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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집으로 돌아가야지 (28/46)


#28. 집으로 돌아가야지
2023.05.28.


그 뒤는 간단했다.

패배를 직감한 왕국은 매번 기사를 보내 황제를 설득시켰고, 그날 또한 예정된 기사가 황제의 막사에 방문했다.

오늘 방문한 기사, 칼리스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자신과 왕국을 살려달라고 했다.

기사의 긍지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비굴한 부탁. 칼리스 또한 자신의 부탁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쿤은 기사의 간청을 곧바로 기각했을 테다.

하지만 오늘의 대답은 달랐다. 황제가 칼리스의 청을 냉큼 받아들였으니까.

이후 칼리스 본인조차도 의아했는지 되묻기도 했다. 확인 사살을 받은 그는 멍한 얼굴로 막사를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발론트 국왕이 부리나케 쿤을 찾아왔다. 정녕 자신의 기사가 진실된 정보를 들고 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공교롭게도 쿤은 여전히 같은 뜻이었다. 그곳에서 두 국가는 협상에 성공해, 종전을 선언했다.

아울러 두 국가는 동맹을 맺었다.

앞으로 두 국가는 서로 전쟁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되, 더욱 활발히 교류하기로 계약한 것이다.

더불어 황제는 전쟁으로 생긴 제국과 왕국의 손해를 전부 배상하노라 약속했다.

발론트 왕국에겐 이보다 훌륭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건이었다.

종전의 알림이 제국에 널리 퍼지자 제국은 떠들썩했다.

처음엔 다들 질 낮은 가십거리라 여겼지만, 그들의 자식들이 하나둘씩 돌아오자 그제야 여론을 믿었다.

쿤의 예상과 달리 반발이 그리 심하진 않았다.

이미 세계의 주도권을 쥔 제국이 굳이 피를 보면서까지 전쟁을 반복할 이유는 없다고 느낀 것이었다.

물론 이익을 불리리라 기대했던 귀족들에겐 많은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듯, 제국은 서서히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안일했던 마음을 다잡으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두려움의 대명사이지만 제국 모두가 섬기는 완벽한 황제를.

전쟁 때문에 밀려 있던 일을 닥치는 대로 처리했다. 그의 손을 거친 보고서를 합치면 책 몇 권은 거뜬하게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밤이 되면 누군가 생각났다. 새벽의 백유가 반짝이는 걸 보노라면, 그것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조금만 더 후에, 왕국이 조금만 더 평온해지면 그곳에 발걸음 하리라.

나름의 배려를 베풀며 인내하던 무렵이었다.

“폐하.”

한없이 고요했던 집무실. 펜촉과 종이 소리만 가득했던 내부에 마침내 새로운 소리가 덧대어졌다.

딜런의 부름에 집중이 꺼졌다. 쿤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서는 상대의 입장을 허가했다.

“부디 들고 있는 것이 새롭게 작성해야 할 서류가 아니길 바라.”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딜런이 능청스레 대꾸하며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주군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서신이 들어 있었다.

“발론트 국왕이 보낸 서신입니다.”

굳은 실링 왁스엔 왕국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 있었다.

“제국과의 종전을 성사시킨 기사가 이번에 결혼을 하다더군요. 종전과 기사의 결혼을 축하할 겸 왕궁에 초대한답니다. 아니, 제아무리 종전을 도운 기사의 결혼일지라도, 일개 기사의 결혼식에 폐하를 초대하는 건 엄연히 결례 아닙니까!”

“우리더러 그들과 함께 한 동맹을 잊지 말아달란 것이겠지. 언제 서약을 깨고 달려들지 모르니.”

칼리스 아르헨.

공공연하게는 그 기사가 황제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전에도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필요했기에, 기사에게 설득당해 종전한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꼭두각시 신세였던 그 영웅이 왕국에선 세기의 영웅이 되었더란다.

양심이 있다면 겸손해질 줄 알아야지, 냉큼 공을 받아갈 줄이야.

“몰락해가는 귀족이 공주와 결혼이라, 신데렐라가 되었군.”

“가실 겁니까?”

“멀리서 서신까지 부칠 정도로 친히 부탁하는데, 얼굴 한 번 비춰주어야지.”

드넓은 아량을 베푸는 체하지만, 사실 본심은 따로 있었다.

제게는 왕국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때마침 왕실의 결혼식이라 하니, 분명 볼 수 있을 테다.

초대에 응한 쿤은 상대측의 일정에 맞추어 왕국으로 출발했다.

왕국의 신데렐라가 될, 기사의 신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없었다.

저를 사춘기 소년으로 만들었던 여자를 볼 생각에 기대만 키워갔을 뿐.

***

“신부는 신랑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결혼식에선 빠질 수 없는 맹세. 서로를 사랑하노라 신에게 약속하는 순간.

그저 당연한 관습을 밟고 있는 것뿐인데, 쿤은 맹세를 묻는 신관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천사 같았다. 신부는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드레스와 거대한 장신구를 하고 있지만, 단언컨대 사람들의 이목을 사는 것은 신부의 얼굴이었다.

공주를 보기 위해 쿤은 이곳으로 한걸음 달려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보고팠던 그녀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불행이로구나.

‘평화…….’

쿤은 조용히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부케를 든 채로 덩그러니 서 있는 여자의 표정은 신부의 것이라기엔 미묘했다.

두 사람의 결혼 사정을 알고 있는 쿤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꼴을 가늠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의 말로가 고작 결혼이라니. 갸륵한 마음이 안타깝다 못해 분하게만 느껴졌다.

‘이것이 네가 바라던 평화인가?’

쿤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었다.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가 클로에의 손목을 붙잡고 교회를 나오고 싶었다.

뒷감당이야 어렵겠지만 충분히 수습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게 되겠지마는, 그가 지금껏 쌓아왔던 명성이 무너지게 되겠지마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맹세합니다.”

맹세를 위해 고개를 든 클로에의 얼굴을 보지 못했더라면.

또 칼리스를 향한 클로에의 눈빛을 읽지 못했더라면.

서슴없이 본능에 저를 맡겼을 텐데.

저도 모르게 불그스름해진 여자의 뺨.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드러나는 수줍은 표정.

“……신랑은, 신부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

쿤은 결혼식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제국으로 돌아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지 않다.”

쿤이 즉각 대답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제국으로 돌아가지. 이 더러운 땅에 숨 쉬고 있는 것조차 기분이 더럽거든.”

이어지는 신경질적인 말에 딜런이 곧장 입을 다물었다.

평소의 딜런이었다면 넉살 좋게 한 번 더 까불었겠지만, 얌전히 닥쳤다.

‘얻은 것 하나 없이 쫓겨나는 꼴이로군.’

그녀 하나 얻고자 모든 걸 잃었더니,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모든 걸 얻어버린 기사 놈이 제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 버렸다.

‘사람을 잘못 보았어. 다른 기사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쿤이 들끓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칼리스에게 감히 기회를 주었으면 안 됐다.

아니다. 맞닥뜨린 것이 다른 기사였더라도 최후엔 클로에 옆에 붙어먹었을 테니, 이유가 들통나게 되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쿤이 직접 종전을 알렸어야 했다.

아니다. 전쟁의 승기를 쥐어 왕국을 제 것으로 만든 뒤 공주를 약탈했어야 했다.

아니다. 그냥 클로에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되었다.

아니다. 그냥……. 그냥…….

자책으로 시작한 쿤의 독백은 머지않아 끝이 났다.

‘거지 같군.’

쿤은 제국으로 향하는 며칠 내내 기분이 더러웠다. 낮이건 밤이건, 깨어나 있을 때이건 자고 있을 때이건 온종일.

제국에 도착한 뒤에도 이따금 생각나 울화가 치밀었으나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해치우느라 화를 낼 틈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비로소 머리가 현실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클로에는 칼리스를 사랑한다. 비록 혼자 하는 사랑일지라도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이라면, 쿤은 개입할 수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르헨 공작가에 첩자를 심어 두었다. 멀리서나마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매달 들려오는 사정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왕국의 공주가 되어서 그딴 곳에서 하대를 받는 꼴이라니. 그런데도 클로에는 모든 것을 인내하고 있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첩자가 충격적인 이야깃거리를 가져왔다.

칼리스가 공작가로 ‘헬레나’라고 불리는 여자를 들였다는 소식 말이다.

‘공주도 참 불쌍해.’

불쌍한 여자. 이젠 일말의 희망도 없이 정말로 외톨이가 되어 버렸구나.

국왕은 칼리스의 무궁한 부상을 두려워하곤 공주와 작위를 팔아넘겼다.

이까짓 일로 공주와 칼리스를 이혼시켜주진 않을 터.

‘지금 손을 내밀면…….’

지금 공주의 옆엔 그 누구도 없다.

‘지금은, 공주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을까.’

***

감은 눈이 돌연 뜨였다. 갑작스레 세상에 드러난 붉은 눈이 주위를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즐겁게 해주던 피사체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엔 먹다 남은 크래커와 두 개의 술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 따위로 몸을 옮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문으로 달려갔다. 빠른 걸음 때문인지 실크 가운이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꽤 거슬렸지만, 지금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할 시간도 없었다.

복도로 나간 그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를 발견했다.

의식도 없는 하녀 따위를 배려하기 위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엉엉 울고 있는 클로에를.

그제야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가빴던 숨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쿤은 소리 없이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풀썩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저 또한 무릎을 꿇었다.

“공주.”

두 글자에 클로에의 고개가 들린다. 이번에도 그녀의 눈에는 의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왜 자신이 그딴 호칭으로 불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쿤이 대답해줄 수 없는 주제다. 그녀를 부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쿤의 마음을, 이해라도 하겠는가.

“아직도 공작을 사랑하나?”

쿤의 등장에 울음을 멈추느라 바쁜 그녀는 열심히 고개만 저었다.

“그것참 다행이로군.”

가능하면 말로 듣고 싶었지만, 이만하면 되었다. 저 고갯짓을 본 것만으로도 일 년간 쿤을 집어삼키던 암울함이 사라졌다.

이내 그는 드물게 밝은 웃음과 함께 손을 뻗었다.

“일어나. 공주.”

“…….”

“집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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