에서 돌아온 클로에는 깨끗해진 막사를 보며 좋아했다.

“다 하신 거예요? 수고해주신 덕에 금방 다음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순진한 얼굴로 무서운 말을 마구 늘어놓다니. 그래도 쿤에겐 그 모습마저도 귀엽게 보여, 그는 불만 없이 그녀를 따랐다.

다음은 빨래였다. 피로 물든 흰 천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소독하는 일이었다.

수십 개에 다다르는 천을 전부 다.

두 사람은 막사 뒤에 있는 작은 강으로 향했다.

쿤은 앉아 흐르는 강물에 천을 적셨다. 곧 피가 점차 옅어지며 씻겨 내려지는 게 보였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클로에 또한 열심히 빨래하고 있었다. 힘에 부치는지 덥지 않은 날씬데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힘들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괜찮아요. 힘들긴커녕 뿌듯하거든요.”

“이 일을 매일 하시는 겁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그러고 있어요.”

클로에가 슬그머니 웃으며 대답했다. 핏물이 잔뜩 튀어 있는 얼굴이 저토록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 싶었다.

쿤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여기는 왜 오신 겁니까? 이 위험한 곳에, 그것도 혼자서.”

그의 질문에 천을 마구 구겨대던 손짓이 불현듯 멈췄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라고요.”

“…….”

“아빠, 오빠, 친구들…….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은, 저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클로에는 다시금 미소 짓고 있었다. 제가 말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비록 그들을 지킬 순 없겠지만, 그들과 같은 견해를 한 기사분들을 지키고 싶었어요.”

참으로 순수한 생각이다. 그러나 쿤은 그녀의 청렴함을 추켜세울 수 없었다.

어찌, 그가 감히.

“……훌륭하십니다.”

“에녹 경이 해주시는 칭찬은 꼭 진짜 같네요.”

클로에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천진난만한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음에도 쿤은 차마 웃지 못했다.

그가 떫은 마음과 충돌하고 있을 즈음 클로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깐 넉살 좋게 거짓말했지만, 사실 이 일이 많이 힘들어요. 그때 보셨던 것처럼 위험한 일도 많고요.”

그녀가 다른 기사에게 위협 당했던 사건을 일컫고 있었다.

그날 밤을 상기하니 자연스레 화가 솟구쳤다.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곧장 의지를 잃으며 힘이 풀렸다.

쿤 또한 그 기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클로에가 이곳에서 제 나름대로 소신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그는 그 취약함을 이용해 그녀를 납치할 심산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되었겠지.

그것이 공주에게 얼마나 큰 절망을 안겨줄지는 구태여 짐작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안다.

쿤은 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네?”

“사람을 함부로 신뢰하지 말고 경계하시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스스로를 좌절하게 만든다. 사랑이란 거지같은 감정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나 보았다.

이쯤 되니 쿤은 괜히 클로에가 미웠다.

공주가 조금만 덜 친절했더라도, 덜 사랑스러웠더라도, 덜 아름다웠더라도.

그가 이런 열등한 감정에 빠질 일은 없었을 텐데.

“에녹 경, 저 혼내시는 거예요? 억울한걸요. 충분히 그러고 있거든요.”

“그런 것치고는 제게 너무 잘해주셨습니다. 제가 그 기사와 별반 다를 거 없는 사람이면 어찌하셨을 겁니까?”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이요?”

“예. 만일, 적국의…… 기사였다면 어찌하셨을 겁니까? 제가 간호사님을 해코지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사심이 적잖게 들어가 있는 질문이었다.

이번만큼은 클로에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답변을 곰곰이 고민하는 행색이었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각자의 시간대에 맞춰 호흡이 이어지는 소리.

“사람들은 적과 싸우죠. 나의 목숨이 빼앗기기 전에 적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

부산물에 가까운 소리만 오갈 무렵, 클로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쟁 속 살육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히 사/람을 해치우기 위해서가 아니잖아요. 서로, 각자 지킬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이 조국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소신이 되었든…….”

간드러진 클로에의 음성이 마치 살랑이는 바람과 엇비슷하다. 부드러운 발음이 그녀의 말을 연거푸 곱씹게 한다.

“그래서 내게는 상관없어요. 적국의 것이 되었든, 내 사람의 것이 되었든, 소중한 목숨 하나가 평화를 불러일으킬 테니까.”

참으로 장황한 말이다. 쿤은 그녀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설령 제가 적국의 기사일지라도, 저를 살린 것에 대한 후회가 없으시단 말씀입니까?”

“그럼요. 저는 알거든요. 에녹 경께선 평화를 보답해 주실 거란 걸. 그 크기가 어떻든 간에요.”

***

“폐하, 너무 늦으셨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달리 다친 곳은 없으신 겁니까?”

그날, 쿤은 멍청한 에녹에서 제국의 통솔자로 돌아갔다.

쿤이 본인의 막사에 도착하기 무섭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기사들의 눈이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들의 주군이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안타깝게도 원하는 바를 들려주지 못하게 되었다. 더불어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어야 할 말까지 전해주어야겠지.

“임무는 실패했다.”

“……예?”

“더불어, 전쟁을 끝낸다.”

기사들의 표정이 무덤덤했다. 마치 쿤이 당연한 걸 말했다는 듯.

“적국에 종전을 선언할 거야.”

쿤은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자 재차 입을 열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기사들이 경악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고요해진 내부. 덩그러니 앉아있던 쿤이 휑한 막사를 둘러보았다.

막사를 빼곡하게 채우던 기사들은 주군의 결정이 불만스럽다는 듯 항의하다가 진이 빠져 돌아갔다.

기사들은 쿤의 예상대로 반발이 심했다. 코앞에 있는 성공을 두고 굳이 종전을 선언할 이유는 없단 것이다.

이후 기사들이 열심히 쿤을 설득해보았지만, 그는 제 뜻을 접지 않았다.

‘이해받지 못하겠지.’

막사를 떠나기 전, 저를 바라보던 눈빛들이 선명하다. 늘 동경으로 빛나던 눈동자들이 그때는 하염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생소한 반응들이 쿤을 두렵게 했다.

그는 미움 받는 것에 익숙하다가도 더없이 낯선 통솔자였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며 갑작스레 즉위하게 된 그는 많은 멸시를 받았다. 갓 성인식을 치른 황태자가 대체 무얼 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늘 그를 뒤따랐다.

보란 듯 일어서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렸고, 수많은 피를 보았다.

또한, 기사로서만이 아닌 황제로서도 완벽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뿌리부터 없애 청렴한 황실을 만들었다.

오로지 능력만을 추켜세워, 마땅한 그릇이라면 신분과 관계없이 황실의 기사단에 입단할 기회를 주었다.

반대로 신분의 고결함을 잃은 귀족에게는 사업 지원금을 기부해줌으로써 그들만의 강점을 이어나가게 했다. 이는 더 큰 파장을 일으켜 타국과의 교류에도 원활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제국민과 귀족 모두에게 공평한 제도를 만듦으로써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렇게 쿤 프리히드는 인정받았다. 제국 내에서는 아무도 욕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황제가 되어서.

하지만 지금 그가 벌일 짓은 실수로 그치지 않을 테다. 스스로 시작한 주제에 막대한 손해를 떠안고 나가야 할 테니까.

쿤의 꿈은 막대한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으며, 발론트 왕국이 발판이 될 것이었다.

제국과 가장 가까운 국가이자 그리 약하지는 않은 존재. 전력을 최소화하면서도 본보기로 삼기 최적화된 곳.

쿤은 발론트 왕국을 복속함으로써 제국 통합의 시초를 알리기로 계획했다.

다들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황제를 말렸으나, 그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 한마디에 전적으로 지지했다.

‘포기하면 우스운 꼴이 되겠지.’

이를 실패하게 된다면 황제의 계획은 허황된 꿈에 그치게 된다. 처음부터 패배를 맛보고 돌아왔는데, 대체 누가 계획을 계속 지지해주겠는가.

‘듣기 싫어 몸부림쳤던 것들을 다시 들어야 할지도 몰라.’

그뿐이랴, 사명을 실패한 황제의 지위가 고꾸라지는 것은 물론 기껏 다져놓았던 민심이 무너질 테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지고 싶다.

저를 홀려버린 신기루를, 딱 한 번만.

“미쳤군…….”

저것만 있으면 내 평생이 행복해질 것만 같아서.

“사랑에 미쳤어. 쿤 프리히드.”

저 여자만 손에 쥔다면 세상이 저를 등지더라도 어떤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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